325. 이능(異能)
“형님. 잘라 가시죠?”
“네가 볼 때도 내 샷이 불안해?”
“네. 공의 궤적이 평소와 다릅니다.”
“그럼 7번 아이언 줘.”
필상은 4번 홀까지 겨우겨우 파를 유지해 왔다.
최종 라운드의 긴장감 때문이라면 이해되지만 그렇지가 않다. 긴장하기보다는 극도로 흥분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그 좋던 스윙의 일관성이 떨어지면서 원하는 샷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수를 잃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타구가 좌우로 흩어졌다.
“오라버니가 흥분한 것 같아요.”
“놈들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 없는 건가?”
“네. 이대로 가면 좀 불안한데,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 워낙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서…….”
경기를 따라다니는 이 대표와 봄도 안절부절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엉클 덕이 다친 모습을 본 이후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던 필상이 연습도 접고 뭔가를 깊이 고심하는 것을 보며 결국 평정심을 찾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뜻밖에도 필상은 심하게 흔들렸다.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도 무사히 넘긴 철인과 같은 사람이기에 이 상황을 극복할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스스로 이겨 내기만을 기도할 뿐.
-514야드 파 5홀이면 우리 공 프로에게 버디는 기본이고 이글도 선택 사항이 아니던가요?
-오늘 컨디션이 최악인 것 같습니다. 샷이 정확하지 않을뿐더러 티샷마저 방향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전 이런 모습이 왜 이렇게 낯설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을 수없이 봤지만 언제나 돌파해 냈거든요!
-여하튼 오늘은 그의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날인데…….
-공 프로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평소 긴장 따위와는 거리가 먼 선수지만 오늘은 스스로 밝힌 자신의 꿈을 마무리하는 날이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긴장을 한 것 같다고요?
임 캐스터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다만 샷 난조의 원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또한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 낼 것이라고 믿기에 차라리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해석하는 것이 나을 것도 같았다.
“남은 거리는 204야드입니다.”
“기왕 잘라 갈 거 160야드만 컨트롤할게.”
“네. 좋습니다.”
티샷을 한 타구가 헤비 러프에 기어들어 갔던 것이다.
아무리 러프에 떨어져 런이 없었어도 드라이브 티샷 비거리가 312야드밖에 나오지 않은 것도 의아한 지점이었다.
뇌리에 남은 분노가 전신의 근육에까지 악영향을 미친 결과다. 차라리 그걸 모른다면 나을지도 모르나 자신의 스윙이 어떤 상태인지 알면서도 교정하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다.
때문에 긴장을 풀고 연습 스윙도 넉넉히 했건만 필상의 7번 아이언 샷은 의도한 거리와 무려 10야드가량 차이가 났다.
“160야드 보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뒤땅을 때린 것도 아니다.
제대로 임팩트가 되었건만 152야드 지점에 멈췄다. 탄도를 띄우려고 했는데 원하는 궤적이 나오지 않으며 더 굴렀다.
너무 자신에게 실망스러워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이제는 이동 중에도 토납이 가능하다. 그래서 애써 중단전을 개방하고 주변의 맑은 기운들로 채웠건만 왜 정상적인 샷이 나오지 않는지 황당할 뿐이었다.
그런데 평소 필상의 성격을 잘 알고 담담하던 흑돈이 오늘은 뭔가 작정을 했는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만약 제가 이런 경기를 펼친다면 형님은 뭐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정신 차리라고 하겠지.”
“그럼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고마 해라!”
안 그래도 심란하기에 흑돈의 말이 곱게 들릴 리 없었다.
그래도 일부러 사투리까지 써 가며 자신의 건재함을 전했지만 흑돈은 보다 적극적인 개선 의지를 드러냈다.
“샷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 것 아닙니까?”
“…….”
그 말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이기에.
하지만 흑돈의 어깨에 팔을 올린 필상은 가볍게 토닥였다. 그 수다스러움이 자신을 위한 노력이라는 것을 다 아니까 이제 그만하라는 의미였다.
‘대체 샷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는 이유는 뭐지?’
경기 중에 자신의 스윙에 대해 고심하는 것은 금물이다. 의심은 곧바로 샷 난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아직도 남은 홀이 많기 때문에.
하지만 생각이 번잡한 필상은 53야드 웨지 샷에서 또 한 번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탑핑이 난 타구가 그린을 훌쩍 넘어 버린 것이다.
2온은 커녕 3온도 실패하면서 결국 만만한 홀에서 필상은 보기를 적어 내고 말았다. 그래도 악착같이 승부에 임했으나 전반을 마칠 때 필상의 성적은 -15로 2타를 잃고 말았다.
-15 공 필상
-12 셰인 로리
-11 로리 맥길로이, 브룩스 코엡카
어제 공동 2위였던 셰인 로리가 3타 차까지 따라붙었다.
2라운드부터 점차 샷이 좋아진 매킬로이도 4타 차로 우승 가시권에 들어섰으며 필상을 잡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지목받은 코엡카도 경쟁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필상은 남의 성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금은 누가 어떻게 쫓아오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샷부터 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드코스에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보통 9개 홀이 남은 상황에서 필상이 3타든, 4타든 앞서면 이미 우승 경쟁은 끝났다고 봐야 하는데 팬들은 물론 당사자인 필상도 위기감을 느꼈다.
자신이 원하는 샷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장난하시는 거는 아니죠?”
“그만하라니까!”
아무리 화가 나도 흑돈을 향해 손까지 치켜들 줄은 몰랐다. 당황한 흑돈의 표정을 확인한 필상은 들었던 그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너무 아찔한 장면이 터졌기 때문이다.
345야드 파 4홀에 불과하지만 오늘 자신의 티샷은 거리가 나오지 않아 적당히 페어웨이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샷을 할 때 몸이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더 보내려는 생각이 없었음에도 다운 블로우에 돌연 힘이 잔뜩 들어가며 타구가 확 당겨진 것이다.
“나무 맞고 튀어 나와 다행입니다.”
“그래.”
상당히 폭이 넓은 러프를 모두 건너 카트 도로에 맞은 타구가 높이 튀는 것을 볼 때는 정말 아찔했다. 그 안은 샷이 난해한 얽히고설킨 잡목 수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작은 나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타구가 나뭇가지에 맞고 다시 카트 도로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컨샷 지점으로 이동하던 필상은 다소 해괴한 감흥을 느껴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봄과 이 대표가 따라오다가 필상이 돌아보자 손을 흔들어 보였다.
똑같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측근들이 안쓰러웠으나 필상의 시선은 그 둘이 아닌 다른 자에게 꽂혔다.
‘뭐하는 작자지?’
기온이 낮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햇살이 뜨거워 반팔을 입은 갤러리들도 흔한데, 후드를 뒤집어 쓴 노인네가 필상과 시선이 마주치자 슬며시 인파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자의 좌우로 가드가 두 명이나 달라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필상이 받은 기분 나쁜 감흥이 그자에게서 나왔다는 직감은 있었으나 확신하기 어려워 일단 잊었다.
세컨 샷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78야드 거리를 샌드웨지로 공략하던 필상은 이번에도 백스윙을 할 때, 자신의 기운이 비정상적으로 운용되는 것을 느꼈다.
‘뭐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인위적인 변화가 감지된 것이다.
원하는 스윙 스피드는 이미 충분히 단련된 상태인데, 그 익숙한 스피드보다 급한 다운 블로우가 이뤄지면서 이번에도 그린을 오버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꾹 참았다. 누군가 자신을 공격한다는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별의별 놈이 다 있겠지!’
만약 자신이 이능(異能)을 지니지 않았다면 생각조차 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본인도 남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 상황을 차분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나이스 샷!”
15야드 칩샷이 그린에 바짝 붙었다.
탭 인 파를 기록하는 퍼팅 때도 이상 현상은 감지되지 않았다. 뭔가 눈치를 챘나 싶었지만 174야드 파 3홀 티샷 때는 확연하게 느껴졌다.
어드레스를 취한 뒤 테이크 백을 할 때부터 희미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더니 백스윙 탑에 이르는 순간, 사악한 기운이 필상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아무리 중단전이 열린 고수라도 몸의 중추인 심장에 타격을 받고 정상적인 스윙이 가능할 수는 없다. 게다가 이번에는 그게 어디에서 발사되었는지도 포착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초감각을 지녔다는 것을 놈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원인을 파악하자 일단 마음이 편해졌다.
‘저걸 어떻게 처리하지?’
비록 공격하고 있지만 놈의 이능은 턱없이 모자란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군가에게 공간을 격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대단하다고 여길 수 있으나 필상은 격이 다르다.
행한 적은 없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 자리에서 절명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놈이 영악하게 인파 속으로 자꾸 숨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격이 달라도 결국 놈을 해결하려면 일정한 지점을 향해 기를 발사해야 한다.
하지만 놈을 잡자고 아무 상관도 없는 희생자를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적당히 당해 주면서 최적의 기회를 노렸다.
“점점 좋아지는 것 같은데요?”
“그러냐?”
“어?”
“왜?”
“형님 표정이 한결 편해진 것 같아서요.”
“그래. 원인을 알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오케이!”
대비하기 때문인지 놈의 공격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었다.
그러면서 타수를 잃지는 않았으나 맹렬히 추격한 셰인이 13번 홀이 끝나자 1타 차로 따라붙었다. 맥길로이도 2타 차.
지켜보는 팬들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지만 필상은 아직 담담했다. 그러나 14번 홀에서 동타를 허락하는 순간, 필상은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봄!”
“네. 오라버니.”
14번 홀 플레이를 하며 봄에게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그리고 15번 홀로 이동하던 필상은 그녀가 다가오자 뭔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주변이 소란해서가 아니라 실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읊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봄은 알아들었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15번 홀은 중요한 기로다.
414야드의 파 4홀로 핀이 항아리 벙커 바로 뒤에 꽂혔으며 그린의 경사가 심해 전략적으로 공략하지 못하면 타수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까앙!
앞선 경쟁자들이 안전하게 페어웨이를 지킨 상황이기에 마지막에 나선 필상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자칫 실수가 나오면 이제 역전을 허용하기 때문에 반드시 페어웨이를 지켜야 하는 샷이었다.
그런데 오늘 내내 불안했던 필상의 티샷은 아주 경쾌했다. 정확하게 맞은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가는 광경을 보며 다들 박수를 치며 ‘퍼펙트’를 연호했다.
그런데!
공격 방향이 달랐다.
이번에는 필상을 공격한 것이 아니고 타구에 영향력을 발휘했는지 잘 날아가던 타구가 돌연 뚝 떨어지고 말았다.
-어어! 저게 대체 왜 그러죠?
-문제가 있는 공인가 봅니다. 그렇지 않고 저렇게 뚝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타구가 갑자기 낙하한 것까지는 문제가 될 게 없다.
워낙 임팩트가 좋았기에 도중에 뚝 떨어졌어도 275야드는 이미 확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들의 비명은 엉뚱한 지점에서 터졌다. 땅에 떨어진 타구는 당연히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페어웨이에 떨어진 공은 느닷없이 좌측으로 튀어 오르더니 페어웨이 한가운데 위치한 벙커에 쏙 들어갔다.
아주 깊은 항아리 벙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흑돈은 터져 나오는 욕설을 도저히 삼키기 어려운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티샷 타구의 궤적도 아주 이상했고 튄 방향은 더 기이했다.
게다가 지금 빠진 벙커는 악명이 높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 과거 잘 나가던 우승 후보가 이 벙커에서 4번 만에 탈출하면서 역전을 허용한 스토리는 아주 유명하기 때문이다.
필상도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내 드라이브를 흑돈에게 건네주고 세컨샷 지점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담담하기 힘든 상황을 받아들인 이유는 이 공격으로 인해 봄이 놈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찾았어요!”
“너 혼자 움직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 마세요. 저런 놈에게 당할 정도로 허접하진 않아요.”
“그래도 시몬이 온다니까 그때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저런 꼴을 다시 볼 수는 없잖아요.”
봄의 시선은 항아리 벙커를 유심히 살펴보는 필상에게 닿아 있었다. 이 대표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2온은 물 건너갔다.
역전당하고 공동 2위로 내려설 수도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인파의 뒤로 빠지고 있는 봄의 뒤를 멀찍이 뒤쫓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