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결심
퍽!
탄도가 높아 불안했던 타구는 절묘하게 그린에 떨어졌다.
자연이 만들어 낸 바람을 인위적인 컨트롤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통설이다. 인간의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때로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도전의 실상은 참혹하다.
혹독한 대가를 치른 후에나 역시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데, 이번 티샷은 그런 통속적인 개념을 완전히 관통한 쾌거였다.
게다가 드라이브로 때린 공인데도 그린에 떨어진 타구는 더 나갈 의지가 없는 듯 크게 바운드가 된 뒤에 조금 더 핀 방향으로 다가갔을 뿐이다.
“하하하! 나이스 샷!”
“괜찮았습니까?”
“괜찮다 뿐인가! 난 정말 자네에게 할 말이 없어. 이번 샷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봤거든!”
“행운이 따랐습니다.”
“에이! 그런 소리 하지 말게. 다 계산 아래 쏜 거 다 아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런 궤적을 상상할 수 있는 거지?”
“제 자신의 샷을 믿은 거죠. 바람이 생각보다 강할 것이라고 봤는데 그게 잘 들어맞아 다행이었습니다.”
“기왕 1온 한 거 이글로 마무리하자고.”
끝까지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필상에게 엉클 덕은 더 이상 비법을 묻지 않았다. 말을 해 준다고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더 푸근해진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랫동안 아마추어 골프 강자로 지내며 프로 선수도 우습게 여기던 그가 아니던가!
일찍이 영국과 미국의 오픈 대회와 아마추어 4대 선수권을 획득했던 보비 존스처럼 돈에 얽매이지 않는 아마추어로서 자부심이 가득했던 그다.
그러나 필상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진정한 프로의 우월한 품격을 느끼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필상은 6.5야드 이글 퍼팅을 구겨 넣으며 12개 홀에서 8타를 줄이는 무지막지한 경기력을 과시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또 새로운 기록이 탄생한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하루 18홀에 -10은 디 오픈 사상 최초입니다. 1라운드에서 -9를 치며 타이기록을 세우더니 이틀 만에 그걸 본인이 다시 깬 겁니다!
-제가 볼 때는 더 줄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우승 경쟁이 너무 싱거울 것 같아 살짝 조절을 한 것 같지 않나요?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필드의 지배자라도 디 오픈에서 6타 차가 뒤집어진 경우는 허다합니다.
-허! 무려 -17언더인데요?
역전을 언급한 허 위원은 그 말을 한 뒤 아차 싶었던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고, 그 장면이 화면에 고스란히 나왔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빙긋이 웃을 뿐, 그를 탓하지 않았다. 허 위원처럼 팬들도 필상의 우승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난리가 났어요!”
“무슨 소리야?”
“오라버니 오늘 성적 때문에 전 세계 언론들이 난리가 났다고요.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던데요?”
“아! 그 정도 가지고 뭘!”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봄의 첫 마디에 적잖이 놀랐다. 어제 처리한 일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줄 알았다.
역시 죄를 짓고는 편안할 수가 없는 듯.
하지만 그 얘기가 아니었고 필상의 무서운 경기력에 대한 칭송이 쏟아진다는 말이었다. 같이 식사를 하러 갔는데, 한결 편안해진 필상은 평소에 하지 않던 농담도 곁들였다.
“그런데 봄, 너 영어 못하잖아?”
“그래요. 영어 못해요. 근데 그게 왜요?”
“영어도 못하는데 어떻게 전 세계 언론이 난리가 난 걸 아느냐 이거지!”
“흥!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요! 스마트폰이면 다 되고 일본 언론의 반응도 봤다고요. 내참 치사해서 영어를 배우든지 해야지.”
“그래. 배워서 남 주는 거 아니니까 열심히 배우라고!”
“그럴 거예요. LPGA 진출할 거니까!”
“너. LPGA 진출하려면 영어 시험 봐야 하는 거 몰라?”
“네? 시험을 봐야 해요?”
농담이다.
한때 한국 낭자들이 상위권을 휩쓸자 그런 의견이 나온 적은 있다. 물론 뭇매를 맞고 찌그러졌지만.
하지만 영어 구사에 두려움을 가진 일본에 살았던 봄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딱히 배울 의욕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자신감이 없었는지 필상의 농담에 홀딱 넘어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보다 못한 이 대표가 아니라고 말한 뒤에는 필상을 노려보는데, 봄의 의념이 얼마나 강력한지 필상은 절실히 깨달았다.
얼른 방비를 했기 망정이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강한 충격을 받았다.
“오늘은 그냥 좀 푹 쉬죠?”
“뭔 소리야! 연습장으로 가자고. 너도 오랜만에 같이 연습해.”
“저도요?”
“그럼 뭐 할 거 있어?”
“음……. 그렇기는 하죠. 좋아. 가요.”
오늘 대기록을 달성했어도 필상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후반 들어 급격히 샷의 일관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당황스러웠고 역시 골프라는 운동이 쉽지 않음을 절감했다. 최근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래서 샷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으! 뻐근해!”
“며칠 동안 클럽을 아예 손에서 놨으니 그러지.”
“그러니까요! 그런데 저 이제 골프가 정말 좋아졌어요.”
“골프가 좋아졌다고?”
“네. 샷을 할 때는 잡념이 없어야 하고 온전히 제 자신을 관조해야 하기 때문에 잡다한 생각을 잊을 수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골프가 좋아졌다는 봄의 말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필상도 골프를 정말 좋아한다.
실패한 인생을 성공으로 이끈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고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과 영예가 모두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골프가 좋아 즐기고 있는지, 그에 대해서는 함부로 자신하기 어려웠다. 골프를 혹시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이스 샷!”
“음……. 잘 맞았지?”
“네. 샷이 막힘이 없어 보였어요.”
“하하하! 그래?”
마음을 비우고 샷을 즐기려는 생각을 했었다.
본인은 그저 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연습을 하다 말고 필상의 스윙을 바라보던 봄은 박수까지 치면서 칭찬했다.
그런데 그녀의 표현은 적합했다.
마음을 비우자 스윙이 보다 편안해지며 인위적인 느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본인이 원한 지점에 정확히 떨어지는 타구를 보며 묘기라도 부릴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한 만족감이 밀려왔다.
“공 프로. 우리 그만 숙소로 돌아가 봐야 할 거 같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이 대표가 돌아와 그만 철수하자는 의견을 냈다.
아직 연습장이 닫히려면 1시간 반가량이 남았고 늘 폐장 시간까지 꽉 채운다는 것을 이 대표가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자는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필상은 자리에 앉더니 신발부터 갈아 신었다. 동의한다는 의미다.
필상은 이 대표에게서 다소 불안한 느낌을 받았고 그와 관련된 주제가 연습장에서 나눌 내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차에 오른 그녀는 다른 얘기를 꺼냈다.
“지금 입원한 서 팀장과 미사키도 숙소로 오고 있어.”
“퇴원은 모레쯤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무래도 병원이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서.”
“병원이 안전하지 않다니요?”
“아비게일이 만난 인물이 병원 고위 관계자와 접촉했다는 보고가 들어왔거든.”
“병원에 프락치라도 있단 말입니까?”
“그건 확인되지 않았지만 의료진들이 수작을 부리면 아무리 방비를 해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럼 치료는요?”
“딱히 남은 치료가 있지는 않고 그나마 시몬이 믿을 만한 전담 의사를 구해 온다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렇다면 숙소가 낫죠.”
자신과 봄이 있는 공간이라면 무서울 것이 없다.
숙소에 미사일이라도 발사한다면 모를까?
그나마 일을 주도한 아비게일이 정신을 잃어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는 말을 듣고는 안심했으나, 그전에 작당한 내용은 진행되는 것 같아 그건 막아야만 했다.
숙소에 도착했더니 먼저 퇴원한 두 환자는 영문도 모른 채 마냥 좋아했다. 아무래도 병원보다는 숙소가 좋았던 것이다.
필상에 대한 무한 신뢰가 담긴 미소에 필상도 고맙고 또 미안했다. 다 자신과 함께 있어 당한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은 곱게 나오지 않았다.
“난 왜 환자복이 더 예뻐 보이지?”
“아! 그럼 환자복 한 벌 사 올 걸 그랬나요?”
“서 팀장. 입은 하나도 안 다쳤지?”
“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호호호!”
실제 오늘밤 병원에서 사건이 벌어졌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미리 알고 퇴원했으니.
그러나 적들의 공격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오늘밤 서 팀장이나 미사키에게 공격이 있어서 심하게 다쳤다면 필상은 내일 경기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꿈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측근의 안전보다 소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똥이 엉뚱한 데로 튄 것을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맥이라는 분한테 연락이 왔어. 엉클 덕의 친구라던데?”
“알죠. 그런데?”
엉클 덕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적은 어젯밤 노리던 타깃을 잃자 다른 방도를 모색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된 사람은 안타깝게도 엉클 덕이었다.
같이 온 측근을 제외하고 필상의 경기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사람이 바로 캐디인 그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이 지역의 유지이며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영향력까지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급한 놈들은 그를 건드리고 말았다.
“다쳐서 병원에 실려갔나 봐.”
“가 보죠.”
“지금 병원에 간다고?”
“어차피 시간은 넉넉합니다. 직접 보지 않으면 그게 더 불안할 거 같아요.”
“알았어. 차 대기시킬 테니까 천천히 나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도 아침에 집에서 나오다가 차에 치였다는 말에 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집요하게 자신을 향하고 있는 이 불의한 자들을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엉클!”
“여긴 뭐 하러 왔어? 안 그래도 미안한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차에 부딪치셨다면서요?”
“다리가 부러졌다는군! 캐디가 없어서 어떡해?”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는 KPGA 프로가 와 있어서 그 동생이 도와주면 됩니다. 그보다 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응. 내가 몸 하나는 타고났잖은가! 얼른 피한다고 피했는데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봐. 허허허!”
엉클 덕의 웃음소리가 허허롭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불미스러운 일이 연속되고 있는 필상에게 자신이 또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은 이게 다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나마 건강에 치명적인 부상은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그가 병원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 도저히 참기 어려웠다.
‘이 새끼들! 반드시 수백 배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필상은 보란 듯이 우승할 것이고 목표를 이룬 뒤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죄악의 뿌리를 뽑겠노라 다짐했다.
또한 양심의 가책 따위는 쓰레기통에 처박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앞으로도 놈들은 자신에 대한 도발을 멈출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심이나 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라면 이번이 처음도 아닐 것이며 추후 다른 이들도 같은 방법으로 상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얼마나 큰 세력일지 상상도 가지 않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이놈들의 패악을 더는 모른 척하지 않기로 했다.
병문안을 마치고 연습장에 도착했지만 필상은 좀처럼 클럽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온갖 잡념이 뇌리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이러면 지는 거잖아요.”
“알아. 하지만…….”
그러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했지만 엉클 덕의 모습을 보고 나오자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사토시 회장과 다시 통화까지 했다. 만약의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인력을 당장 배로 충원하고 철두철미하게 보호하겠다고 말했음에도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놈들의 추악함이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필상은 마침내 경기를 시작하기 위해 1번 홀로 이동해야만 했다.
-어? 캐디가 바뀌었네요?
-네. 오늘은 KPGA 김성호 프로가 캐디백을 맨다고 합니다.
-아! 작년에 데뷔한 선수죠? 공 프로의 데뷔 시절부터 캐디로 활약했던 그 선수로군요.
-그렇습니다. 전담 캐디가 다친 이후, 바로 현지에 도착했다는데 아마도 마지막 라운드는 마음 편한 파트너와 호흡을 맞추려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 엉클 덕이라고 불리는 그분도 대단한 커리어를 가진 분이시던데, 좀 의외로군요.
-이미 코스는 어느 정도 파악이 되었고 남은 것은 차분하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니 크게 염려할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허 위원은 그럴싸하게 둘러댔다.
하지만 그건 일단 시청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변명이었고 그는 오히려 임 캐스터보다 엉클 덕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
2라운드는 엉뚱한 사건 때문에 망가졌지만 1, 3라운드에서 필상이 경이로운 성적을 낸 것이 노련한 캐디의 리드가 있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더욱 의아했다.
합이 잘 맞는 캐디를 교체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클럽 분실의 책임을 묻고자 했다면 오늘이 아닌 어제부터 교체했어야 한다. 그런데 최저타 기록을 갈아치운 다음 날 갑자기 캐디를 교체한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