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난세에 태어났으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어차피 정상으로 돌아와도 평생 남을 괴롭힐 놈이에요. 차라리 자신이 저지른 짓도 모두 까맣게 잊고 착하게 살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엄연한 법이 있는데, 개인이 개인을 징치할 수는 없잖아.”
“그럼 자수라도 하시려고요?”
“으음…….”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이 사건은 놈들이 먼저 걸어온 싸움이다.
어차피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돌발 상황이 발생하자 ‘바른생활 사나이’다운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이자를 치료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자신감도 없었고.
“일단 골프백을 찾았고 이 자도 대가를 치렀으니 된 거 아닌가요?”
“잠깐만!”
필상은 일단 다른 놈부터 확실하게 다시 잠을 재웠다.
그리고 자신이 흠집을 낸 자에게 정순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냥 가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조치를 취하는 필상을 보며 봄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들이 저지른 짓은 추악하다.
교통사고로 위장해 필상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히려고 했으며 실제 측근들이 다쳤다. 또한 골프백을 가져간 것도 필상이 오랫동안 이뤄 온 꿈을 부수는 비열한 행위다.
때문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만드는 것이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구태여 응급조치라니!
“이런 놈에게 선의를 베풀 필요가 있을까요?”
“적어도 이자는 수족에 불과하잖아. 이런 일을 주도한 자까지 용서할 마음은 없으니까 그만해.”
“그럼 아비게일이라는 자는 족쳐도 되겠네요.”
“그래야지. 그래야 일단 대회가 끝날 때까지 다들 무사할 테니까!”
10분가량 자신의 소중한 기운을 나눠준 필상은 양 어깨에 골프백을 하나씩 둘러매고 그 허접한 창고를 벗어났다.
그리고 대기하던 이 대표가 운전하는 차에 오르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게일. 그놈은 지금 어디 있지?”
“연락해 볼게요.”
봄은 이 대표에게 도움을 청해 아비게일에게 사람을 붙여 뒀다. 그래서 금방 그자의 위치를 잡아냈다.
그걸 구급 맵에 저장한 필상은 근처로 가자고 말했다.
“드디어 혼쭐을 내는 건가요?”
“더 이상 개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해야지.”
아비게일은 지금 자신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던디라는 지역은 세인트앤드루스에서 멀지 않은 제법 큰 도시로 북해로 흘러 나가는 테이 강의 북쪽 변에 접한 지역이다.
“됐어. 내가 연락할 때까지 숙소로 돌아가 있어.”
“전 같이 갈래요.”
“네가 도움이 된다는 건 알지만 함께 움직이면 그만큼 위험부담도 커져. 그리고 네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장면도 있을 거야.”
막무가내로 따라가겠다는 봄을 겨우 설득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고 확실하게 처리하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숙소가 아닌 던디 시내에 대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교통편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럼 가급적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대기해.”
“문자 주세요.”
“그래.”
아비게일의 별장은 북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에 타 주거지나 상업 시설이 없는 걸 보면 이 일대가 모두 그의 집안 소유인 것 같았다.
별장에 은밀하게 다가가기 위해 필상은 산 건너편에서 내려 우거진 삼림을 헤치며 길도 없는 곳을 한참 진군했다.
제법 험한 경로였으나 검은 점퍼를 입은 필상은 모자를 꾹 눌러쓰고 후드로 다시 그 위를 덮었다. 얼핏 봐서는 동양인이라고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때마침 해가 서편으로 넘어가며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던 터라 필상의 주거침입은 감쪽같았다.
‘이런!’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 다가갔으나 불청객을 알아챈 개가 사납게 짖었던 것이다. 하지만 불을 밝힌 실내에서 내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2마리의 개를 멀리서 확인한 필상은 때 아닌 주문을 외워야 했다.
‘이런 개새끼들! 자! 얼른 자라고!’
힘으로 제압하기 힘들어 보이는 커다란 체형의 개, 골든 리트리버였다. 온순한 품종으로 알고 있었는데, 주인을 닮았는지 몹시 사납게 짖었다.
하지만 1분가량 집중하자 한 놈 한 놈 픽 쓰러졌다.
“주인 잘못 만난 탓이다!”
평생 어디 가서 개를 재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필상은 번개처럼 담벼락을 넘어 곤히 잠든 개 두 마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내실 건물로 은밀히 다가갔다.
안에 있는 자들은 똑똑하기로 유명한 골든 리트리버를 철석같이 믿는 게 분명했다. 나쁜 짓을 하는 작자들은 의심이 많아 경비를 세워 뒀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상은 일단 기다렸다.
살펴본 바에 의하면 지금 1층의 서재에서 3명이 뭔가를 열심히 의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각이 남다르기에 집중했으나 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그래. 한 놈만 처리하면 되니까!”
두 놈이 일어서는 것을 인지한 필상은 얼른 높을 띄워 2층 테라스에 몸을 숨겼다. 게일 한 놈만 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두 놈이 나올 무렵 자가용이 한 대 들어왔다.
두 명은 나갔지만 대신 건장한 사내 셋이 들어와 게일에게 인사를 하고는 1층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마도 경비를 서기 위해서인 것 같았는데, 경호의 기본도 모르는 작자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적어도 집안을 한 번 둘러보고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아야 하는데, 세 놈이 모두 핸드폰을 꺼내 놓고 시시덕거렸다.
그리고 아비게일은 2층으로 올라왔다.
“제 무덤을 찾아오는구나!”
2층으로 올라온 놈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벗더니 욕실로 들어섰다. 오늘 벌인 일이 허사로 돌아갔음에도 휘파람까지 부는 것을 보면 이어진 작전이 꽤나 만족스러운 듯.
하지만 놈이 샤워기를 틀자 필상은 마침내 안으로 침투했다. 그리고는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바로 욕실로 스며들었다.
‘컥!’
그게 다였다.
재빨리 놈의 목을 뒤에서 옥죈 필상은 제압하는 순간, 곧바로 오른손으로 놈의 눈을 덮었다. 그리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축 늘어진 그를 욕실 바닥에 눕혔다.
* * *
“어떻게 됐어요?”
“당분간 어디 돌아다닐 일은 없을 거야.”
“흐흐흐…….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요. 대소변은 가리려나?”
“누군가 도와줘야겠지.”
사실 예상한 것보다 너무 수월했다.
일단 기척을 감추고 침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자신보다 덩치가 컸지만 힘으로 제압하는 것도 간단했다.
또한 놈의 기억을 지워야겠다는 의념을 주입시키자 크게 힘도 들이지 않고 침까지 흘리며 쓰러졌다.
나중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그날 이후 관에 들어갈 때까지 그는 세 살 아이의 삶을 살았다. 가족도 거의 알아보지 못했고 말이나 행동이 어눌해 가족들은 그를 밖에 내놓지 않았다.
“그럼 일단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모르지. 오늘 누군가와 길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노래까지 흥얼거리던 걸!”
“그럼 뭔가 또 획책했다는 말이잖아요?”
그 대목에서 필상의 시선은 이 대표에게로 향했다.
역시 사람을 동원하고 위험을 방비하는 일은 그녀와 시몬이 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한 가지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대표님. 병원 경계를 강화하고 이미 주시하고 있는 끄나풀들의 동태를 더욱 면밀히 살피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래야겠네. 그러니까 공 프로는 이제 그만 올라가서 푹 쉬고 내일 경기 대비해.”
“네. 알겠습니다.”
씻고 잠자리에 누웠으나 오늘 자신에게 벌어진 일련의 일들을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클럽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달았다.
나이키 영국지사에서 내일 자신의 스펙에 맞는 클럽을 가져온다고 했지만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자신의 클럽을 찾았으니 이제 두려울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었다. 필히 확고한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무시무시한 능력이다. 사람 한 명을 골로 보내는 것이 어찌 이리도 손쉬울 수가 있단 말인가!
“난세에 태어났으면 나라를 세웠겠어!”
그건 긍정적인 해석이었다.
현재를 살고 있는 자신에게는 너무 과도하게 위험한 능력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로 인해 삶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제하고 봉인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치 못할 상황이 빚어지는 것은 너무 가파른 성공에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을 일구다 보니 그것을 시샘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세력의 견제를 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꿈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어떤 경우든 중심을 잃지 않는 중용의 도가 필요했다.
* * *
-와우! 굿 샷!
-역시 장비가 중요하군요. 어제 불안 불안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하하하! 당연하죠. 오늘 아침, 우리 공 프로의 우승을 막으려던 일당들이 일제히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 같던데, 전모가 다 밝혀지면 굉장한 뉴스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짓은 개인이 할 수 없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증거가 나왔고 본인도 인정하고 있으며 경찰 당국도 샅샅이 수사하겠다고 했으니 기다리면 될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 필상의 클럽을 훔쳐 간 일당을 검거했다는 소식은 전 세계에 빠르게 타전되었다. 사실 형량이 대단한 범죄는 아니다.
하지만 그 배후로 의심받는 대상이 스포츠 도박과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몇몇 전문가들의 의견이 힘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충격파가 대단했다.
사실 승부 조작과 같은 스포츠계의 비리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나마 골프계는 그와 별로 연관된 적이 없는데, 이번 사건은 확실한 조명을 받고 있었다.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의 목전에서 이뤄진 믿기 힘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골프백을 훔쳐 가다니!
너무 유치하고 어찌 보면 무모해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뀔 가능성도 높다.
-오늘은 선수들이 모두 자신의 클럽을 식당 안에까지 가지고 들어가 식사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고 합니다.
-누가 가져간다고요? 적어도 우리 공 프로 정도는 되어야지, 우승 가능성이 희박한 선수의 백은 그냥 둬도 될 텐데요.
-그래서 앞으로 대회 주최 측이 직접 선수들의 골프백을 안전하게 관리해 주는 프로그램을 운용할 것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또 기가 막힌 샷이 나왔네요! 저걸 넣으면 벌써 -4가 되는 건가요?
-네. 결선부터는 코스 세팅을 보다 난해하게 한다고 했던 주최 측의 발언이 무색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하하하!
필상은 7번 홀까지 4타를 줄였다.
인정사정 보지 않은 결과였다. 함께 플레이를 하고 있는 맞수, 셰인 로리는 꿈쩍하지 못하는 사이 역전을 당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기세 좋게 버디로 맞받아쳤지만 어제 기세가 꺾인 줄 알았던 필상이 자로 잰 듯 정확한 샷을 연거푸 터트리자 결국 위축된 플레이를 하고 말았다.
이날 필상의 베스트 샷은 12번 홀에서 나왔다.
이미 전 홀까지 6타나 줄인 필상은 4타차 단독 선두에 올라탄 마당이라 굳이 무리수를 둘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336야드 파 4홀은 유혹이 아니라 약속의 땅이었다.
“앞뒤 폭이 너무 좁잖아?”
“그래서 띄우려고요.”
“바람도 만만치 않은데?”
“그래서 더 의욕이 솟구칩니다. 실수가 나와도 그린 주변을 벗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좋아! 한 번 쏴 보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엉클 덕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4타나 앞서고 있어서 확실한 홀만 공략해도 우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핀이 꽂힌 그린 좌측은 여유 공간이 별로 없어 조금만 당겨 쳐도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해저드 처리가 되면 그냥 잘라 가느니만 못한 것이다.
‘악성 훅 바람이 분다 이거지!’
웬만한 선수는 이 홀에서 1온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앞선 선수들 중에 1온을 시도한 선수는 많지 않았다.
겨우 하위권 선수들이 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모험을 감행했을 뿐, 우승 가시권에 있는 선수들은 모두 잘라 갔다.
우드나 롱 아이언을 잡아도 얼마든지 버디를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좌측으로 심하게 요동치며 불고 있는 바람은 선수들의 심장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기도라도 하듯 하늘을 잠시 응시하던 필상은 정반대 방향으로 에이밍을 했다.
-어? 드로우 바람이 부는 것 아닌가요?
-맞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좌측을 본다는 것은 강력한 페이드 샷을 구사하겠다는 의미인데, 아! 저게 될까요?
차마 부정적인 의견을 뱉지는 못했다.
하지만 선수 출신인 허 위원이 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굳이 그런 무리수를 두지 않아도 오늘 필상의 샷 컨디션이라면 얼마든지 버디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당당히 좌측을 보고 티샷을 감행했다.
그것도 평소보다 훨씬 높은 탄도였기에 혹자는 치명적인 미스 샷이 나온 게 아닌지 비명부터 질렀다.
쉬이이이익!
공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유난히 살벌했다.
정확한 임팩트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소리였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덕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필상도 자신이 원하는 샷이 이뤄졌기에 피니시를 마치고도 그 자세를 한참 유지한 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타구는 이미 벼랑 위를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바람 없는 날, 필상이 자주 보여 주는 스트레이트 구질인 것처럼 날았다.
하지만 정확히 보면 그 사나운 바람을 페이드 구질이 이겨 내면서 오로지 자기 갈 길만 찾아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