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22화 (322/354)

322. 맛이 갔어요

필상은 마지막 8개 홀에서 4타나 잃고 말았다.

심리 상태가 플레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가늠할 수 있는 경기였다. 그나마 전반에 2타를 줄여 2라운드 성적은 2오버, 종합 -7이 된 필상은 공동 2위로 내려서고 말았다.

놀랍게도 -8을 기록해 단독 선두로 나선 이는 셰인 로리였다. 하필이면 아비게일이 우승 베팅을 했다는 그 선수다.

같은 코스는 아니지만 재작년 디 오픈에서 2위와 6타의 압도적인 기량으로 생애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머쥔 선수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은 자네가 했지! 내 당장 달려가 골프백을 훔쳐간 놈을 잡아 족치고 말 것이네.”

“이미 증거를 수집했을 겁니다. 끝난 경기에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내일부터 잘 치면 되죠.”

“그건 당연한 거고 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거든. 클럽하우스를 발칵 뒤집더라도 증거를 찾아내고 말 걸세.”

엉클 덕은 샤워를 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캐디인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는지 이 사건의 전모를 반드시 밝히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하기야 클럽 멤버인 그가 나선다면 경기위원회보다 더 명확한 증거를 찾을 수도 있다.

그래서 연습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오라버니!”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핀 것을 보니, 뭔가 확증을 찾은 것 같아 불편했던 마음이 풀렸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커피숍으로 향하려는데, 정장을 입은 직원이 다가왔다. 필상에게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 경기위원회에서 출석을 요구한 것이다.

거부할 수 없어 일단 봄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필상은 경기위원회 사물실로 향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굉장히 어수선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엉클 덕이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피운 뒤였다. 왜냐면 클럽하우스가 보유하고 있어야 할 CCTV 영상이 통째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클럽이 도난당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저희가 회수한 골프백에 들어 있던 클럽이 모두 고의로 망가뜨린 물건이란 게 밝혀졌고 어제 경기에서 사용했던 골프백과 그 모조품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경기위원회는 CCTV 영상을 확보하지 못했으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기울였던 것이다.

클럽 전문가를 불러 필상의 바꿔치기 된 골프 클럽의 상태를 확인했고 어제 경기 영상과 비교 후에 오늘 가지고 나온 골프백이 어제 것과 다르다는 것도 알아냈다.

경기에 나서는 선수가 일부러 부실한 클럽을 들고 나올 리 만무하다는 전제하에 필상의 주장이 옳음이 증명된 것이다.

필상이 도착하자 경기위원장이 직접 나서 사실을 언급하는 모습도 필상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저희 업무일 뿐입니다. 저희로서도 너무 황당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한 점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깊이 감사드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해명을 바란다던 직원의 말과는 달랐다.

사태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태도가 다를 수 있음을 짐작케 했다. 사무실 분위기는 우호적인 몇몇과 반감을 가진 이들로 갈려 있었다.

그 와중에도 최종 책임자가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며 현명한 일처리를 주관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고마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던 찰나, 누군가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소리를 빽 질렀다.

“던컨! 이 쓰레기 같은 놈!”

들어오자마자 던컨이라는 자를 찾던 엉클 덕은 일어서 있던 필상과 눈이 마주치자 잠시 멈칫했다.

설마 필상이 이곳에 와 있을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어차피 일처리가 잘 되었기에 필상은 문제가 커지는 것을 원지 않았다. 그래서 흥분한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는 것을 본 엉클 덕은 바람처럼 쫓아가 그자를 뒷덜미를 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바짝 마른 60대 중년인은 곰처럼 거대한 엉클 덕의 손에 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국이었다.

“덕. 이거 왜 이러십니까!”

“이런 쥐새끼 같은 놈! 클럽하우스 CCTV만 없애면 다 될 줄 알았지?”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 바보냐? 마크 가게에도 CCTV가 있어. 레스토랑 앞에 위치했기 때문에 네놈이 골프백을 바꿔치기한 장면이 고스란히 다 찍혀 있다고!”

겁먹었던 그자의 표정은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경기위원이라는 작자가 선수 골프백을 바꿔치기한 것도 모자라 그 증거까지 없앴던 것이다. 들킬 것 같지 않았으나 엉클 덕의 풍부한 경험이 그자의 부정한 짓을 밝혀낸 것이다.

그런데 잔뜩 움츠렸던 그자가 엉클 덕이 손에 힘을 가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생명의 위협이라도 느낀 걸까?

“경찰을 불러주세요!”

“이 자식이 사과부터 하지 않고!”

흥분한 덕은 그자를 냅다 던져버리고 말았다.

힘 차이가 확연했기에 그냥 내동댕이쳐지면 허리가 부러질지도 모를 심각한 부상이 예상되는 아주 위험한 순간이었다.

법대로 처리하는 것이 옳지만 법보다 앞선 힘의 과시가 이뤄지고 만 것이다. 다들 화들짝 놀라 눈이 커지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빠르게 움직인 필상이 그를 잡아챈 것이다. 완벽하게 받아내지는 못했으나 완충이 된 그는 그냥 걷다 넘어진 사람처럼 쓰러졌다.

그런데도 과도하게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피웠다.

“아악! 사람 잡네! 저놈이 사람 잡아!”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이!”

엉클 덕은 화를 참지 못하겠는지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필상이 팔을 들어 만류했고 코뿔소처럼 진군하려던 그는 단번에 제지가 되고 말았다. 필상도 작은 키는 아니지만 덕에 비하면 반쪽처럼 느껴지는데, 신기하게 멈춰 섰다.

“엉클. 진정하세요.”

“저런 놈은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그게 저놈이 바라는 일일 겁니다!”

“내가 깽값을 물어도 좋다니까!”

“그건 저자를 너무 편하게 보내는 일이 될 겁니다. 대가는 반드시 톡톡하게 치르게 할 거니까 일단 경찰에 넘기시죠.”

“으음……. 증거는 이미 확보했어.”

그는 던컨이라는 자가 벌인 범죄의 현장이 저장된 USB를 직원에게 건네 화면에 펼치라고 말했다.

증거를 모두가 봐야만 확실한 범인으로 신고를 할 수 있고 경기위원회에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곧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이 공개되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던컨이 필상의 골프백을 모조품으로 바꿔치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망을 보는 자도 있었다.

엉클 덕이 모르는 자였기에 인지하지 못했을 뿐, 그 역시 경기위원이었기에 다들 소스라치게 놀랐다.

불곰처럼 씩씩대는 엉클 덕이 입구를 막아서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필상은 그들의 신병을 경찰에게 인도할 것이라는 약속을 듣고 먼저 사무실을 떠났다.

‘씁쓸하군!’

그자와 아비게일의 관계가 밝혀질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오늘 오후 내내 언론을 뜨겁게 달군 사건은 일단 범행 일체가 드러나면서 필상에 대한 비판은 가라앉을 것 같았다.

“범인을 잡았어요?”

“네. 어이없게도 경기위원이라는 자가 그 짓을 했더군요.”

봄이 대기할 줄 알았는데 기다린 사람은 이 대표였다.

그녀는 밖에 있었지만 안에서 벌어진 일을 대충 감을 잡은 듯, 이후 사건 처리는 자신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근데 봄은요?”

“아! 나랑 같이 이곳으로 오라던데?”

“어디요?”

이 대표는 봄이 공유해 준 구글 맵을 보여줬다.

이곳 지리를 알 턱이 없는 필상은 대회가 열리는 코스에서 멀지 않은 곳임을 확인하고는 일단 같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봄이 오라는 장소는 가드브릿지 해변의 한 창고였다. 최근에는 사용한 흔적이 없어 마치 거대한 고철상을 방불케 하는 상당히 을씨년스러운 외딴 지역이었다.

여자애가 겁도 없이 적을 추격해 이곳까지 왔다는 생각을 하자 걱정보다 화가 먼저 났다.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누차 강조했는데, 그걸 어겼기 때문이다.

“멈추세요.”

“왜? 아직 2km 남았는데?”

“걸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대표님은 여기서 숨어 계세요.”

“나도 가고 싶어.”

“위험합니다. 저는 언제든 튈 수 있지만 대표님이 있으면 저도 발이 묶일 수 있어서 그럽니다.”

“아!”

그녀도 위험하다는 생각에는 동의했다.

혹시 숨어 있다가도 위험이 감지되면 먼저 도망치라는 말에 대답은 했으나 필상이 오기 전까지 달아날 것 같지는 않아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투어 대회에 참가하러 와서 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필상은 어이가 없었다.

대회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해괴한 사건에 자꾸 휘말리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냥 물러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적은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고 있는데, 번번이 당할 수만은 없다.

이미 오늘 호되게 당했고 그래도 자신들이 바라는 상황이 도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을 흔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대비는 하고 있지만 빈틈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적들의 발을 묶을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대회가 끝날 때까지.

‘저긴데?’

지도를 외우고 왔다.

그렇지 않더라도 봄의 기운이 감지되었기에 필상은 허름한 창고를 빙글 돌아 침투할 지점을 찾았다.

그런데 안에서 봄의 음성이 들렸다.

“그냥 들어와요. 오라버니!”

“윽!”

괜한 경계심을 품었던 필상은 봄의 힘찬 목소리에 김이 빠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런데 창고 안에는 아주 기괴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덩치가 좋은 사내 두 놈이 의자에 앉은 채 그냥 혼절해 있었고 봄은 뭔가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오라버니 클럽이에요.”

“맞네. 근데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아비게일이 저놈더러 증거가 될 이 클럽들을 없애라고 했는데, 욕심이 났나 봐요.”

“욕심?”

“땅에 묻으려다 말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라고요. 미스터 퍼펙트가 사용하는 클럽과 똑같은 스펙을 가진 아주 비싼 클럽이 세트로 있는데 사러 올 생각이 있냐고요.”

장물을 팔려고 한 것이다.

팔려는 놈이나 사려는 놈이나 상당히 위험한 짓인데, 돈에 눈이 먼 것이 분명했다.

“이자들은 지금 어떤 상태지?”

“기절했어요.”

“정말 기절한 거 맞아?”

“그렇다니까요! 물론 제가 독하게 마음을 먹으면 평생 정신병원에 갇히게 만들 수는 있죠.”

“봄아!”

“알아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거. 그래서 두 놈을 한꺼번에 기절시키느라 저 힘들었다고요.”

“어떻게 기절시켰는데?”

“그건 비밀!”

비밀이라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봄이 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자신도 가능할 것이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배우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네가 없으면 나라도 풀어 주려고 그러지.”

“치! 어렵지 않아요. 집중하면 되더라고요. 기절하라고!”

“정말이야?”

“오라버니도 염력 같은 거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사용해 본 적은 없거든.”

“될 거에요. 아마 저보다 훨씬 잘할 걸요?”

“으음…….”

하기야 그보다 더 엄청난 능력도 발휘한 적이 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화물차를 그냥 뒀다면 정면으로 들이받아 앞에 탄 두 여자는 생을 달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상이 강한 의념을 품자 화물차의 방향이 꺾였다. 그 바람에 차 꽁무니를 박았고 그 충격에 빙글빙글 돌다가 전복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이능을 사용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봄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 덕분에 필상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시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냥 두고 가도 돼?”

“네. 안 그래도 깨어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기절한 줄만 알았던 한 놈이 눈을 뜨고 필상을 발견하자 깜짝 놀라 부지불식간에 신음소리를 낸 것이다.

“으음…….”

“어?”

봄과 필상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놈은 벌떡 일어나며 필상의 하체를 향해 발길질을 가했다.

기절했던 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민첩한 동작을 보면 적어도 격투 운동을 했거나 훈련으로 다져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컥!”

놈의 발이 닿기 전에 필상의 손이 먼저 놈의 머리에 떨어졌던 것이다. 주먹으로 세게 내리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놈은 머리가 잡히는 순간 눈동자가 돌아갔고 이어서 허연 거품을 입에 물고 또 다시 정신을 놓고 말았다.

드러난 반응을 보건데 이건 그냥 기절시킨 정도가 아니었다. 필상의 손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그의 뇌를 진탕시킨 게 분명했다.

필상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놈이 깨어나 공격하는 찰나, 놈을 다시 기절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품기는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기운을 조절하지 못한 것이다.

“크으으……. 이놈 맛이 갔어요.”

봄은 뭔가를 감지하려는 듯, 놈의 머리에 손을 댔다.

필상이 가진 치유능력과 비슷한 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다는 말이 충격적이었다.

맛이 갔다는 말은 곧 놈의 정신세계에 흠집을 냈다는 말처럼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상도 그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상태를 확인했다.

확연하지는 않지만 전해진 느낌은 정말 그가 멀쩡하게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손을 너무 과하게 쓴 것이 후회되었지만 그런 기분을 감지한 봄은 태연한 음성을 토해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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