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21화 (321/354)

321. 신의 경지

굳이 선악의 문제로 비화하는 것은 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클럽 개수에 대한 규정은 명확하다. 14개 미만인 경우에는 부족한 개수를 추가할 수 있으며 14개가 넘는 클럽을 이미 플레이에 사용한 경우에는 실격이다.

하지만 필상이 아직 휘두른 클럽은 하나뿐이다.

애초에 고의성이 없었고 초과된 클럽이 있음을 인지한 시점에 즉시 동반자나 마커에게 사실을 통보하고 배제시키는 절차를 밟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골프백이 바뀐 것을 알았을 때, 곧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될 소지는 분명히 있었다.

[프로가 클럽 확인도 안 하고 전투에 나서다니!]

[실격! 선수 자격이 의심된다. ㅋㅋㅋ]

[규정에 따라 지금이라도 클럽을 교체하면 된다!]

[대체 어떤 놈이냐? 아무리 그의 클럽이 탐이 나도 그렇지, 이 중요한 날, 골프백을 훔쳐 가다니!]

[나한테 하나 넘겨라! 달라는 대로 줄게. ㅎㅎㅎ]

너무도 황당한 상황에 팬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졌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온갖 규정을 들이대며 실격이라고 외치는 자들도 있었고 전혀 문제될 게 없다며 이 위기를 극복하라고 응원하는 이들은 더 많았다.

“공 프로. 이거라도 써.”

이 대표가 헐레벌떡 도착했다. 온통 땀이 범벅인 이유는 무거운 골프백을 매고 쉴 새 없이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거의 울상이 된 이유는 필상이 스페어로 사용하는 골프백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거는 대표님 꺼 아닙니까?”

“없어. 차도 털린 것 같아.”

“하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이번 일에도 적군은 완벽에 가까운 덫을 쳤던 것이다.

“경기위원회의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지?”

“네. 지체될 이유가 없는데…….”

경기위원회의 답이 나오지 않아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미 관련 규정을 되새겨 본 필상의 결론은 명확했다.

벌타가 주어질 이유조차 없다. 그런데도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것 같아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경기위원 몇몇이 나서서 실격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지만 위원장은 그들이 이 중대한 사안에 너무 쉽게 결정을 내리는 것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며 명확하지 않은 사유로 실격을 결정할 경우, 그 파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시가 아쉽다는 것을 알지만 근거를 따져야 했다.

“실격을 주장하는 사유가 뭡니까?”

“타인의 장비를 쓰지 않았습니까!”

“선수가 도난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동반자의 것을 쓴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장비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클럽의 선택은 선수의 몫이지요. 그건 실격 사유가 될 수 없습니다.”

“클럽을 15개나 사용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실 관계는 명확히 합시다. 마스터는 현재 샷을 한 번밖에 하지 않았고 지금이라도 사용하지 않은 클럽 중에 하나를 배제하면 됩니다. 설마 그 규정을 모르시는 건 아니죠?”

“그가 클럽을 도난당했다는 말부터 난 믿지 않습니다.”

본색이 드러나는 감정적인 표현이 튀어나왔다.

위원장은 그 순간, 깨달았다.

클럽 도난이 확실하며, 이 사안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제 3타 차 단독 선두에 나선 필상이 자작극을 펼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보면 이 대회는 필상에게 인생 최고의 무대가 아니던가!

스스로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다.

위원들과 상의해 결정을 내리지만 최종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긴 경기위원장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마디 던졌다.

“당신들이 어떻게 그런 매정하고 불합리한 말을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누가 이 대회의 주인공인지 잊으셨나 본데, 우리는 선수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사실 관계는 나중에 확인하고 문제가 있으면 사후에 처리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럼 그냥 이대로 경기를 속행시키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마침 스페어 클럽이 도착한 모양인데, 이미 사용한 클럽을 포함해 교체를 한 뒤에 경기를 계속하라고 하십시오. 또한 이 문제에 관련된 증거를 수집하도록 인력을 투입하세요.”

위원장의 결정이 전달되자 필상은 즉시 가방을 바꿨다.

“쓰지도 못하는 4번 아이언을 넣어야 하다니!”

“덕. 클럽 개수부터 확실하게 확인해 주십시오.”

“우드가 많은데 제일 짧은 걸 하나 뺄게.”

“네. 그래도 가방 색깔이 핑크나 레드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입니다. 하하하.”

웃을 상황이 아니다.

아마추어, 그것도 여성이 사용하는 클럽은 스윙 스피드가 남다른 필상의 샷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결정된 것을 다행이라 판단한 필상은 이제라도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195야드가 남았어.”

“7번 주세요.”

“7번 아이언?”

“네. 그걸로 기준부터 잡으려고요.”

아무리 필상이라도 헤비 러프에서 7번으로 195야드를 때릴 수는 없다. 엉클 덕은 그린 가까이에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필상의 판단이 옳다는 것에 공감했다.

어차피 이제 중요한 것은 주어진 클럽에 적응하는 것이다. 처음 골프채를 휘두르며 비거리의 기준점이 되었던 7번 아이언을 휘두르며 감을 잡는 게 우선이다.

그린에 올리지 못할 바에는 어차피 20야드나 50야드나 남은 거리는 큰 의미가 없다.

-경기위원들이 혹시 엉뚱한 결정을 내릴까 봐 전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정말 다행이죠?

-실격시킬 경우,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누가 봐도 선수의 잘못은 미미하죠. 첫 티샷을 할 때 사실을 통보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누구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를 받으면 그만이니까 이제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기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체한 클럽도 좀 이상하지 않나요?

-네. 공 프로의 여유분 클럽이 아닌 것 같습니다. 화면에 7번 아이언이라고 뜨는데, 7번이 저렇게 짧을 수는 없거든요.

-혹시 여성용 클럽 아닌가요?

이번에도 임 캐스터는 작두를 탔다.

물론 허 위원의 판단이 근거가 되었지만 여성 클럽이라고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이기에 더 빛이 났다.

막상 이 대표의 클럽을 사용하게 된 필상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과감한 스윙을 시도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70%의 힘으로 컨트롤 샷을 구사했다. 임팩트에 따른 공의 궤적과 비거리를 살펴본 필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골프를 잘 치는 이 대표가 사용하는 샤프트는 SR이었고 여성치고는 헤드도 묵직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헤비 러프에서 때렸음에도 비거리는 생각보다 길어 160야드 지점의 페어웨이에 잘 떨어졌다.

“저 정도 거리면 괜찮은 것 같은데?”

“네. 170야드를 보면 될 것 같아요.”

“조금 더 힘을 빼는 건 어떨까? 내가 볼 때 지금 임팩트는 너무 강한 것 같아. 샤프트가 버티기 어려울지도 모르잖아.”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엉클 덕은 다운스윙 때 급격하게 휜 샤프트가 과연 필상의 힘을 견딜 수 있을지 그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최근 용품들의 내구성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아무래도 평소 사용자의 힘보다 강하면 부서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65%의 힘만 가하기로 결정하고 경기에 임했다.

-나이스 칩 샷!

-아! 역시 퍼펙트하군요. 손에 익지 않은 클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유감없이 보여 줍니다. 스윙의 원리를 잘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어제처럼 시원시원한 샷은 기대하기 어렵겠죠?

-그 점은 저로서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골프가 힘으로 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시청자 여러분은 오늘 또 다른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하하하!

이 대회는 필상의 업적에 화룡점정을 찍을 무대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그 누구도 엿볼 수 없는 완벽함을 기대했다. 그런데 2라운드에 뜻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며 팬들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내일부터 다시 힘을 내면 되지만 골프라는 것이 한 번 분위기를 타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 개 홀을 파로 마무리한 필상은 마침내 5번 홀에서 첫 버디를 작성했다. 514야드 롱홀인데 280, 170야드를 날린 후 65야드를 남긴 서드 샷이 핀에 쩍 붙었기 때문이다.

“자네 정말 인간이 아니로군!”

“왜 이러십니까! 이 정도는 아저씨도 가능하잖습니까!”

“아니야. 난 이미 포기했을 거야. 이런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거든!”

그는 자신의 성깔을 언급했다.

조금이라도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면 그때부터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기에 진즉에 포기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황당함은 필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같은 상황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다르다는 것에 대한 칭찬이었다.

분노하고 불평을 늘어놓아도 모자랄 판에 침착함을 유지하고 기꺼이 웃으면서 닥친 위기를 하나씩 풀어 나가는 모습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저놈! 정말 대단하네요!”

“닥쳐!”

어제 그 셋이 오늘도 필상의 경기를 관전 중이었다.

싸늘한 표정이 사라지지 않는 아비게일의 옆에 서 있던 자는 필상이 급기야 버디를 기록하자 박수까지 치며 감탄했다.

그가 보기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기적을 이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일은 불같이 화를 냈다. 심혈을 기울여 이중 삼중으로 친 덫이 무용지물이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필상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비는 선수의 생명이나 다름이 없다.

고수일수록 더 민감하기 때문에 클럽이 없어진 것을 아는 순간, 이미 심적 타격이 상당해 설사 다른 클럽을 가져와도 정상적인 경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 어쩌죠?”

“뭘 어째! 더 강력한 수단을 강구해야지.”

“그럼 저는 먼저 가서 증거부터 없애겠습니다.”

“그래. 대충 하지 말고 확실히 처리해.”

“네. 보스.”

한 놈이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자신의 뒤에 후드티를 뒤집어 쓴 작은 체구의 누군가가 따라붙는다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따라가는 사람의 표정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귀여운 얼굴을 지닌 추격자는 다름 아닌 봄이었고 그녀는 필드를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필상이 어떻게든 결과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직접 그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듯 보였다.

“와아아아! 나이스 샷!”

6, 7번 홀을 안전하게 파로 넘긴 필상은 8번 홀에서 다시 한 번 버디 기회를 잡았다. 166야드의 파 3홀에서 6번 아이언을 잡고 그림 같은 컨트롤 샷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살짝 깃대를 오버했으나 강력한 백스핀이 걸리며 홀컵 옆을 스칠 때는 다들 다리에 힘이 빠졌다.

홀인원이 나오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50cm 버디를 가볍게 성공한 필상은 그렇게 전반을 -2로 마쳤다. 종합 -11, 아직도 2위와의 타수 차는 변하지 않았다.

어제 선전한 선수들이 오늘 부진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남의 클럽을 사용하는 필상의 경기력은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봐야 했다.

-클럽에 점차 적응하고 있어서 백 나인 홀에서는 더 좋은 스코어가 나올 수도 있겠네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더도 말고 딱 3타만 더 줄였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허 위원이 웃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오늘 -5를 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 -5를 친 선수는 140명의 출전 선수 중에 단 6명뿐이었다.

자신의 클럽도 아닌데, 너무 무리한 소원을 말한 것 같아 스스로 쑥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퍽!

10번 홀을 파로 막은 필상은 11번 홀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174야드의 파 3홀이었기 때문이다.

그린이 좌우로 길고 앞뒤 폭은 좁지만 높이 띄워 핀 근처에 붙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6번 아이언을 잡고 다소 강한 스윙을 했는데, 공이 맞는 소리는 나지 않고 기괴한 소음이 터졌다.

백스윙 탑에서 내려오던 클럽 헤드가 빠진 것이다.

헤드와 샤프트를 연결해 고정해 주는 넥(neck)이 부서지면서 헤드는 공 뒤에 패대기가 쳐졌고 공을 어설프게 때려 데굴데굴 굴러간 공이 대략 40야드 지점에서 멈춰 섰다.

걱정은 했지만 설마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할 줄은 몰랐기에 필상도 멍하니 서서 주어진 상황을 입력하기 바빴다.

“마스터. 6번을 너무 많이 썼나 봐.”

“네. 그냥 5번 잡고 가볍게 때릴 걸 그랬습니다.”

“잊게. 이미 끝난 거 생각해 봐야 소용이 없잖아.”

“네. 잊어야죠.”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번 사건은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왜냐면 샷을 할 때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뇌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샷의 정확도는 급격하게 떨어졌고 146야드의 세컨샷을 그린에 올리지도 못했다.

겨우 보기로 막았으나 필상의 이날 시련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우우우! 우리 공 프로가 흔들리네요.

-저도 공 프로가 이렇게 해매는 경기력은 처음 봅니다. 몸이 좋지 않아 힘들어한 적은 봤지만 지금은 심적 동요가 커서 제대로 된 스윙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정말 안타깝네요.

-골프는 클럽을 이용해 공을 그린에 보내고 홀컵에 집어넣는 경기인데, 그 도구가 미덥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골프백을 훔쳐 간 놈을 반드시 잡아 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형사적인 처벌은 물론 민사상 가능한 모든 청구도 필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만약 공 프로가 오늘 경기 내용 때문에 우승하지 못한다면 그자는 천문학적인 보상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