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바꿔치기
“그냥 둬서는 안 되겠군!”
일단 경기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첫날 필상이 단독 선두로 치고 올라갔을 뿐더러 2위와 4타 차의 현격한 차이를 보이자 마음이 급해진 것 같았다.
자신의 주변을 조여들 수작을 부린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러나 차분하게 상황을 점검했다.
일단 한국에 있는 가족은 여유가 있다. 다시 한 번 사토시 회장에게 연락해 보호를 강화해 달라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병원의 경비도 강화하면 된다.
“오라버니에게 해를 끼칠 것 같은데, 선수를 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떻게?”
“일단 아비게일이라는 놈을 쳐서 몇 달 동안 누워 있게 만들면 되죠.”
“봄아!”
남다른 배포를 지닌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돌출 행동을 했던 자를 단번에 처리하는 것도 봤다. 그자는 치료를 다 끝내도 추후 정상적인 팔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하지만 이 더러운 싸움에 그녀가 나서게 할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가 무슨 생각하시는 줄 알아요. 하지만 이것 또한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전 오빠랑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좋아. 그건 인정하는데, 그렇다고 네가 지저분한 일에 휘말리는 것은 내가 원치 않아.”
“감쪽같이 해낼 수 있어요.”
“그렇겠지. 하지만 조금 더 경계하고 지켜보자.”
“그러다가 당하면요?”
“당해?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예상치 못한다면 모를까, 알고 있다면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다만 능력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필상 본인도 자신이 어느 정도의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이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걱정이었다.
“그럼 이 대표님이랑 시몬도 부를까요?”
“그래. 만반의 대비를 해야겠지.”
사실 봄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조용히 움직였을지도 모른다. 일단 적개심을 가지고 악행을 저지른 것이 확실한 아비게일은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역시 사냥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대단한 가문의 자손이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피해를 본 주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아예 그 정도였다면 처음부터 자신을 상대로 이렇게 큰일을 도모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 대표와 시몬을 불러 사실 관계를 밝히고 그들이 구한 정보도 같이 취합했다.
“녹음이라도 했으면 좋은 증거가 되었을 텐데요.”
시몬은 가급적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봄의 말을 과연 믿을 수 있는지 의아심을 가진 것도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여자가 그런 위험한 일을 했다는 것부터 신뢰가 되지 않는 듯.
그래서 필상은 그의 자세부터 지적했다.
“시몬. 우리 넷은 서로 믿어야 합니다.”
“아! 믿죠.”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저를 믿듯이 봄도 믿으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몬이 취득한 정보에는 게일의 투자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하기야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거금이 오가는 일에 공적인 자료를 남길 리는 없다.
그러나 혐의가 짙어지자 보다 깊숙이 알아보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어딘가에 그 흔적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저들이 눈치채지 않게 뒤를 캐는 일이라서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수차례 강조했다.
회의를 마치고 필상은 일단 병원에 들려 측근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초기에 필상이 직접 대처를 한 것이 효과를 봤는지 경과는 기대 이상이라는 말도 들었다.
“성호야. 시몬이 사람을 몇 붙여 줄 거야.”
“무슨 사람이요?”
“사고를 친 놈들이 다시 위해를 가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제발 오라고 하세요.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줄 테니까!”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감정적으로 대처하면 안 돼. 법정에 서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대처해야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사키와 서 팀장의 안전이라는 거 잊지 말고.”
“네. 정신 바짝 차릴 게요.”
전문 경호원 4명이 붙었다.
2인 1조로 돌아가면서 24시간 물샐 틈 없이 경호한다는 계획까지 필상이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명상에 들었다.
대회도 중요하고 복잡한 심정도 정돈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봄이 조용히 곁에 다가와 함께 수련했고 밤이 이슥할 무렵 봄은 조용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 * *
-어제 공 프로가 기록한 -9가 150년의 역사를 가진 디 오픈의 18홀 최저타 기록과 타이라고 하더군요.
-네, 움직이기만 하면 신기록을 생성하는 ‘살아 있는 골프 역사 제조기’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오늘도 어제처럼 달린다면 우승 가능성은 한층 올라갈 겁니다.
-이미 여러 언론에 공 프로의 우승이 유력하다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죠! 벌써 우승 관련 특집 기사를 준비한다더군요.
-저희 채널에서도 공 프로의 지난 경기들을 정리해 3부작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있는데, 놓칠 수 없는 멋진 장면이 많아 5부작으로 늘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 주말이 지난 뒤에 TV만 켜면 우리 공 프로의 얼굴이 나오겠군요. 하하하!
이미 대회는 예년에 비해 갤러리 입장권을 30%가량 더 팔았다. 하지만 예매를 시작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동이 났고 현장 판매분까지 모두 판매할 수밖에 없었다.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의 구입 경쟁이 과열되어 현장 판매 시에 사고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팬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도 더는 판매할 수 없었다. 대회를 원활하게 치르려면 최소한 코스는 보호되어야 하고 안전도 유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웃돈을 줘도 구할 수가 없어 암표가 성행했고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로 이 대회의 열기는 뜨거웠다.
“자! 여러분. 좀 비키세요. 지나가겠습니다!”
클럽하우스에서 1번 홀까지 이르는 길은 인산인해였다.
필상의 사인을 받고 싶은 이들, 같이 사진이라도 찍고 싶은 이들, 응원 한 마디라도 하고 싶은 이들이 넘쳐 났기 때문이다.
따로 선수 전용 통로를 만들지 못한 주최 측은 어제보다 더 심하게 몰린 갤러리들의 운집을 보고 특별한 조치를 취했다.
진행요원들을 필상의 앞뒤로 세워 보호했는데도 걸음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이동에 어려움이 컸다.
그러자 보다 못한 엉클 덕이 앞으로 나섰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코뿔소처럼 체구가 큰 그가 기분 좋게 웃으며 나서며 겨우 길을 텄다.
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1번 홀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는 순간, 돌연 엉클 덕의 신음에 찬 음성이 들렸다.
“이런! 황당한!”
“왜 그러십니까?”
“백이 바뀌었어.”
“네?”
필상도 깜짝 놀라 골프백을 확인했는데, 얼핏 봐서는 자기 것과 다르지 않았다. 색깔과 디자인, 그리고 적당히 때가 묻은 것도 똑같았다.
하지만 안에 들어 있는 클럽은 메이커부터 달랐다.
누군가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그 타이밍이 언제인지 필상은 알지 못한다. 오전 11:40 티오프라서 연습을 끝내고 가볍게 샌드위치로 식사를 했다.
당연히 엉클 덕과 함께 먹었고 그사이 골프백은 레스토랑 앞에 세워 뒀다. 다른 선수들도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아무리 소중한 백이라도 식당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이는 없다.
“차에 스페어 클럽이 있나?”
“네. 저기 이 대표에게 가져오라고 전하세요.”
“그럼 일단 티샷은 어떡하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서두르십시오.”
너무 어이가 없었다.
클럽하우스 내에 위치한 레스토랑이기에 당연히 CC TV가 있을 텐데, 어떻게 이런 개수작을 부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놈들은 아주 용의주도한 면모를 보였다. 그들은 엉클 덕이 필상의 전용 캐디가 아닌 것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만약 섬세한 미사키였다면 자신이 늘 챙기는 골프백의 변화를 알아챘을 가능성이 높다. 외양을 보지 않더라도 그냥 어깨에 메는 순간, 알아챘을 것이다.
무게도 다를뿐더러 속에 들어 있는 클럽들이 부딪치는 소리도 분명 차이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엉클 덕은 그녀처럼 오랜 인연이 아니었고 누가 백을 바꿔치기할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 위대한 도전자! 대한민국 출신, 공 필상 선수를 소개합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아 주십시오!”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다.
수많은 시선이 닿은 필상과 캐디의 행동은 영문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 황당했다. 선수가 잡을 클럽을 건네고 곁을 지키며 에이밍을 도와야 할 캐디가 갑자기 티 박스 주변을 벗어나 어딘가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내 아나운서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시간이 되었고 필상이 클럽을 꺼내 들고 자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캐디가 왜 저러죠?
-그러게요. 선수 곁을 떠나 대체 어딜 가는 겁니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 공 프로가 들고 있는 클럽이 혹시 아이언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우드도 아닌 아이언을 잡다니!
-4번 아이언으로 240야드를 날리는 걸 본 적이 있고 첫 홀이니까 안전한 티샷을 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좀 이상하네요.
-캐디가 자리를 떠나서 그런 기분이 드는 걸 겁니다.
-그런데 왜 연습 스윙은 하지 않고 자꾸 클럽을 만지는 거죠? 혹시 자신의 클럽이 아닌 거 아닐까요?
신이 내린 걸까?
그냥 던져 본 말인데, 임 캐스터의 짐작은 정확했다.
그 누구도 확인시켜 줄 수 없는 말이지만 티샷을 하러 올라간 선수의 통상적인 루틴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연습 스윙을 해야 할 필상이 아이언을 두드려도 보고 구부려도 보다가 마침내 연습 스윙을 휘둘렀다.
다행히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휭휭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필상의 표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뭔가 문제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필상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던 것이다.
이 대표에게 말을 전한 엉클 덕도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늘 여유 만만하던 특유의 거만함은 보이지 않았다.
‘밸런스가 엉망이야!’
아무리 기성품이라도 누군가 고의적으로 망가뜨린 게 분명했다. 아마추어라면 겉은 멀쩡한데 그렇게 밸런스를 무너뜨릴 수가 없다.
이는 곧 전문가의 고약한 솜씨가 악하게 작용한 결과다.
바꿔치기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클럽까지 수작을 부린 이 해괴한 수작에 머리가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샷을 해야만 했다.
따악!
일단 임팩트는 정확히 이뤄졌다.
하지만 공은 의도한 만큼 뜨지 않았고 낮게 깔려 날아갔는데, 걸지도 않은 페이드가 구사되었다.
“볼! 뽀올!”
피니시를 평소보다 일찍 끝낸 필상은 타구의 궤적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이미 정상적인 궤도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갤러리들이 서 있는 경계선까지 가지는 않았으나 헤비 러프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너무도 어이없는 샷 결과에 팬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
“네. 클럽을 가져오는 중이겠죠?”
“응. 1번 홀은 어쩌지?”
“클럽을 하나씩 저에게 건네주세요.”
“그래.”
다행히 동반자의 샷이 끝날 때까지, 또 세컨샷 지점까지 이동하는 동안 약간의 시간이 있어 모든 클럽 상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필상은 가다 말고 서서 경기위원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경황이 없어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골프백 안에 클럽이 15개가 있었던 것이다.
평소 프로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치퍼가 웬 말인가?
“아! 미치겠네!”
“덕. 일단 진정하십시오. 이제라도 경기위원에게 사실을 알리고 적합한 조치를 받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고.”
경기위원은 가까이 있었다.
그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의 말을 들은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듯.
그는 바로 경기위원회에 연락을 취했고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40초 룰이 적용되지 않는 특별한 상황인 것이다.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자 그가 몇 가지를 더 확인했다.
“다른 클럽은 없습니까?”
“지금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 일단 클럽 개수가 많은 것은 문제가 되겠네요.”
“그 또한 경기위원회가 합리적인 결과를 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방이 바뀐 위치가 클럽하우스 레스토랑 앞이니까 어서 녹화된 영상부터 확보하라고 전하세요.”
“그래야겠군요.”
초유의 사태는 가까이 위치한 갤러리들의 입을 통해 삽시간에 모두에게 알려졌고 곧 중계진들에게도 전해졌다.
경기가 중단된 이유를 시청자들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믿기 힘든 일이라서 이런 저런 말들이 쏟아졌다. 모두가 필상을 응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허! 이게 말이 되나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골프클럽의 상태를 유지할 책임은 선수에게 있으니 참 답답하군요.
-그런데 골프백을 훔쳐 간 것은 범죄 아닌가요?
-물론 정상참작이 될 여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선수 개인을 위한 배려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그 당사자가 공 프로잖습니까! 이건 우리 공 프로의 역사적인 기록을 방해하기 위한 누군가의 소행일 것 같은데, 정의가 불의에 굴복할 수는 없는 겁니다.
-골프백이 바뀌었으면 경기 시작 전에 알렸어야 하는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봐도 경황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당해 보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클럽이 15개나 있었던 것은 실격 사유가 될 수도 있지 않나요?
-아!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