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 주구(走狗)
가비게일은 흥분을 잘 하는 성격이 아니다.
덩치는 불곰처럼 크지만 엉클 덕을 비롯한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용의주도한 성격이다. 그걸 짐작케 하는 대목이 그의 골프스윙이다.
상황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스윙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것만 봐도 그의 몸은 물론 사고가 얼마나 유연한지 짐작된다.
그런 그가 버럭 화를 냈다.
그건 질문에 대한 강한 긍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굳이 화를 낸 이유를 유추해 보자면 맥락은 둘로 짐작되었다.
‘막대한 손해를 봤나?’
친구 말처럼 원금을 다 빼먹었다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 필시 그 투자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추론컨대 초기에는 톡톡히 재미를 봤으나 그 재미에 푹 빠져 더 큰 거금을 들여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필상의 무시무시한 연승이 이어지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버럭’이 이해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그럴 자리가 아니다.
친구들은 물론 다들 존중하는 필드의 지배자, 필상이 게스트로 함께하는 만찬이기에 지나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아비게일.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난 이만 일어나겠네. 좋은 분위기를 깨 미안해. 덕!”
게일은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스스로 자신의 불찰임을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고 만찬 분위기는 졸지에 삭막해져 버렸다.
상기된 얼굴로 나가려던 그가 굳이 필상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그 와중에 건넨 말도 꽤나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오늘 확인한 자네의 특출한 실력은 인정해. 내 평생 필드에서 오늘처럼 당황한 적은 없었거든.”
“칭찬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편할 대로. 하지만 자네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
고통을 겪는 이들이라니?
필상의 등장에 무수한 골프팬들이 열광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부정하는 뜬금없는 말을 던지고는 그냥 나가 버렸다.
대답을 들을 의사는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던진 말을 다 들은 친구들의 반응은 기이했다.
“게일. 저 친구 어쩌다 저리 된 거지?”
“최근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가 보더라고. 던디에 있는 가문 땅까지 내놓은 걸 보면.”
“그걸 내놨다고? 수백 년 동안 유지해 온 가문의 영지를? 한때 스코틀랜드 왕가를 세웠다는 그 대단한 자부심은 대체 다 어디 가고?”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가?”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추론이 맞아떨어졌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스스로 밝혔듯 그는 연속적으로 골프 도박에 거액을 걸었다. 원래 본전 생각을 하는 이들이야말로 가장 무모한 법, 그는 어려워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점점 더 빠져들었던 것이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평생 돈 걱정 없이 살던 그도 도박의 늪은 헤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스스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한번 무너지면 더 무섭다.
자신의 실수도 끝끝내 합리화하기 때문이다.
‘설마 그 짓을 벌인 배후는 아니겠지?’
웃는 낯으로 오후 한나절 함께 라운드를 돌았다.
만약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고 치졸하게 가족들까지 협박한 더러운 짓에 관여했다면 용서하기 힘든 인간 말종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의 초대를 받았더라도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는 필상과의 골프라면 거부하는 것이 옳지 않는가!
라운드 중에 버젓이 다른 선수에게 돈을 걸었다고 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 말을 한 이유는 나름 협박이었던 것이다.
라운드를 돌며 유난히 따가웠던 눈빛을 차츰 분노가 일었다. 그래서 행여 실수라도 할까 봐 필상은 먼저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세.”
술이라면 환장하는 엉클 덕도 덩달아 자리를 벗어났다.
맥주는 술도 아니라던 그가 귀한 술을 남기고 일어선 이유는 내일 필상과 함께 운명의 결전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오는 길에 덕에게 확인하고픈 게 있었다.
“친구 분들이 하나같이 대단하군요.”
“허허허! 우리가 좀 세긴 하지. 그런데 게일의 행동은 나로서도 좀 이해가 되지 않더군.”
“어떤 측면에서 말입니까?”
“으음……. 없는 이야기를 지어낼 생각이 없는 나도 그가 최근 우리 정기 모임에도 거의 나오질 않아 이상하다 여겨 알아봤는데, 이미 축축하게 젖었더군.”
“그렇다고 부도덕한 일을 벌일 위인은 아니죠?”
“부도덕한 일?”
뜻밖의 표현이었는지 엉클 덕은 걸음을 멈추고 필상을 응시했다. 그도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은데, 차마 입을 열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으로 짚어 보면 그 역시 게일의 어두운 부분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기대와는 달랐다.
“그 또한 나의 오랜 친구일세. 설사 그가 내 신뢰를 저버렸다고 하더라도 그게 확인되기 전까지는 폄하할 수 없네.”
“아! 이해합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좋은 꿈꾸게. 허허허!”
멀어져 가는 그가 남긴 웃음소리에 묘한 여운이 깔렸다.
엉클 덕은 뭔가 아는 게 있는 것 같았으나 본인이 말했듯이 자신이 친구를 먼저 배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숙소로 돌아오던 필상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적절한지 고심하다가 결국 봄을 만나 뭔가를 부탁했다.
사토시가 그녀의 안전을 신신당부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고 호락호락 당할 여자가 아니다. 스스로 조심한다면 이번 사건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증거를 찾을 가능성이 높다.
필상의 말을 끝까지 들은 그녀가 살짝 긴장하는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자만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드디어 우리 폭군이 카메라에 잡혔네요!
-아! 늠름한 모습, 보기만 헤도 즐겁습니다. 하하하!
디 오픈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에 일어나 연습장까지 뛰어 도착한 필상은 스윙을 점검했고 티오프까지 30분이 남았지만 일찍 이동을 시작했다.
워낙 많은 인파가 몰려 이동이 지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필상이 나타나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역사적인 기록의 여정 내내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확률이 높다. 시선이 집중된다고 벌벌 떨 필상은 아니지만 자신의 목표를 눈앞에 둔 시점이기에 적당한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 대회는 무려 27개국에 실황 중계가 된다고 하더군요.
-네. 역대 최대라고 하는데,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의 국적 수보다 많습니다. 디 오픈 자체의 명성도 작용했지만 주인공이 아주 각별하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이죠. 캘린더 그랜드슬램, 그게 가능할지 지켜보는 것은 골프팬이라면 로망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허 위원님, 오늘 날씨 한 번 끝내주네요.
-이게 바로 스코틀랜드의 전형적인 날씨입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먹구름이 잔뜩 껴 아침인데도 마치 초저녁 같은 칙칙한 분위기를 자아내죠. 때문에 이런 기후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들에게는 부담스러울 겁니다.
흐린 날씨는 실제 샷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홀을 둘러싼 거대한 나뭇가지들까지 심하게 흔들리는 걸 보면 역시 북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강력했다.
비까지 겹치면 안 그래도 녹록치 않은 코스는 더 괴물로 변한다. 그런데 이 칙칙한 오전 날씨가 오후로 넘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눈부신 햇살이 비치기도 한다.
그래서 다들 아침보다는 오후 티오프를 선호한다. 예선 라운드는 적당히 배분했지만 그래도 모두가 공평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오전이라도 늦은 시간에 출발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점점 더 세질 것 같아.”
1번 홀에 도착할 무렵, 엉클 덕은 그렇게 말했다.
최고의 선수임에도 티오프 시간에 특별한 배려 따위는 없었기에 7:20에 출발하는 필상은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그런데 통상적인 날씨가 아닐 거라는 덕의 말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이든 아니든 일단 불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는요?”
“글쎄……. 만약에 비가 쏟아진다면 아침보다는 오후가 될 가능성이 더 높지.”
점쟁이도 말하기 껄끄러운 게 영국 날씨다.
워낙 도깨비처럼 들쑥날쑥하기 때문인데, 덕은 거의 단정을 지었다. 가만히 있어도 될 말을 굳이 꺼낸 것은 필상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사실일 것 같았다.
왜냐면 그가 스스로 말하길 이곳은 그의 앞마당처럼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퍼펙트! 퍼펙트!”
어디선가 들려온 그 외침은 잘 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필상의 닉네임을 부른 것이다. 그런데 어딘가 친근한 느낌이 들어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봤더니,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덕! 친구 분들 오셨네요.”
“응. 봤어. 늘 저 자리를 선호하거든.”
“그런데 게일은 보이지가 않는데요?”
“그래? 하지만 자넨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경기에만 집중하자고.”
“네. 하하하!”
1번 홀은 376야드 파 4다.
페어웨이가 제법 넓지만 군데군데 작은 둔덕들이 있어 운이 나쁘면 샷을 하기 제법 까다로운 경우도 있다.
다만 티샷이 지나치게 좌우로 빠지면 위험하다. 그린 앞을 지나고 있는 크릭이 전방에서 보면 n자처럼 좌우로 빠져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은 드라이브를 잡았고 시원하게 때렸다.
-정말 깨끗한 방향성이군요!
-저렇게 일직선으로 똑바로 치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프로라도 시기에 따라 일정한 경향을 띠기 때문입니다.
-티샷은 드로우, 아이언은 페이드를 치는 선수가 가장 유리하다고 하는데, 그건 스트레이트로 치지 못해서군요!
-하하하!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 프로가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것이죠.
비거리는 332야드, 그린을 가로막고 있는 개울의 10야드 앞에 정확히 멈췄다. 박수가 쏟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리, 방향을 모두 지킨 정교한 샷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상은 남은 45야드를 피칭웨지로 범앤런을 시도해 홀컵에 꽂힌 깃대를 정통으로 맞춰 버렸다.
“탭인 버디 기회로군!”
“오늘 컨디션이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정확한 컨트롤이 되니까!”
“다 좋은 캐디가 받쳐 줘서 그런 거죠. 하하하.”
“쓸데없는 소리!”
진심이었다.
미사키가 곁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영 찜찜했는데, 무뚝뚝한 노인네가 필상의 마음을 편안하게 이끌어 줬기 때문이다.
1번 홀을 버디로 개시한 필상은 까다로운 2번 홀은 안전하게 공략해 파 세이브를 했지만 3번 홀에서 장타가 터졌다.
그린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거리는 11야드, 라이도 정확히 읽기 까다로웠으나 필상은 팬들의 비명 소리를 만들어 냈다.
정확한 라이를 타고 구르던 공이 홀컵 아래로 떨어지며 이글을 완성했던 것이다. 첫 3개 홀에 -3, 필상은 너무도 쉽게 만들어 냈지만 첫 3홀에서 -2를 기록한 선수도 없었다.
-이거 4라운드까지 볼 필요가 있을까요?
-하하하! 그러게 말이죠. 골프의 성지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는 완벽한 샷이 계속 터지고 있습니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을 걱정했던 제가 다 부끄럽네요.
-동승했던 캐디와 현장 매니저는 아직 병원에 있다던데, 정말 건강 하나는 타고난 선수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행운의 사나이라고 해야겠죠! 아니면 인간이 아니거나.
그렇게 찬사를 보태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전반에 5언더를 기록한 필상은 후반에도 4타를 줄이며 -9로 첫 라운드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가 끝날 무렵 덕의 예고와는 달리 해가 쨍쨍 떴다. 바람도 잦아들었고.
“뭡니까?”
“뭐가?”
“날씨요?”
“아! 그냥 던진 말이었어. 맞으면 좋고 아니라도 자네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으니 하얀 거짓말이라고 봐야겠지.”
“그렇게 되나요? 하하하!”
최고의 경기를 펼친 필상은 스코어 카드를 제출한 뒤, 엉클 덕과 함께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같은 시각, 열심히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여자가 있었다. 세 명의 덩치들을 따라가면서 수시로 촬영했는데, 어느 한순간 그녀는 얼른 인파속으로 숨었다.
“들켰나?”
그건 아니었다.
상대가 뭔가 낌새를 챘을 때, 곧바로 숨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돌아간 코너를 따라 돌았다면 기다리고 있던 덩치들에게 린치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다른 감각을 지닌 그녀, 봄은 위기감이 느껴지자 곧바로 자신의 몸부터 숨긴 것이다.
동태를 살핀 그녀는 일단 멀찌감치 숨어 기다리다가 다시 크게 돌아 그들이 향한 주차장으로 쫓아갔다.
하지만 차가 없는 그녀는 그 차가 출발하자 주변을 안타깝게 둘러보다가 추격을 포기하고 필상을 만나러 이동했다.
“저 좀 잠깐 봐요.”
“나 연습하러 가야 하는데?”
“나랑 같이 갈 데가 있어요.”
식사를 마칠 무렵, 레스토랑에 나타난 봄은 다짜고짜 필상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으나 봄이 아랑곳하지 않는 것을 보며 필상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운전을 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숙소였다.
곧장 객실로 들어간 봄은 일단 자신이 찍은 사진들부터 보여 줬다. 그 안에는 필상이 목표로 잡아 줬던 아비게일이 있었고 그는 두 명의 남자와 함께 필상의 경기를 따라다니며 쉴 새 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두 놈은 주구(走狗)인 것 같아요.”
“주구?”
“아비게일이라는 자가 계속 둘에게 지시를 내리더라고요. 그중에 확실하게 들은 말은 이거에요.”
충격적이었다.
‘그냥 둬서는 안 되겠어. 한국으로 보낼 전문가를 찾아 봐.’
‘병원을 덮치는 건 어떨까?’
‘그냥 다시 한 번 차로 밀어 버릴까?’
잘못 들었다고 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었다.
한국으로 누군가를 보낸다거나 병원을 덮친다, 차로 밀어 버린다는 말은 그 사건과 연관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