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 닥쳐!
“정말 멋진 하루였네!”
“수고하셨습니다. 엉클 덕!”
“나도 클럽을 들고 나와 자네랑 라운드를 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어.”
“하하하. 그러셨습니까? 그게 뭐 어려운가요. 내일 다른 코스라도 같이 나가시죠.”
“정말 그래도 될까?”
“부킹은 잡을 수 있으시죠?”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허허허.”
어차피 자신은 대회에 집중해야만 한다.
자신을 향하고 있는 적들이 안심하게 만들어 더는 무리한 수를 두지 않도록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연출했다.
지지부진한 경찰 조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밝히겠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협박에 굴복한 것처럼 조용히 경기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물론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조사를 진행 중이다.
공적 기관의 힘은 인정하지만 보안이 취약하다. 언제든 돈과 권력 앞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적의 윤곽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하는 수 없었다.
다만 스스로 안위를 지키는 것은 피치 못할 일이지만.
“마스터!”
“와우! 친구 분들과 함께 오셨습니까?”
“그럼! 둘이 치면 재미가 없잖은가!”
내일 대회가 시작되는 올드 코스는 당연히 부킹이 되지 않았고 바로 옆에 붙은 링크스 코스에서 만났다.
그런데 자신과 비슷한 덩치를 두 명이나 더 데려왔다. 누가 보면 형제라고 생각할 만큼 닮았는데, 성격도 빼다 박았다. 아니, 어제는 엉클 덕이 많이 참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회 때문에 몰려든 엄청난 갤러리들이 경쟁적으로 라운드를 잡기 때문에 부킹이 어렵지 않았냐고 묻자 매일 골프를 치기 때문에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세 명 모두 이 역사적인 코스의 정회원이었던 것이다.
“부럽습니다.”
“하하하! 좋은 코스를 수십 개나 직영하는 TPK 최대 주주인 자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렇긴 하지만 여긴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렇지! 자네들도 들었지? 이 친구가 이렇게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재주가 있다니까!”
“그러게. 난 게일이라고 부르게.”
“난 맥일세.”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늘 같이 재미있게 즐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기를 해야지?”
“내기요?”
필상은 좀 황당했다.
이들은 자신이 누군지 안다. 그런데도 내기를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골수 골퍼들에게 적절한 내기가 활력소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명색이 세계 랭킹 1위인데, 이들은 전혀 겁내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하게 제안을 꺼낸 터라 거부하면 그것도 이상할 것 같아 적절한 핸디를 줄 생각을 하며 의향을 타진했다.
“몇 타를 잡아 드리면 좋을까요?”
“핸디? 우리 사전에 그런 말은 없네. 내 집을 파는 한이 있어도. 그렇지 않나? 친구들.”
“물론이지. 오늘은 좀 세게 가자고.”
“그래야지. 내 평생 가장 화끈한 하루가 될 것 같으니.”
참으로 대책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구김 없는 삶을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생각도 했다. 세인트앤드루스 골프클럽의 정회원이라는 것만 봐도 생활에 대한 부담은 없는 사람들 아니겠는가!
그래도 타당 100파운드(약 15만 원)는 절대 작은 금액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태도를 보건데 자주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비치기는 했다. 봐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마추어가 프로를 도발한 대가는 치르게 할 생각이었고 딴 돈은 식사를 사고 남은 금액은 좋은 일에 기부하면 된다.
그런데 경기가 시작되자 필상은 정신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스 샷!”
덕은 정통파였다.
스윙도 표준에 가까웠으며 거리도 짱짱했다.
올해 71살인 그가 300야드 가까이 날리는 것을 보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덩치가 크다고 비거리가 그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정확한 임팩트를 만들어 내고 있었으며 샷을 할 때는 완전히 딴 사람처럼 신중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맥과 게일의 폼은 엉성했다.
제대로 골프를 배우지 않고 스스로 터득한 스윙이었는데, 결과는 항상 필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맥의 8자 스윙은 짐 퓨릭도 울고 가겠네요.”
“둘이 만나 밤새도록 술을 먹은 적도 있기는 했지.”
“와우! 그랬습니까?”
“저 인간은 그래도 매일 깨져. 문제는 저놈이지. 게일.”
“굉장한 기교파로 보입니다.”
“매일 스윙 폼이 달라진다니까! 그러면서도 거의 이븐파를 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븐파요?”
“언더도 치지. 하지만 너무 따면 욕을 먹으니까 조절하는 것 같아.”
“헉!”
할 말을 잃었다.
필상은 당연히 젊은 프로니까 블랙 티에서 플레이를 한다. 하지만 이미 시니어인 세 사람은 화이트도 아닌 블루에서 치기로 했는데, 이븐파라니!
전방 경계 초소에 걸려 있는 문구가 떠올랐다.
‘졸면 죽는다!’
이 세 괴짜는 이 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마추어들이었던 것이다. 대회에 잘 나가지도 않지만 어쩌다 나가면 무조건 휩쓸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마추어와 프로의 기량 차이는 현격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 못지않은 핸디캡이 존재했다.
셋은 이 코스를 자기 집 정원처럼 속속들이 알지만 필상은 아무런 정보도 없다는 것이었다.
“또 3온 1퍼팅! 무슨 골프가 그렇게 감동이 없어?”
“너나 잘해. 덕.”
5번 홀까지 필상은 겨우 본전을 하고 있었다.
처음 나간 익숙하지 않은 링크스에서 이븐파를 쳤으면 아주 선방한 것이다. 하지만 맥도 이븐파였고 게일이 딴 200달러는 덕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만만한 맥이 무너지지 않고 착실하게 파를 지키자 도발성 발언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험악한 인상을 지닌 덕도 친구들 앞에서는 위협적이지 못했다.
서로 덩치도 비슷하지만 이미 이런 일에 익숙한 듯.
그런데 6번 홀로 이동하던 도중에 나란히 걷게 된 게일이 다소 의외의 말을 건넸다.
“난 자네가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 베팅했어.”
“누구요?”
“토미와 셰인. 그들은 올드코스를 잘 알고 있거든.”
“토미 플리트우드와 셰인 로리 말입니까?”
“셰인은 이곳 아일랜드 출신이고 토미도 영국 선수지.”
필상의 탁월함을 인정하지만 그의 손도 결국 안으로 굽은 것이다. 그런데 그 얘기를 왜 지금 하는 것인지가 의문이었다.
게다가 필상은 스포츠 베팅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있다. 그걸로 요즘 곤란을 겪는 중이고.
물론 그런 사건은 게일이 알지 못할 것이지만 그래도 당사자 앞에서 다른 선수에게 베팅했다는 말이 달갑게 들릴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하하. 행운을 빕니다.”
“자네가 도와주면 난 대박이 날 텐데!”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정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부 조작이지 않은가!
그런데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음에도 그는 씩 웃었다. 그 미소에 담긴 느낌이 영 께름칙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뒤따르던 엉클 덕이 갑자기 성을 낸 것도 그 대목에서였다.
“아비게일! 아직도 자네 그 짓을 하고 있나?”
“짓? 내 고상한 취미를 그렇게 몰아붙이는 것은 친구로서 좋은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네 돈으로 뭔 짓을 하든지 상관은 없는데, 그걸 지금 네 입에 올렸다는 게 문제지. 내가 초대한 마스터 앞에서.”
덕은 문제의 본질을 타격했다.
자신이 호의를 가지고 있는 골프 마스터와 함께 라운드를 즐길 자리를 주선했는데, 그런 행위는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고 항변한 것이다.
실제 프로와의 라운드를 원하는 사람은 줄을 섰다. 그것도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는 필상이라면 18홀을 같이 도는 것에 거금을 낼 용의가 있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물론 그런 행위로 돈을 벌 의사는 전혀 없지만.
다행히 게일이 미안하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다소 험악하게 흐르던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필상은 생각이 많아졌다.
아비게일은 그저 고상한 취미로 스포츠 베팅을 즐기는 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확연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어허! 마스터. 내일이 대회 시작인 거 잊었나?”
“그러게요.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실망스럽군!”
엉클 덕은 하고 싶은 말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이 돕는 선수가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에 화를 내는 장면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필상의 성적은 그의 명예도 함께 걸린 희귀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제안을 거절한 그가 필상의 캐디로 나섰다는 것은 지역 언론은 물론 영국의 메이저 언론에도 언급이 됐다.
적어도 영국 골프팬들에게는 그의 경기로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실전 경기가 아니더라도 샷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이제 제가 왜 필드의 폭군이라고 불리는지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오호! 바로 그걸세!”
엉클 덕은 필상이 입술을 깨무는 모습에 아주 기뻐했다.
서로 내기를 하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보인 태도는 필상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느껴지는 장면이었기에 필상은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버디, 버디, 버디…….
파4, 파5에 이어 파3 티샷까지 쩍 붙여 싸이클링 버디를 완성하면서 필상의 독주는 그렇게 길을 열었다.
역시 가장 먼저 무너진 사람은 맥이다. 그리고 기교파인 게일도 샷의 정확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파 행진이 끊어졌고 잔잔한 실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굿 샷!”
“하하하! 정신을 차릴 수가 없군!”
“그런데도 샷은 좋은데요?”
“2등은 해야지. 바짝 긴장한 하수들과 난 다르거든!”
“덕!”
게일은 씁쓸하게 고개를 돌렸으나 맥은 엉클 덕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고 도발이라고 구정하며 맞대응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그건 그의 패배에 불을 지피는 행위였다. 긴장한 그가 흥분까지 더하자 특유의 8자 스윙의 궤도 폭이 커졌다.
짧아도 방향성은 좋았는데 그나마도 좌우로 날렸다.
“저녁은 제가 거하게 쏘겠습니다.”
“우린 땄다고 한턱내는 문화는 없는데!”
“제가 매일 함께 칠 수 있다면 그래도 되겠지만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 좀 해 주십시오.”
“그래. 그러자고. 마스터가 사는 저녁, 멋지지 않은가? 덕.”
“허허허. 게일, 자네가 웬일이지? 20펜스도 우린 늘 더치페이잖아.”
이들은 거의 매일 모여 함께 공을 치고 밥도 같이 먹은 뒤에는 술자리도 길게 이어간다. 하지만 서구인들이 늘 그렇듯, 늘 계산은 자기가 먹은 대로 치른다.
하지만 마스터가 딴 돈으로 사는 저녁, 그걸 거부할 수는 없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친분을 쌓기에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저녁 식사에 이들만 둘러앉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 패밀리가 좀 많지?”
“네. 이 큰 홀이 작게 느껴지네요. 하하하.”
무려 3,700파운드(약 560만원)를 땄다.
때문에 엉클 덕의 친구들이 여덟 명이나 몰려와도 부족할 일은 없었다. 기부할 금액이 줄어들겠지만.
그런데 엉클 덕 친구들의 열정은 필상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직접 다가와 악수하고 포옹하는 그들에게서 감지된 감정은 의례적인 예의를 넘어선 존경의 염에 가까웠다.
평생 골프를 즐겨 온 지독한 골프광들에게 필상의 골프 여정은 살아 있는 위대한 전설이자 매 순간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디 오픈이 열리는구나!”
“난 너무 흥분되어 오늘밤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렇다고 작년처럼 술을 진탕 먹고 자는 바람에 위대한 경기의 직관을 놓치지는 말라고. 하하하.”
“당연하지. 난 이미 우리의 마스터가 위대한 기록을 달성한다는 데, 거금을 베팅했거든!”
“140명이나 초대해 놓고 우승 배당이 고작 1.4배라는 게 말이나 돼?”
“요즘 걔들 상황이 꽤나 어려운 것 같더라고. 웬만해야 손해를 보지 않을 텐데, 너무 몰빵이거든!”
“그야 그들이 데리고 있는 전문가라는 작자들이 오판한 대가지. 개미 눈곱만큼 주면서도 이번에 폭군이 우승하면 꽤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 같던데?”
두런두런 나누는 대화를 필상은 가만히 경청했다.
거의 대부분 내일부터 시작되는 디 오픈에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특히 이들은 베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이미 생활 깊숙이 스포츠를 통한 도박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하기야 동네 작은 펍에도 슬롯머신이 비치된 나라다.
오로지 한 곳만 허용된 한국과는 달리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 도박이 성행하고 있음이 안타까웠다. 역시 자본의 힘과 논리를 억누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답답한 겨우 추스르고 있던 차에 한 남자가 건넨 말에 필상의 귀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봐! 게일, 자네는 이번에도 엄한 놈들한테 베팅했나?”
“응.”
대답하기 껄끄러웠는지 그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필상은 이미 들었던 내용인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어진 말이 폭탄이었다.
“자네 이전에 러시아 베팅업체에 투자했다고 하지 않았나? 네 스타일을 아는 내가 보건데, 절대 작은 금액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런 일 없어.”
“에이! 내 PB가 그러던데, 모르긴 몰라도 1억 파운드 이상 넣어 이미 다 빼먹었다고.”
“닥쳐!”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