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17화 (317/354)

317. 엉클 덕

“공 프로!”

“아! 죄송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기운 때문에 둘 다 겁에 질린 표정을 본 필상은 서둘러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우편물은 여러 장의 사진이었는데, 하나같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의 일상이 찍힌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모모코와 수미가 집 앞마당에서 놀고 있는 장면, 또 과수원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 모습, 그리고 누나들 식구들이 모두 집에 와 함께 식사를 나누는 모습도 있었다.

“이 죽일 놈들!”

“공 프로, 일단 진정하고 방어 수단부터 강구해야 할 것 같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 대표 사진도, 서 팀장과 미사키 사진도 있었으며 봄이 경기하는 장면까지 보낸 걸 보면 필상의 측근이 누군지 상대는 이미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봄의 사진을 보는 순간, 필상은 핸드폰을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거실에 남은 시몬과 이 대표는 잠시 멍하니 서로를 쳐다봤다.

“라일리. 이건 좀 무모한 싸움 같습니다.”

“무모하지 않아! 이럴 게 아니라 주변부터 좀 살펴 줘.”

정신을 차린 이 대표는 숙소가 안전한지, 혹시 도청이나 도촬을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할 것을 주문했다.

심한 위기감을 느낀 시몬도 동의했다.

“일단 보안부터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경호 인력을 불러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어수선하지 않게 보안 점검할 전문가 한 명만 불러.”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까 봤잖아! 공 프로가 어떤 인물인지!”

그 말에 시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상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하고 위험한 사람이었다. 단지 분노만으로 사람을 질식시킬 수 있는 위인인 것을 확인한 시몬은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자신이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신비한 세계를 직접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복잡했다.

필상의 신비로운 능력은 믿고 싶지만 상대는 이미 보여줬듯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최악의 집단이다.

차량 충돌 사고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태연히 저질렀고 협박용 우편물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뭐라고?”

‘한 시간 후면 도착한다니까요!’

미처 연락을 하지 못했지만 일본에 있던 봄도 필상의 사고 소식을 듣고는 바로 영국으로 출발한 모양이다.

하기야 자신이라도 봄이 사고를 당했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봄의 각별한 능력은 다 가늠하기 어렵지만 한국에 있는 식구들을 지키기에 충분하다고 봤다.

그래서 가족들을 돌봐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너무 연락이 늦었던 터라 이미 영국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래서 일단 도착하면 상의하기로 마음먹고 이어서 떠오르는 인물에게 전화를 넣었다.

“너도 영국이라고?”

‘네! 미사키와는 통화했습니다.’

차선책은 흑돈이었다.

하지만 녀석도 진행 중인 대회까지 포기하고 곧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연인이 다쳤는데,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자, 잠시 생각을 정리한 필상은 마지막 인물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런 일에 가장 적합한 인사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의 힘까지 빌리는 것은 개운치 않았으나 어차피 한 배를 탄 인사였기에 체면을 따지지 않기로 했다.

“접니다. 어르신!”

‘아! 멀쩡한 모습은 뉴스에서 봤어. 그만하기 참 다행일세.’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덫에 걸린 것 같습니다.”

‘덫? 감히 누가 자네를 건드린단 말인가?’

“부정확하지만 짐작 가는 대상은 있습니다. 놈들은 제게 협박용 사진을 보냈습니다. 제 가족과 측근들의 일상을 몰래 엿본 사진이었습니다.”

‘혹시 우리 봄이도 있나?’

“네. 죄송합니다.”

‘어허!’

사토시 회장은 깊은 탄식을 터트리고는 잠시 말을 잊었다.

누군가를 압박해 본 적은 있어도 자신이 위협을 느끼는 상황을 겪은 것은 실로 오래만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천금 같은 자신의 딸도 함께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에 그는 끓어오르는 분기를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봄이 이미 영국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기세였다. 필상이 추측한 적의 존재를 듣고는 그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지키겠노라 먼저 약속을 했고 몇 가지 부탁을 전했다. 다름 아닌 든든한 조직을 동원해 한국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지켜 달라는 청이었다.

‘가족 걱정은 붙들어 매고 자넨 자네 일에 충실하게!’

“감사합니다.”

‘자네의 말처럼 봄이 각별한 능력을 지닌 건 알겠는데, 그래도 세상 경험이 너무 적어 애비인 나로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분명히 알아줬으면 하네.’

“생과 사를 같이 하겠습니다!”

‘으음……. 나도 내 할 일을 분명하고 은밀하게 진행하겠네. 그리고 가용한 모든 정보망을 돌려보고 수시로 자네와 상의하도록 하지,’

역시 사토시 회장이었다.

평생 스포츠 배팅업체들과 비교해도 더 험한 일을 해 온 사람이다. 사채부터 시작해 파친코로 사업을 기반을 다진 이다.

일본의 검은 세력을 좌지우지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때문에 이런 일에 그만한 역량을 가진 이는 찾을 수 없다.

“오라버니!”

“일찍도 왔네!”

1시간 후에 도착한다던 봄은 필상이 사토시 회장과 통화를 마치고 거실로 나오자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이미 언론을 통해 온전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녀는 필상 앞까지 다가오더니 덥석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기운을 필상에게 흘려보내 몸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안도하더니, 코를 찡긋거리며 결국은 기가 막힌 한마디를 던졌다.

“덤프트럭으로 깔아뭉개도 살아날 위인이긴 하죠!”

“야!”

“고마워요!”

말릴 겨를도 없이 봄은 필상의 품을 폭 파고들었다. 시몬과 이 대표가 곁에 있었지만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이 대표는 그나마 둘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서 멋쩍게 웃어넘겼지만 시몬의 표정은 좀 이상야릇해졌다.

아름답고 깜찍한 아내, 모모코의 존재를 그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봄의 행동은 격정에 어린 애인의 행동처럼 보였던 것이다.

당황한 필상의 모습은 그 의심을 확신으로 옮겨가게 만들었는데, 구차하게 들린 필상의 한마디가 더 기이했다.

“동생입니다. 제 여동생!”

* * *

“당연히 제가 매야죠!”

“아니야. 넌 할 일이 따로 있어.”

“그래도 안 됩니다! 제가 매겠습니다.”

“넌 미사키랑 서 팀장 곁을 지켜야지.”

“병원에 덩치 큰 가드들이 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흑돈은 어젯밤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분위기 파악이 전혀 되지 않았다. 호흡이 좋은 흑돈이 도와주면 힘이 되겠으나 일단 연습을 해야 하는 필상은 이 대표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애인 곁에 꼭 붙어 잠이나 제대로 잘지…….

‘밤새도록 토납을 하길 다행이네!’

사실 어제는 정상이 아니었다.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무리한 것 때문에 적을 상대하기 위해 논의할 때도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6시간을 온전히 토납에 매달린 결과,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호전되었다. 중단전이 열린 뒤, 회복 속도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온전한 상태라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스윙을 전체적으로 점검한 뒤, 오후에 예정되어 있던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 바다가 북해로구나!”

테라스에 방석을 하나 놓고 자리를 잡았다.

샷을 연습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자신의 상태를 최적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참 명상에 잠길 무렵,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 사뿐사뿐 다가왔는데, 특유의 기척을 알아챈 필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자신을 위해하기 위해 나타난 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압할 능력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고 백주 대낮에 숙소까지 쳐들어온다면 다시 방향을 선회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도 같이 해요.”

“네 할 일은 따로 있잖아.”

“임무를 바꿨어요. 지리도 모르는 제가 나서는 게 도리어 위험하다고 일단 오빠 곁에서 지키래요.”

봄이 오라버니가 아니고 오빠라 지칭했다.

스스로 모모코와 구분한답시고 그리 호칭을 하더니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웠다.

정말로 자신을 염려하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선히 곁을 내줬고 봄은 방석을 하나 들고 나오더니 나란히 앉아 토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음양의 조화인가?”

“거봐요! 어젯밤에도 제 말대로 했으면 훨씬 나았을 거라고요.”

“무서워서 그러지. 네가.”

“흥! 됐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봄은 호흡에 집중했고 필상도 이내 합류했다. 그런데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기본적으로 양의 기운을 바탕으로 하는 필상과 달리 봄은 음기의 결정체였기에 컨디션 회복이 쾌속하게 이뤄졌다.

밥을 거르고 수련하려던 필상은 저녁이 되자 더는 토납에 매달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고 봄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공 프로. 이분이 이번 대회에 캐디를 봐주실 분이야.”

“아! 안녕하십니까?”

“허허허! 만나서 영광이오. 마스터!”

이 대표가 드디어 캐디를 확정한 것이다. 필상이 공개 구인을 한 뒤로 무려 이백여 명이 연락을 해 왔단다.

현직 캐디부터 자신의 신분 노출을 꺼리는 프로 출신 전문가까지 두루 연락을 해 왔는데 데려온 사람은 덩치가 클 뿐 아니라 배가 불룩 나온 비만한 체구를 가진 노인이었다.

족히 일흔은 되어 보였고 술을 아주 좋아하는지 얼굴이 전체적으로 붉었다. 다만 기운은 보기 드물게 맑았다.

필상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그는 다시 크게 웃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어색함을 처리하는 방법이 자연스럽고 여유로워 마주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195cm, 114kg, 골프백은 내게 그다지 무거운 짐은 아니니까 걱정 말게. 그리고 나를 덕이라고 부르면 돼.”

“덕. 오늘은 그만 드십시오. 내일 우리 연습 라운드가 잡혀 있는 거 아시죠?”

“그러지. 그런데 맥주는 술이 아닐세.”

“덕. 대회가 끝나면 제가 아주 좋은 술을 한 상자 선물하겠습니다. 물론 그건 우승 선물이어야 할 거고요.”

“오호! 자네 술 한 상자라고 했네?”

“물론입니다. 그런데 코스는 파악하셨습니까?

“코스? 올드 코스는 내 평생의 놀이터라네. 자네 매니저는 그걸 알고 직접 찾아왔던데, 자넨……. 하기야 연습하느라 바쁘겠지.”

“혹시 클럽 멤버십니까?”

“당연하지. 내가 클럽 챔피언을 6번이나 했던 이 동네 최고의 골퍼라는 것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게 좀 그렇군. 헤이! 라일리, 내일 아침 연습장으로 나올 테니까 이 친구에게 내가 믿을 만한 캐디라는 걸 좀 알려 주게.”

“네. 그렇게 할게요. 덕!”

압도적인 덩치뿐만 아니라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다만 그런 성격이 자신과의 호흡에 지장이 없을지, 그건 두고 볼 문제였다. 맞지 않는다면 교체하면 되니까 그런 문제에 정신을 뺏길 이유가 없었다.

그가 나가고 나자 이 대표는 필상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저분! 이 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아마추어 골퍼야.”

“클럽 챔피언을 6번 한 것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7번 참가해서 6번을 우승했고 한 번 놓친 것도 전날 마신 술이 덜 깨 벌타를 와르르 받는 바람에 놓친 거래. 클럽 챔피언들이 모여 치르는 왕중왕전에서도 3번이나 우승했거든!”

“대단하기는 하네요.”

“물론 캐디로서의 능력은 어떨지 모르겠어.”

“네? 전문 캐디를 한 적이 없단 말입니까?”

이건 좀 의외였다.

골프를 잘 치는 것과 캐디를 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게다가 술 때문에 경기를 망친 적이 있다는 말은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을 듣고 겨우 납득할 수 있었다.

“영국 출신 선수들, 특히 매킬로이는 그에게 수차례 도와 달라고 매달렸다고 해. 매킬로이가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인데도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하잖아.”

“그런데 제 백을 맨다고요?”

“그러니까! 나도 말만 듣고 일단 연락했는데, 오라잖아.”

“술집에 있었던 거군요.”

“응. 친구들이랑 같이 진탕 마시고 있더니, 내가 가자 자랑을 얼마나 하는지. 마스터가 자신에게 부탁을 했다고.”

“괴짜로군요! 일단 내일 한 번 돌아보면 알게 되겠죠.”

기대 반, 우려 반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단 3홀 만에 그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백을 핸드백처럼 가볍게 매고 조용히 따라오기만 했다. 그런데 가끔 던진 말은 필상의 오판을 매번 확인시켜 줬다.

그는 오류를 일으키는 인간의 눈을 뛰어넘는 아주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특히나 반드시 피해야 할 곳은 어김없이 언급했고 그 말을 따르지 않았던 필상은 낭패를 봐야만 했다.

씩 웃는 그의 표정은 묘한 친근감을 불러일으켰고 필상은 라운드가 끝날 무렵, 그를 ‘엉클 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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