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16화 (316/354)

316. 살기(殺氣)

“배후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스포츠 베팅업체.”

“네? 그들이 왜?”

“내가 호랑이 코털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제야 시몬도 필상이 전에 제기했던 문제를 상기해 냈다.

상당한 여론이 들끓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추악한 짓을 벌이는 것은 납득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그 사안은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은데 왜 무리수를 던진 것인지.

검은 돈이 오가는 세계가 아무리 무섭기로 당대 최고의 골퍼에게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증 말고 물증이 있으십니까?”

“그건 이제부터 시몬이 찾아야 할 일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필요한 지원은 아끼지 않을 테니, 은밀하게 접근해 보면 의외의 지점에 증거가 있을 겁니다.”

“그럼 이 문제를 공개하지는 않을 생각이십니까?”

“하하하! 물증이 없잖습니까! 또한 증거를 찾아도 공개 시기는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겁니다.”

“극비리에 진행해야 할 일이군요.”

“그렇습니다. 차후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일단 내 식구들부터 보러 갑시다.”

“움직이시겠다고요?”

시몬은 기겁했다.

끔찍한 교통사고가 난 필상이 혼절해 입원한 지 이제 기껏 3시간이 경과되었을 뿐이다. 깨어난 것도 믿기 힘든데, 만류할 틈도 없이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마음과 같지 않은지 절로 터지는 신음 소리를 억지로 구겨 넣은 필상은 다시 침대에 앉았다.

“아무래도 좀 더 쉬어야겠군요.”

“당연하죠. 그 비싼 차가 폐차할 지경인데…….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한 시간가량 혼자 있고 싶습니다. 이 방의 출입을 통제해 주십시오.”

“혼자 괜찮겠습니까?”

“네. 걱정 마시고 제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 믿고 도와주십시오.”

그러겠노라 대답했지만 시몬은 멀리 가지 못하고 직접 방문 앞에 앉아 지켰다. 그사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심했고 필요한 조치를 하나씩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사안이 큰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생각과 어쩌면 일생일대의 사건을 수임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사이 침대에 좌정한 필상은 중단전을 완전히 개방하고 몸이 이끄는 대로 주변의 자연지기를 마음껏 취했다.

들었다 놨다 반복할 때마다 상했던 신체 기능이 호전되었고 흩어졌던 몸의 균형이 잡히면서 새로운 기운들이 솔솔 피어오르며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다는 충만감을 느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일단 기동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자 필상은 몸을 일으켰다. 근육이 찢어질 것 같았던 지독한 통증은 사라졌고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 감각은 주변에 사악한 기운의 존재까지 파악해 냈다.

“시몬.”

“아! 정말 괜찮으십니까?”

“네. 고개를 돌리지 말고 들으세요. 지금 응급실 앞쪽 휴게실에 신문을 보는 척하며 여길 살피는 놈이 있습니다. 제가 동료들을 보러 갈 때, 살짝 빠진 뒤에 그의 뒤를 밝으십시오.”

“네.”

병실 안에 있던 필상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는지 의문이었으나 실제 설명한 놈과 동일한 존재를 확인한 시몬은 전율을 느꼈다.

동시에 밀려든 감정은 극한 카타르시스였다.

자신의 삶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신비로운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였어!’

의심을 품는 게 정상이나 오히려 밀려든 감정은 경외심이었다. 필상도 자신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는 곧 자신을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상관없는 자의 신비로움은 시기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자신과 한편에 섰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오히려 뿌듯했다.

마침 자신이 필요할 때 가동하는 인력이 도착했다.

변호사의 업무가 그저 법정에서 법리를 다투는 것만 있을 줄 알지만 유능함을 인정받으려면 발로 뛰는 팀이 필요하다.

그걸 알기에 오랫동안 유지하며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 준 이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내린 그는 그제야 필상의 동료들이 입원해 있는 병실로 향했다.

“여긴 아무도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하하하. 저는 프로님의 법률 대리인 시몬입니다.”

“아! 프로님에게 확인해 볼 테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시몬은 기가 막혔다.

분명 병원 소속의 가드인데, 대체 무슨 이유로 필상의 지시를 따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필상이 시키는 일을 확실하게 따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안에 들어갔다 온 경비가 문을 열어 주고는 다시 문 앞을 지키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신기한 일에 대해 묻고 싶었으나 안에 들어선 시몬은 그걸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필상은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여성의 중간에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손에 꼭 잡고 있는 여인들의 손에 하얀 빛 무리가 반짝이는 모습이 착시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조용히 소파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으음…….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미스터 퍼펙트. 그리고 그 자들의 흔적은 이미 추적하고 있으니 곧 결과가 보고될 겁니다.”

“그렇군요. 제 식구들이 생각보다 훨씬 부상이 심해 몇 가지 부탁을 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내일 낮에 이 대표님이 도착할 때까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아!”

필상이 탄성을 터트린 이유는 당장의 상황에만 집중하느라 외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의 소리였다.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당연히 난리가 났을 텐데, 또한 한국의 가족들도 걱정이 태산 같은 텐데 그걸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시몬. 저희들 유류품, 특히 제 휴대폰이 어디 있는지 확인 좀 해 주시겠습니까?”

“네. 바로 알아보고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일단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폰 좀 빌려 쓸 수 있을까요?”

“여기 있습니다.”

휴대폰을 건넨 시몬은 즉시 일을 처리하러 나갔다.

휴대폰을 켠 필상은 락이 걸려 있는 걸 보고는 헛웃음이 터졌다. 완벽해 보이는 변호사도 경우에 따라 이렇게 덤벙대는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대폰 액정을 잠시 주시한 필상은 능숙하게 패턴을 풀어냈고 원하는 번호를 눌러 통화했다.

‘여보세요?’

“나야. 모모코.”

‘오빠?’

모르는 국제 번호가 뜨면 모모코는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필상의 사고 소식을 들은 터라 뭐라도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전화를 받았으나 음성은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애타게 그리운 필상의 음성이 들려오자 그 음성은 곧바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걱정했지?”

‘아니, 아니에요. 오빠가 누군데!’

“그래. 나 멀쩡해. 그러니까 무리해서 건너올 필요 없어.”

‘싫어요. 저 거기 갈 거예요.’

필상에 대한 확신은 있지만 한국 언론에도 이미 필상이 타고 있던 파손된 차량의 화면이 나왔다. 부상에 대한 그 어떤 확인도 되지 않았으나 그걸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이번 주에 열리는 퀸즈 파크 챔피언십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다행히 가까운 여주 솔로모 CC에서 열리기 때문에 집에서 오고가던 차였다.

지금도 수미를 데리고 과수원에 일하러 나가신 모친이 보지 않게 하려고 TV를 끄고 마당에 나가 지켰으나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어 새로운 소식이 없나 살폈다.

그리고 이 대표와 함께 영국으로 가기 위해 짐을 싸 둔 상태였기에 어머니에게 어떤 핑계를 대야 하는지 고심하던 차다.

“모모코. 내 말을 들어. 난 목표를 이루고 돌아갈 거니까 당신도 당신이 목표한 것들을 이뤄.”

‘투어 우승 따위는 내게 중요하지 않아요. 전 당신이 무사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 이곳에 오면 안 돼.”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응. 하지만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나로 인해 당신이나 내 가족들이 다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그러니까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믿고 평소와 다르지 않게 당당히 경기에 임해. 곧 내 무사한 모습을 방송을 통해 볼 수 있을 거야.”

‘……알았어요.’

역시 모모코는 현명했다.

만사를 제치고 영국으로 건너올 수도 있지만 그녀는 인내했다. 필상이 아무 이유도 없이 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그 대신 이 대표가 오는 것은 만류하지 않았다. 그녀의 안전이 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당장 필상을 지원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겨우 모모코를 진정시키고 통화를 마친 필상은 일단 자신을 걱정하는 이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필요를 인지하고 시몬에게 기자회견을 열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당부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미사키와 서 팀장의 곁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으나 준비가 되었다는 말에 걸음을 뗐다.

“와아아아! 폭군이다!”

“멀쩡한 걸?”

“교통사고 났던 거 맞아?”

필상은 입혀 놨던 환자복까지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다. 아무리 멀쩡해도 환자처럼 보이면 걱정이 그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병원의 세미나실에 마련된 임시 기자회견은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온 상태였다.

필상이 당당하게 걸어 나오자 좌중은 순식간에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시끄러웠다. 몇 시간 전에 사고를 당한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대기록이 무산되었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이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대가를 치를 생각에 시야에 깜깜해졌을 것이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사고 차량에 타고 있었던 것 맞습니까?

“네. 저는 지독히도 운이 좋았습니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고 운전자인 제 현장 매니저가 헌신적인 행동을 취한 덕분에 이렇게 멀쩡합니다.”

-그럼 디 오픈 출전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신의 가호에 감사를 드리며 이 자리에서 저를 도와 대회를 함께 치를 캐디를 공개 구인합니다. 세인트앤드루스는 처음이기 때문에 캐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실 겁니다.”

-신의 가호라고요? 하하하! 교통사고도 비켜 갈 수밖에 없었던 위대한 기록을 기대해 봐도 되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부러 연출하지 않았지만 필상의 모습은 어딘지 초췌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 팀장과 미사키를 치유하느라 가용한 기운을 과도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행여 실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바짝 집중하는 통에 자리를 뜨던 필상은 잠시 현기증을 느껴 비틀거리기도 했다.

스스로 멀쩡하다고 밝혔지만 기자들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자연스러운 기자회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들인 효과가 있었는지 기자회견을 마치고 돌아오자 혼절했던 두 여인은 깨어 있었다. 필상이 들어오는 모습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녀들을 보며 필상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뭐 이렇게 오래 잠을 자?”

“프로님…….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핸들을 잘 틀어서 우리 모두 무사하고 특히 난 이렇게 멀쩡한데. 내가 미안하니까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날 생각들이나 하라고.”

운전했던 서 팀장은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사고가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의 고의적인 범죄라고는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들 곁에서 완치될 때까지 돕고 싶었으나 이 대표가 도착한 이후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 대표가 그녀들을 간병할 인력을 데려왔고 눈앞에 닥친 대회를 치르려면 시간을 아껴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필상이 연습장에 나타나자 한국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모두 병원에 찾아왔지만 필상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철저하게 면회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2시간의 비행 끝에 저녁에 도착한 이 대표 덕분에 사고 발생 24시간도 되지 않아 필상은 연습장에 복귀했다.

항간에 떠돌던 모든 우려를 불식시키는 불꽃같은 연습 샷이 터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료 프로들도, 기자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나둘 물러났다.

“쇼는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아.”

“대충 감을 잡았겠죠?”

“충분해. 어서 숙소로 가자고. 시몬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네. 할 일이 많네요.”

어차피 숙소에 같이 머물 두 여자가 병원에 있어서 침실이 3개나 되는 별장형 숙소는 텅텅 빈 상태였다.

그런데 숙소에 도착한 필상과 이 대표는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시몬의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무슨 일이야? 시몬.”

“이거 좀 보세요.”

담담한 필상과 달리 이 대표는 즉각적인 대응을 했다.

필상이 모든 것을 결정하지만 경기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추후 상황을 주도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몬이 건넨 우편물 내용을 먼저 확인한 이 대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충 감을 잡았지만 필상은 이 대표가 건넨 그 내용을 차분하게 하나씩 확인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품어져 나온 강력한 기운으로 인해 이 대표와 시몬이 머리를 감싸 쥐는 현상이 벌어졌다.

그건 다름 아닌 살기(殺氣)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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