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15화 (315/354)

315. 지독한 통증

실로 냉정한 대처였다.

하지만 필상도 속이 편치는 않았다.

증거는 없지만 경찰들에게서 받은 느낌은 거대한 흑막이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평범한 여행객이었다면 자신은 이렇게 풀려나지 못했을 것이다.

즉각 대형 로펌 변호사가 출동해 법적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한 것은 필상이 가진 영향력, 그리고 이 대표의 현명한 대처가 즉각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태 언론이 끼어든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밖에 나오자 새까맣게 몰려든 기자들이 우르르 질문 보따리를 풀어놨다. 서 팀장이 나서 제지하는 가운데, 시몬이 필상의 눈치를 살폈다.

“시몬. 일의 전후사정을 있는 그대로 전해 주십시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제가 나서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아서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그는 감정적이지 않은 대처가 가능할 것이고 일방적인 주장으로 비치지 않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에 말려드는 것이 달갑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몬은 앞으로 나서더니 자신의 소개부터 했다. 소속과 이름을 밝히자 좌중은 그의 입에 주목하느라 조용했다.

그리고 누구나 깜짝 놀랄 표현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공 프로님은 시설물 무단 침입으로 연행되었습니다.”

-무단침입이라니요? 대체 폭군이 어딜 침입했다는 겁니까?

“여러분도 놀라실 겁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장소를 지명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이유는 보다 더 극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세계 최고의 골퍼가 영국에 와서 대체 어디를 무단으로 침입했는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원이 확실한 필상을 경찰이 출동할 정도였다면 굉장히 심각한 장소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만든 것이다.

모두의 궁금증이 극에 달할 무렵, 시몬의 입이 열렸다.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입니다!”

-네?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중요한 순간이지만 그 한마디에 바로 좌중은 술렁였다.

필드의 지배자인 필상은 그 코스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영국으로 오지 않았던가?

자신이 뛸 코스를 돌아보는 것이 죄가 된단 말인가?

물론 그들 대부분은 코스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코스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를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고 연행을 하다니!

“공 프로님은 미처 허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이라고 시인했고 기꺼이 보석금을 냈습니다.”

-보석이라니요?

“다툴 여지가 있지만 그럴 경우,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선의의 피해자라니요? 대회를 앞둔 이 중요한 시간에 연습을 하지 못하고 심적인 부담까지 가지게 되었는데 그냥 넘어간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법률 대리인인 저로서는 의뢰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쉽지만 오늘 일은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이만 정리하겠습니다.”

시몬은 그 말을 남기고 즉시 돌아섰다.

이후 당신들은 받은 느낌 그대로 기사를 써 달라는 암묵의 몸짓으로 보였다. 조금 심해 보였으나 더는 관여하고 싶지 않아 필상은 바로 차에 올라 숙소로 향했다.

시몬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으나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필상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숙소에 도착하자 이번 일은 신경 쓰지 말고 경기에 전념하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겠다면서 명함을 직접 건네고 돌아갔다.

‘좀 더 두고 보자!’

불가항력이라 판단했다.

자신의 예감을 따라 파고들면 어느 정도 윤곽은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 정도로 공룡을 잡을 수는 없다.

꼬리를 자르고 유능한 법률 지원을 받는다면 공치사가 될 가능성이 높아 차라리 연습에 전념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

물론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맞부딪치면 점점 더 강한 반작용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 스스로 포기하기를 바랐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퍼펙트.”

“선수 등록이 너무 늦었습니다. 어제 하려고 왔다가 딴 데 한눈이 팔리는 바람에. 하하하!”

다음 날 일찍 일어난 필상은 언제나처럼 조깅으로 아침을 열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린 필상은 아침을 간단히 먹고는 바로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대회 참가 선수 등록을 하기 위해서였다.

주최 측 인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와 필상을 반겼는데, 어제 벌어진 사건이 모든 언론에 도배가 되었음에도 누구 하나 사과하는 사람은 없었다.

필상도 대인배의 모습을 보이며 그냥 웃어넘겼다.

“정말 뻔뻔한 것 같아요. 어째 한 마디도 없을 수가 있죠?”

“대다수는 뒤늦게 알았을 거야. 이런 일은 여러 명이 작당할 수는 없거든.”

“누군지 알아내 족쳐야 하는데!”

“이미 언론의 집중 포화에 시달리고 있잖아. 내가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는 하겠지. 관련자가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게 문제지.”

본시 일은 그렇게 처리가 된다.

정작 책임질 놈은 싹 빠지고 엄한 사람만 당한다.

하지만 필상은 더 이상 그 문제에 관여할 의사가 없었다. 당장 눈앞에 다가온 대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 임 프로. 일찍 왔나 보네?”

“네. 아무래도 준비가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런데 어제 일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냥 살풀이 했다고 생각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연습이나 하자고.”

“아, 네.”

한국 선수가 6명이나 초청되었다.

필상을 필두로 임성재, 안병훈, 김시우, 강성훈, 그리고 제대 후에 다시 훨훨 날기 시작한 노승렬 프로가 포함되었다.

하나같이 첫날부터 필상을 찾아와 인사했고 필상은 기꺼이 그들과 함께 연습 일정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러 선수와 어울리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겨를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말 없이 연습에 전념하던 일상에게 또다시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조심해!”

연습을 마친 필상은 노곤한 몸을 차에 싣고 숙소로 향하던 길이었다. 서 팀장이 운전했고 미사키가 조수석에 앉았다.

그런데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필상은 갑자기 전신에 소름이 돋았고 그 즉시 운전하는 서 팀장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영문을 알지 못한 서 팀장은 대체 무슨 일이냐며 뒤돌아봤고 그 순간, 도로 우측에서 화물차가 튀어나와 정면으로 달려오는 것을 봤다.

순간 위기를 느낀 필상은 재빨리 행동을 취하고 싶었으나 뒷자리에 앉은 필상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그나마 위기를 느낀 서 팀장이 핸들을 급하게 틀어 방향을 바꿨고 필상은 달려오는 차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꽈아아앙!

결국 충돌을 막지는 못했다.

방향을 튼 자동차의 조수석 꽁무니가 화물차에 부딪쳤고 차는 맥없이 빙글빙글 돌다가 가로수를 들이박고는 멈췄다.

필상은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앞에 탄 두 여자가 무사하기만을 기도했다.

일요일 저녁 8시 반,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의 한가한 도로에서 일어난 이 교통사고는 삽시간에 방송을 탔다.

그 안에 골프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위대한 골퍼, 미스터 퍼펙트가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물차는 도망간 지 오래였고 흉하게 찌그러진 차량이 화면에 바치는 순간, 사람들은 크게 낙심했다.

손가락 하나가 골절되어도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한 것이 골프다. 그런데 눈에 비친 차량의 파손 상태는 그 정도에 그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전 공 프로님의 법률 대리인입니다. 제게는 정확한 상황을 알려 주셔야 합니다.”

“그게 좀…….”

시몬은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 달려왔다.

너무도 놀라 믿기지 않았지만 이미 사고 현장 화면이 모든 언론을 도배하는 중이었다. 디 오픈 참가를 위해 스코틀랜드 땅을 밟은 필상을 향한 언론의 관심은 안 그래도 뜨거웠다.

며칠 전 무단 침입 사건으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을 때, 필상은 모든 상황을 그냥 받아 넘겼다. 하지만 기자들은 얼토당토않은 일처리라며 강력히 비판했고 누군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더 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끔찍한 교통사고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뉴스와 함께 파손된 차량의 영상이 송출되면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담당의는 필상의 상태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안 되겠군요. 일단 환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잠깐만 기다리면 안 되겠습니까? 곧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옵니다. 1시간 뒤에 자세한 브리핑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어서 안내할 사람을 불러 주십시오.”

필상의 일행은 달랑 셋이다. 그런데 모두 사고로 입원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 대표가 도착할 때까지 모든 상황은 시몬이 주도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담당의는 필상의 상태를 전혀 언급하지 못했다. 환자가 이송된 지 이미 두 시간 이상이 경과되었기 때문에 지금쯤은 결론이 나와야 정상인데.

“일단 눈에 띄는 큰 외상은 없습니다.”

“외상이 없다고요?”

“네. 가벼운 타박상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는데, 보고 있는 저희도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깨어나지 않는 거죠?”

“아무래도 강한 충격에 의한 뇌진탕 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정밀 검사를 했고 그 결과를 분석 중입니다.”

차량 충돌은 인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한다.

아무리 튼튼하고 비싼 차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 탄 사람은 그 물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전신에 타박상이 생기고 뼈가 부러지며 운이 없을 경우에는 뇌에 이상이 생기기도 한다.

“여성분들의 상태는 보다 심각합니다. 화물차가 차량의 뒷좌석 부분을 때렸다는데, 뒤에 탔던 이 환자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지는 않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당신은 이분이 누군지 모릅니까?”

“아! 그런 말은 아니고 사고 규모에 비해 덜 다쳤다는 의미입니다. 안타깝지만 디 오픈은 포기해야 할 것 같고요…….”

의사도 필상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냥 대회 하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귀신이 곡할 일이 일어났다.

독립된 이 응급 공간에는 의사와 시몬 둘만 있었다. 아니,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필상도 누워 있기는 했다.

“누가 포기를 한단 말입니까?”

“폭군!”

“이거 좀 거추장스럽군. 치워 주시겠습니까?”

“아! 네.”

필상이 깨어난 것이다.

스스로 산소 호흡기를 떼어 낸 필상은 자신의 몸에 달려 있는 각종 의료기기와 링거를 제거해 달라고 말했다.

의사는 엉겁결에 필상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과연 자신의 행동이 적절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으나 그 또한 의미가 없었다.

왜냐면 필상이 상체를 일으키더니 스스로 침대에 기대앉았기 때문이다. 그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위였다.

아무리 가볍게 다쳤더라도 강한 충격에 온몸의 근육이 쑤시고 아파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 정말 지독한 통증이군요!”

“움직이지 마십시오. 일단 무리하면 안 됩니다.”

의사의 말에 동의하는지 필상은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시몬은 그 미소 안에 감춰진 고통을 느꼈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와중에 먼저 정신을 차린 필상이 의사에게 말을 걸었다.

“내 식구들은 어떻습니까?”

“한 분은 다리가 부러지셨고 한 분은 팔이 골절되었고 허리 상태도 심각합니다.”

“둘 다 목숨에 지장은 없는 거죠?”

“아! 네.”

“그럼 됐습니다.”

그 말을 한 필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기도 쉽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 숨을 돌린 필상은 그제야 시몬에게 인사를 건넸다.

“시몬. 또 다시 제가 번거롭게 해 드렸군요.”

“아, 아닙니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감사한 마음은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일단은 제가 원하는 대로 좀 해 주시겠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의사 분부터 나가게 하시고 우리끼리 대화를 나누시죠.”

“네.”

의사는 나가기를 거부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우겼지만, 당사자와 법률 대리인이 원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환자를 보고 오겠노라고 나름의 명분을 찾은 그가 씁쓸하게 퇴장하고 둘이 남자 필상은 첫 마디부터 충격적인 말을 던졌다.

“이건 심각한 범죄입니다.”

“고의적인 사고라는 확신이 있으신 겁니까?”

“네. 저뿐만 아니라 내 식구들에게도 손을 뻗친 저들을 더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굉장히 큰 싸움이 될 것이고 부담도 클 텐데 함께할 용의가 있습니까?”

“저는 이미 한 배를 탔습니다. 도중에 배에서 내리는 비겁한 인간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에 주춤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시점인 것을 자각한 시몬은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더니 이내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에게서 진심이 느껴진 필상은 다음 상황에 대한 언급을 시작했다.

“사고 현장 주변의 CCTV는 모두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 차 뒤를 따라오던 SUV가 한 대 있었는데 차량 번호는…….”

일단 화물차를 찾아도 운전자는 체포하기 힘들 것이라고 봤다. 설사 체포해도 고의적인 사고가 아니라고 우길 것이고.

하지만 위급한 사고 당시의 주변 상황을 필상은 모두 기억해 냈다. 저 멀리 반대편 차선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 번호도 2개나 시몬에게 알려 줬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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