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무단침입
“어서 오세요!”
“오래 기다렸나?”
“할 일이 많아 지루하지는 않았어요.”
“할 일?”
“인터뷰요.”
“아!”
드디어 필상은 디 오픈이 열리는 영국 땅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서 팀장과 미사키가 마중 나왔고 기자들이 눈에 띄지 않아 의아했는데, 이미 기자회견장에 대기 중이었다.
이미 메이저 대회에서 6연승을 거뒀다.
그것만으로도 경천동지할 대기록인데, 스스로 못을 박았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이 남았고 골프 팬들의 이목은 당연히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 자신을 믿고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극적인 데뷔 후에 도저히 믿기 힘든 연승을 이어오셨는데, 스스로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부모님이 잘 낳아 주셔서 그렇겠지요. 하하하!”
늘 진지한 필상의 입에서 나온 농담에 다들 크게 웃었다. 하지만 농담은 거기까지, 필상은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재능을 타고납니다. 저는 골프가 제 운명이었던 것이죠. 그걸 모르고 직장 생활을 했는데,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전 잘렸습니다.”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떠올리기 싫은 악몽이었지만 이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문한 기자는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저희 골프 팬들 입장도 그렇고 프로님도 그 경영자 분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겠군요?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를 범죄자로 낙인찍어 쫓아냈으니까요. 여하튼 그게 제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가 되었고 제 운명을 만난 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구나 최선을 다하는데, 난 왜 안 되냐고 묻는다면 운명이 아니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 다시 한 번 스스로 돌아보시기를 권합니다.”
상투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같은 말도 누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어떤 자세로 했느냐가 중요하다.
사실 오늘 인터뷰는 다룰 내용이 많지 않았다. 워낙 분명한 목표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신선할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필상의 인터뷰 내용은 삽시간에 쫙 퍼졌다. 무엇이든 화젯거리가 필요했던 언론이 필상의 편에 확실히 섰음을 알 수 있었다.
‘운명과 같은 골프 인생, 경험이 일천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운명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는지가 관건일 뿐!’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고 있는 그가 부러운가? 그렇다면 스스로 돌아보라!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횡령과 배임? 누가 필드의 지배자를 범죄자로 몰았는가! 죄는 괘심하지만 난 감사를 표한다. 그가 있어 행복하니까!’
운명을 운운했던 기자회견을 마친 필상은 곧장 경기가 열리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로 향했다.
전 세계 골퍼들의 일생일대 버킷 리스트이자 성지 순례지라고 해도 무방한 600년 전통의 골프클럽. 골프코스가 왜 18홀이냐고 물으면 여기가 그렇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골프의 발상지인 그곳으로 향하는 필상의 마음은 들떴다. 이미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첫 방문이기 때문이다.
오거스타내셔널도 그랬지만 자신감과는 별개로 모든 골퍼는 익숙하지 않은 링크스 코스에 적응하는 것이 우선이다.
비슷한 구조를 지닌 코스에서 연습을 했고 충분한 준비를 했지만 실전은 그와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가슴이 뛰었다.
할 필요가 있다. 자신감과는 별개의 문제다.
“우와! 무슨 골프장이 이렇죠?”
급기야 세인트앤드루스 골프클럽에 도착했다.
첫 느낌은 미사키의 탄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은커녕 언덕조차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이었기 때문이다.
인접한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매달린 시큼한 냄새가 해안가라는 것을 말해 줄뿐, 여타 명문 코스를 방문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너무 기대가 컸던가?
하지만 묵묵히 코스를 향해 걸었고 그 뒤를 졸졸 따라온 미사키도 필상이 느낀 감동을 공유하는 것 같았다.
“아름답군!”
미(美)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여러 코스를 경험해 본 필상의 가슴에 서서히 밀려든 감정은 하나였다. 세인트앤드루스는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다.
왜냐면 수백 년에 걸쳐 자연이 만들어 낸 있는 그대로의 코스였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정성이 곁들여지기는 했으나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유명한 페블 비치나 오거스타내셔널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고고한 세월의 흔적이 코스 곳곳에서 묻어났다.
“이게 그 유명한 직벽 벙커로군!”
“가급적 빠지지 말아야겠어요.”
“그래야겠어.”
통상적인 벙커와 달리 수직 벽면을 가진 벙커는 때로 정상적인 샷이 불가능하다. 벙커 턱 바로 아래에 공이 박히면 원하는 방향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꺼내야만 한다.
무리한 공략이나 미스 샷은 철저하게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이 코스 곳곳에 지뢰처럼 포진되어 있었다.
“이런 게 112개나 된데요.”
“하하하! 한두 번은 어쩔 수 없겠네.”
조심하겠지만 천하의 필상도 그 마수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연습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평지에 조성된 링크스 코스는 페어웨이와 러프의 구분이 쉽지 않다. 단지 잔디의 길이로 구역을 구분할 뿐, 그날그날 잔디를 어떻게 자르느냐에 따라 페어웨이가 달라질 수 있다.
언제든 잔디만 짧게 자르면 페어웨이가 더 넓어질 수 있는 반면, 단기간에 자라지는 않기 때문에 좁히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인지 대회를 앞두고 있는 지금은 페어웨이가 극히 좁은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터프한 코스의 잔디를 직접 만져 보고 뜯어본 미사키는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사용했다.
“면도하지 않는 털 많은 남자의 턱을 보는 것 같아요.”
“하하하! 흑돈은 평생 그린이 될 수는 없겠어.”
“그러니까요! 아침에 면도를 해도 점심때만 되면 따갑다니까요!”
“대낮부터 볼을 비비니까 그러지. 하하하.”
잔디가 굉장히 촘촘하고 질겼다.
정확한 임팩트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비거리가 들쑥날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전 잔디 적응에 많은 정성을 들여야 함을 의미했다. 벙커도 그렇고 잔디에도 적응해야 하고 우승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가슴 뿌듯한 상황도 있었다.
“직원들이 달려오다가 그냥 돌아갔어요.”
“고맙네.”
아직 대회 선수 등록도 하지 않았다.
신비롭게 느껴지는 코스를 보자 마음이 끌렸기 때문에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대회가 열리는 코스는 당연히 출입이 통제 중이다. 잔디를 보호해 최상의 상태로 개장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돌연 웬 남녀가 코스에 난입을 했으니 직원들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필상을 알아보고는 잠시 주저했다.
그리고는 못 본 체하며 돌아섰다. 주최 측에 통보해 조치를 받지 않고 임의로 돌아간 것은 그들의 직무에 어긋난 행동이다.
하지만 자신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흐뭇해하며 코스를 천천히 돈 필상은 코스 곳곳을 차곡차곡 살폈는데, 16번 홀에 도착할 무렵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이 와요.”
“경찰?”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일단 기다렸다.
딱히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가온 경찰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신분증을 제시하십시오.”
“신고요?”
“무단 침입한 현장을 저희가 직접 확인했으니, 일단 경찰서로 동행하셔야겠습니다.”
“……갑시다.”
“프로님. 가긴 왜 가요? 우리가 뭘 잘못 했다고!”
“미사키. 진정해. 이들에게 괜한 빌미를 줄 필요는 없어.”
미사키는 펄쩍 뛰었지만 필상은 그녀를 진정시켰다.
이 경찰들은 자신을 모르지 않는다.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위해 영국에 도착한 소식은 이미 모든 언론에 소개되었다.
서양인들이 동양인의 외모를 헷갈려 한다지만 필상을 못 알아볼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서까지 동행하자는 것은 이미 작정하고 왔음을 의미했다.
무단 침입?
그냥 돌아간 경비들은 곧바로 관련 사실을 통보하고 나갈 것을 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며 우쭐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이게 어디 경찰까지 동원할 문제인가?
제 볼일 보던 서 팀장이 깜짝 놀라 달려와 다시 한 번 강하게 어필하려 했으나 필상은 얼른 그녀의 행동을 말렸다.
“서 팀장. 당장 이 대표에게 전화해서 법률 지원을 요청해.”
“이건 정말 말이 되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흥분하지 말라고. 강하게 거부하면 할수록 이들의 마수에 말려드는 거니까 유능한 변호사부터 섭외하라고!”
그제야 서 팀장도 감을 잡았다.
작은 꼬투리지만 반항하는 순간, 그걸 빌미로 더 큰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다. 그 어떤 것도 확신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단 차분하게 상황을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부터 악의를 가지고 달려왔다면 이들의 의도에 말리지 않는 것이 중요했고 합법적인 절차를 준수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신고된 죄목은 무겁지 않다.
유능한 법률 대리인만 있으면 금방 해결될 사안인 것이다.
“한 가지 확인 좀 합시다.”
“뭡니까?”
“정당한 권리를 위해 이 모든 과정을 녹화하고 싶은데, 가능합니까?”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좋습니다. 변호사가 올 때까지 일단 기다리죠. 갑시다!”
흥분하지 않는 필상의 담담한 태도에 경찰들이 오히려 위축되었다. 게다가 변호사가 온다는 말에 더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경찰과 함께 이동하는 사이,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허용하지 않았으나 모든 과정은 자연스럽게 녹화가 되었다.
“공 프로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왜 경찰이 연행을 하는 거죠?”
“이보세요. 경관! 저분이 누군지 모릅니까? 현행범이 아니면 이렇게 체포할 수 없는데, 이건 정말 합법인 거 맞나요?”
기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벌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고 경찰서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수십 명을 넘어섰다. 때문에 필상은 물론 뒤따라온 서 팀장도 걱정을 한숨 덜었다.
수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는 까닭에 불합리한 대접을 받을 가능성은 확 떨어졌기 때문이다. 중계 카메라를 동원한 방송까지 합류하는 사태로 번지는 순간, 필상은 비로소 안도했다.
“변호사가 오기 전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며 과연 우리가 저 유치장에 들어가는 것이 맞는지 다시 한 번 재고해 주면 좋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처음에는 유치장에 넣으려고 했다.
현행범은 분명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나 그게 과연 적절했는지 따진다면 그 책임을 지는 게 부담스러웠는지, 변호사가 도착할 때까지 둘은 휴게실에서 기다렸다.
“대체 왜 이러죠?”
“나를 곱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는 것 같아.”
“안티 팬은 늘 있지만 그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요?”
“그러니까 단순한 안티 팬은 아니라는 거지.”
그 말에 담긴 의미는 의미심장했다.
미사키는 여전히 감을 잡지 못했지만 필상은 문득 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US 오픈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놈을 응징한 그녀가 왠지 불길하다는 말을 했었다.
그 기억이 하필 지금 떠오른 것이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자신을 방해하거나 망가지기를 바라는 세력,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또렷하게 가리키는 대상은 하나였다.
단 한 번도 제지를 받은 적도 없이 무럭무럭 세력을 넓혀 온 스포츠 베팅업체들, 이미 검은 공룡이 된 그들이 필상의 인터뷰 이후에 만인의 지탄을 받고 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묻힐 텐데, 도둑이 제 발 저린 걸까?
“일처리가 늦어져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성가시게 한 것 같아 오히려 제가 좀 쑥스럽군요.”
“이게 제 일이니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저는 시몬이라고 합니다. 그 유명한 로펌, 클리포드 찬스 소속입니다.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고 신뢰하셔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 그렇군요. 든든합니다.”
“평소 존경하는 프로님을 만나 영광스러워야 할 텐데, 불미스러운 일로 뵙게 되어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표를 통해 일처리를 위해 달려온 이는 의외로 젊은 변호사였다. 글로벌 대형 로펌 소속으로 그에게서 받은 느낌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함이었다.
일단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차후 필상이 직접 나설 일은 없도록 깔끔하게 일을 처리한 시몬은 변호사 특유의 거만함은 보이지 않고 시종일관 겸손한 자세를 보였다.
이 대표가 역시 사람을 잘 선택한 것 같았다.
“일단 나갑시다.”
“혹시 연행 과정이나 이곳에서 불합리한 일을 겪지는 않으셨습니까?”
일부러 다들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한 이유는 일종의 경고의 의미도 포함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웃음이 절로 났지만 필상은 경찰서 내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미사키는 뭔가 불만이 채워지지 않은 것 같았으나 어쩔 수 없이 필상을 따라 나왔다.
“프로님. 괜히 억울한 이 느낌은 대체 뭐죠?”
“억울해도 우린 이방인이야.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들이댈 수 없지. 일단 참아.”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