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13화 (313/354)

313. 고마우이

단조라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실제 프로들 중에도 일관성이 높은 주조 아이언을 사용하는 숫자가 점차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만큼 과학적인 분석에 따른 클럽 제조 기술이 발전했다는 의미로, 흔히 알려진 단조의 장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단조 아이언의 느낌이 주조보다 좋다. 특히 공을 임팩트 하는 순간의 느낌은 훨씬 더 부드럽다!’

이런 말을 흔히 하지만 같은 모양과 무게, 동일한 로프트와 무게중심, 샤프트와 그립을 지닌 단조와 주조 클럽을 구분할 수 있는 골퍼는 1%도 되지 않는다고 밝혀졌다.

더 부드러운 탄소강을 사용하기 때문에 임팩트 시에 그 경도의 차이를 느낀다는 것부터 관념적인 사고일 뿐, 실제 그 차이를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분석도 있다.

“주조 클럽을 만드는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그 선두에 저희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요. 하하하!”

“아! 그렇습니까?”

필상은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사실 주조 아이언의 발달은 그들만의 기술이 아니다. 신소재의 활용도가 높아지면서 통상적인 흐름이라고 봐야한다.

정작 필상이 필요한 것은 단조 아이언의 제조 기법인데, 이들만이 가진 장점을 파악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제련 기술은 사실 한반도를 통해 섬나라로 건너온 것이다.

필요에 따라 장인 정신을 가지고 발전시켜 온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게 마치 대단한 비밀인 양 뻐기는 모습은 같잖았다.

“명품을 만들기 위해 수만 번을 두드린다고 하던데, 그 장관을 직접 보고 싶군요.”

“아! 뭐니 뭐니 해도 저희 야마모토의 자랑은 바로 명품 단조를 제련해 내는 것이죠. 그럼 가 보시겠습니까!”

필상의 주변에는 회사 간부들이 겹겹이 둘러싼 채 견학에 동참했다. 그들 중에는 자신들이 가진 기술의 장점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았다.

필상보다 더 감탄하면서 구경하는 걸 보니까!

그러나 다 둘러본 무렵 필상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왜냐면 특별할 줄 알았던 이들의 기술력은 골프필드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겨우 이 정도였던가?’

실망스러웠다.

핵심은 빠뜨린 게 아닌지 의구심을 품었으나 직접 완성된 다양한 제품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시타까지 해 본 필상은 자신이 기존 회사들을 너무 높이 평가했음을 알게 되었다.

“제품의 일관성이 상당히 떨어지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마추어들은 이 클럽들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저는 이 2개의 클럽을 빼고는 다 함량 미달이라고 생각합니다.”

“불량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시타를 위해 준비한 웨지는 무려 12개였다.

나름 고르고 골라 좋은 것만 모아 뒀는데, 필상이 평가절하를 하자 삽시간에 분위기가 삭막해졌다.

하지만 필상은 마음에 차지 않는 제품들을 하나씩 들어 보이며 각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표시된 로프트 각도가 맞지 않는 것도 있었고 같은 번호의 웨지인데도 무게가 다른 것도 있었다. 게다가 탄소강의 함량에 차이가 있다는 말은 확인되지는 않지만 실험 기구를 통해 공이 날아가는 거리와 회전량을 측정해 본 결과 차이가 났다.

특히나 클럽마다 그루브의 간격과 깊이가 일정하지 않아 도중에 클럽을 바꿀 경우, 심각한 오차가 생길 수도 있음도 확인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 그냥 가시는 겁니까?”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잘 보고 알게 되었으니 천천히 고심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당장 계약할 수 없음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확언을 주거나 이면 계약이라도 약속하는 줄 알았는데, 필상이 그냥 일어서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보였던 자부심은 어딜 갔는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골프백을 하나 가져와 건넸다. 그 안에는 야마모토가 자랑하는 클럽이 담겨 있을 테고.

그냥 선물이라고 하는데, 나중에라도 품질을 확인해 달라는 의미였고 인연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액션이었다.

* * *

“어허! 겨드랑이가 너무 벌어져!”

“아! 오라버니!”

볼일을 마친 필상은 봄이 출전하는 니폰햄 레이디스 클래식이 열리는 지반 현의 한 골프코스에 도착했다.

사실은 더 긴 일정이었고 다른 곳도 들릴 예정이었으나 방향을 틀어 그냥 봄을 살피기 위해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오는 줄 몰랐던 봄은 필상의 잔소리를 듣고는 한달음에 달려왔다. 환한 미소를 짓는 것까지는 좋은데, 여전히 남자처럼 긴 검정바지에 바람막이를 입은 투박한 모습이었다.

그게 좀 안타깝게 여겨진 이유는 봄은 사실 꽤나 예쁘고 귀여운 외모인데, 너무 선머슴처럼 가꾸지를 않기 때문이다.

“어땠어요?”

“잘됐고. 넌 오늘 잘 쳤어?”

“네. 대충 감은 잡았어요.”

“그럼 나랑 어디를 좀 가자.”

“어디요?”

필상이 봄과 같이 뭘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어디든 같이 가자는 말에 그녀의 얼굴은 박꽃처럼 화사하게 빛이 났다.

설사 지옥 훈련이라도 필상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따라갈 것 같은 기세였다. 어딜 가느냐고 자꾸 물었지만 필상은 휘적휘적 앞장서서 걷기만 했다.

주차장에 이르자 봄의 표정은 하늘을 걷고 있었다.

“차타고 나가는 거예요?”

“응.”

“아직 배가 고프지는 않은데……. 아무렴 어때요? 뭐든 다 잘 먹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크크크.”

“자꾸 바보처럼 웃지 마. 무슨 여자애가 그런 웃음을!”

“치! 언니가 이럴 때는 구박하지 않으면서!”

“알았다. 알았어!”

필상은 그녀를 데리고 시내로 나갔고 대형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화점에 있는 음식 코너로 가는 줄 알았지만 필상이 의류 매장으로 향하는 모습에 주춤거렸다.

여성 의류 매장이었기 때문이다.

“여긴 왜요?”

“오늘 내가 옷 사 줄 테니까 제발 예쁜 걸로 골라 봐.”

“……정말이죠?”

“그래. 내 신용카드 한도 내에서 팍팍 골라 봐.”

“한도가 아마도 무제한일 텐데요?”

“그, 그래? 여하튼 마음에 드는 거 얼른 골라. 여성 의류 매장에 오래 있는 게 잡히면 누구한테 혼날지도 모르니까.”

“흐흐흐. 알았어요.”

봄은 의류 매장을 거의 날아다녔다.

정말 팍팍 골라 매대 위에 놓는 것을 보니 살짝 걱정은 되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모자를 팍 눌러 쓰고 왔는데도 이미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필상은 조용히 봄에게 다가가 카드를 찔러줬다.

“왜요?”

“저기 봐. 난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니까 다 사면 이걸로 계산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네! 오라버니.”

미안했다.

이 작은 호의에도 이렇게 환한 미소를 보이며 좋아할 줄 알았다면 진즉에 더 잘해 줄 것을.

적절한 선을 지킨 지 오래되었는데도 자신이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매장을 빠져나와 비상계단으로 내려오던 필상은 모모코에게 전화 걸어 이실직고했다.

어차피 알게 될 것이고 이젠 봄에게 좀 더 잘해 줘야겠다는 말을 꺼냈는데, 의외로 모모코도 흔쾌히 동의했다.

‘좀 더 일찍 그랬어야 해요!’

“그랬나? 내가 너무 무심하기는 했지. 옷 몇 벌 사준다고 아주 난리가 났어.”

‘사 주는 건 좋은데, 나도 똑같이 사 줄 거죠?’

“당연하지. 더 많이 사도 괜찮아. 내가 돈을 버는 이유가 다 당신을 위해서잖아.”

‘흐으으……. 수미 것도 살래요.’

모모코는 늘 필상을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전에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넉넉한 마음을 보였는데, 아주 민감한 봄에 대한 견해도 필상이 생각하는 이해의 폭을 훨씬 넘어섰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영국으로 건너가는 겐가?”

“네. 가기 전에 뵙고 상의 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차 마시겠는가?”

“네. 감사합니다.”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아침, 필상은 사토시 회장을 만났다. 일본에 건너온 목적을 보다 확실히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역시 필상의 생각을 알고 있었는지 비서를 부르더니 서류를 한 다발 내놨다.

“이게 다 뭡니까?”

“자네가 필요한 것일세.”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그동안 관련 자료들을 모아 오셨나 봅니다.”

“그렇지. 난 이게 언젠가 큰돈이 된다고 생각했거든.”

필상의 의도를 빨리 알아챈 이유가 드러났다.

흔히 말하는 돈놀이를 주로 하지만 골프를 좋아해 일본 골프 협회장을 몇 번이나 역임했던 그다.

좋은 코스를 몇 개 보유했고 골프 관련 여행사와 호텔과 콘도도 운영하며 골프웨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언젠가 골프 용품에 손을 댈 시기를 저울질하며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습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난 내가 이룬 것들을 봄한테 물려주고 싶네. 아들이 있어도 제대로 된 녀석이 없어. 내가 다 잘못 가르친 대가지만.”

전에도 들은 바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싫다는데, 천만금이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데 드디어 서광이 비쳤다.

봄이 처음으로 부친에게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골프 관련 사업은 봄이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그걸세. 난 지주회사인 사쿠라 재단을 정리하고 새로운 회사를 창립할 걸세. ‘골드스프링’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합 골프 레저 기업으로.”

골드스프링은 봄의 한국명 ‘김봄’의 영어식 표현이다.

회사명을 들었을 때 가슴이 쿵쾅거린 이유는 조금만 새겨 보면 김(金)이라는 성을 유추할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봄의 등장을 필두로 그가 드디어 가문의 뿌리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계기가 될 것인가? 지레짐작일 수도 있으나 절대 가벼운 결정이 아니라는 생각에 괜히 필상이 긴장되었다.

“난 딸에게 주지만 내 딸은 자네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으니 결국 자네가 다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하하! 지나친 추론이십니다. 전 제가 땀 흘려 번 것이 아니라면 취할 용의가 전혀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인간의 욕망을 가벼이 보지 말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면전에서 털어놓은 것부터가 이미 필상을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뜻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필상도 담담하게 향긋한 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서로가 할 말은 많지만 굳이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어서기 전 그는 못 다한 속내를 밝혔다.

평생 누구에게고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도와주게!”

“이미 부녀지간에 상당한 관계의 진전이 있는 것 같던데, 굳이 제가 나서야 합니까?”

“아직은 설익어서 그러지. 아니, 어쩌면 평생 달라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내가 자네에게 이렇게 청을 하는 걸세.”

“가르치라는 말씀이십니까?”

“총명한 아이일세. 의욕만 가진다면 내가 평생 얻은 것들을 단기간에 쉽게 이해하고 집행할 수 있을 것이네.”

“으음……. 그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아주 똑똑하죠. 누굴 닮았는지 고집도 대단하고요. 하하하!”

“도와준다니 고마우이.”

돕겠다고 시인하지 않았으나 서로의 마음이 통했다.

때문에 필상이 생각한 최적의 방안을 풀어놨고 사토시가 자신의 생각을 보태 ‘봄 회장 만들기’의 구도를 짰다.

일단 봄을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해 전문가를 붙여 곁에서 보필하면서 하나씩 가르치도록 필상이 나서 권유하기로 했다.

그래서 사토시 회장이 이런 날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측근 한 명을 데리고 함께 나왔고, 봄의 1라운드 경기를 관전하면서 그녀의 깜냥을 짚어 봤다.

봄의 심복이 될 32살인 그녀의 이름은 사츠키였다.

“일단 소속을 J&L로 합시다. 이 대표에게 얘기를 해 놓을 테니까 그녀의 현장 매니저로 친분부터 쌓으십시오.”

“감사합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골프는 좀 압니까?”

“원래 좋아하는 운동이고 프로 선수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름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필상보다 두 살이 어리지만 굉장히 원숙하게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마치 깐깐한 과외 선생님 같은 이미지가 느껴졌다.

짙은 뿔테 안경에 노블레스한 정장 탓인 것 같았다. 또한 얼핏 보면 이 대표랑 이미지가 얼추 비슷하기도 했다.

명문대 출신의 커리어 우먼, 물론 자세한 것은 알 필요가 없어 당장 그녀의 역할에 맞는 세팅부터 시작했다.

“일단 보다 캐주얼한 옷으로 갈아입으면 좋을 것 같은데, 혹시 준비가 되었나요?”

“네. 차 트렁크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투도 보다 상냥한 스타일이 낫지 않을까요?”

“네. 그렇게 할게요. 공 프로님.”

“하하하! 용의주도하군요. 그럼 환복부터 하고 오세요.”

사츠키가 떠나자 필상은 이 대표와 먼저 통화해 조치를 취한 뒤에 봄의 현장 매니저인 방승아를 호출했다.

어차피 근처에 있지만 엄청나게 몰려온 갤러리들의 울긋불긋 복장 때문에 누군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나타난 그녀의 주변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역시 선수의 매니저로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에 직접 통보하지 않고 이 대표에게 전화를 하라고 전했다.

그런데 잠시 소란을 피해 통화를 하러 간 그녀는 이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보직 해임을 당해 본사로 갔을 텐데, 차후에는 현장에서 근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멋지네요!”

봄은 1라운드부터 펄펄 날았다.

언제 확인했는지 샷을 마치고 나면 필상을 향해 손까지 흔들었다. 필상이 사 준 귀여운 스타일의 옷을 입었는데, 너무 깜찍했다.

일본 여성들의 대체적인 스타일 같았다.

괜히 모모코가 떠올라 필상은 일찍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 전에 사츠키에게 꼭 전할 것을 알려 줬다.

“회장님께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얕은 수를 쓰지는 마십시오. 가능하다면 정확히, 그리고 진솔한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겁니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