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12화 (312/354)

312. 단조와 주조

“일단 식사부터 하자고.”

“그러죠. 사토시 회장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괜찮죠?”

“아! 하루의 아버님?”

“네. 저와는 이런 저런 인연이 꼬인 분이죠. 하하하!”

미켈슨은 그를 알고 있었다.

만난 적은 없지만 꼭 필요할 때 적잖은 도움을 줬다고 했다. 일본에서 봄이 이즈카 하루라고 불리기 때문에 당사자를 앞에 두고도 일본 이름을 부른 것은 아쉬웠다.

외국인인 그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여하튼 오랜만에 만난 미켈슨, 봄과 함께 거하게 먹기 위해 신주쿠에 위치한 유명 코스요리점으로 향했다. 예약이 필수라서 걱정했지만 필상이 들어서자 전 직원이 나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퍼펙트!”

“아!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요?”

“사토시 회장님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언제나 신선하고 맛있는 최고의 음식으로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하하하!”

아예 2층 특실을 비워뒀다.

필상이 알기로 특실은 아무에게나 내주지 않을뿐더러 한 달 전에 예약해도 구하기가 힘들다. 역시 사토시 회장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일본 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이제는 기분 좋게 느껴졌고 좀 더 호의를 가지고 관계를 개선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배울 것이 많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얼굴 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군. 공 프로.”

“다 염려하고 격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허허허. 공치사는 그만하고 어서 앉게.”

그는 이전과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평생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꺾지 않고 성공한 그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낯빛부터 달라졌다.

“어르신의 건강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나?”

“네. 제가 한의학에 관심이 좀 있는데, 이전보다 기의 흐름이 좋아지셨고 혈색도 아주 좋아 보입니다.”

“이게 다 자네가 봄을 살려 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봄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가고 있는 겁니다.”

“허허! 이 친구하고는!”

한때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상과 봄을 묶으려고 했다. 남녀 사이는 부부가 아니면 무조건 불륜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극히 위험했다.

그걸 진즉에 알아차린 필상이 강하게 경계했고 반감을 가질 만한 사건도 있었지만 이젠 다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봄이 직접 확실하게 선을 그었고 필상의 확고한 뜻을 인지한 그가 결국은 포기했다. 결코 간단한 과정이 아니었기에 필상과의 관계가 어색하게 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봄이 점차 건강해졌고 그가 좋아하는 골프를 통해 큰 성취를 이루자 완고했던 생각은 눈이 녹듯이 사라졌다.

오히려 도와줄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필상이 아예 일본에 발을 끊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덕분에 미켈슨의 사업을 측면에서 지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식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그는 필상의 일정을 확인하고는 눈이 반짝였다. 특유의 감이 작동한 듯.

“야마모토에 간다고?”

“네. 야마모토사의 단조 웨지가 하도 좋다고들 해서 직접 한 번 보려고요.”

“어디든 보내 달라고만 하면 싸매고 달려갈 텐데…….”

“그렇기는 하죠. 하하하!”

잠시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던 사토시는 곧바로 사안의 본질을 파고들었다. 망설이거나 돌려 말하지 않았다.

“직접 일본까지 건너온 이유가 혹시 클럽 제조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인가?”

“네. 어르신의 깊은 안목 앞에 어설프게 감추는 것은 불가능하군요.”

“그렇다면 내가 좀 도와줘야겠군!”

뜻밖의 말에 필상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도움을 생각한 적이 없고 크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가 나선다면 일의 성사 여부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성공 가능성이 월등히 올라갈 것이고 일을 진행하는 과정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런데도 선뜻 감사를 표하지 못했다.

노회한 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사업가인 그가 그에 어울리는 거래를 제안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치 필상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허허롭게 웃으며 딴청만 부렸다.

”이제 골프용품도 일본의 시대가 저물겠군!”

“그리 생각하시는 근거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자네도 이미 다 파악하고 있잖은가! 일본이 팔고 있는 대다수의 명품들이 실제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

“하하하. 부끄럽게도 저는 이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오랫동안 한일의 경제 구조가 어떠했는지 극명하게 보여 주는 단면이지. 반도체, 가전, 조선업 등이 그러했듯이 선도적이던 일본의 안일한 대처는 한국인들을 무시한 대가라고 봐도 될 걸세.”

“세월이 본연의 위치를 찾게 만든 건 아닐까요?”

필상의 생각은 그게 양국의 원래 위치라는 것이다.

조선말 정치적 불안과 세계정세에 부응하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을 뿐,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지금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짚었다.

비록 둘로 갈린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쪽의 한민족은 일본을 따라잡았다. 식민지 수탈과 전쟁의 참화를 딛고도 70년이 지나자 일본인들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었다.

뒤쳐졌던 세월이 어언 100년이지만 한민족은 그들에게 문화를 전해 주고, 한반도에서 밀려난 세력이 건너가 중추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 문명을 선도한 은덕의 대상이다.

역사를 오역하고 궤변만 늘어놓는 일본이 고대 유물들을 고증하기 두려워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밝히면 밝힐수록 그 근본이 한반도를 향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허허! 자네 말이 틀리지 않아. 최근 두 나라가 피 터지게 싸우는 광경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데, 머리칼이 쭈뼛 서는 일이 잦아지더군!”

“객관적인 시야를 가지기 어려우셨을 텐데요.”

젊은 세대와 달리 일제를 몸소 경험한 그로서는 평생 세뇌된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우월한 일본에 비해 미개한 한국인.

먼저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한국을 가엾게 여겨 황국신민으로 살게 했으며 근대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왔다는 개 같은 주장을 한다.

목숨을 내놓고 독립을 위해 뛰어든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더 악랄한 일제 앞잡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자신의 부귀영화와 영달을 위해 조선인이 나서서 조선인을 핍박하는 광경을 흔히 봤던 당시를 살았던 이들은 실제 일제가 퍼트린 주장을 믿었다.

한국인들은 개으르고 감정적이며 이중적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하지만 단점은 과장되었으며 더 많은 장점을 지녀 기필코 저들을 따라잡지 않았던가!

“기왕 할 거면 싹 쓸어버리게.”

“하하. 어르신께서 도와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필요한 것들을 파악하는 족족 보내라고 함세.”

“아직 구도를 잡는 중인데, 혹시 제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의 노고에 대한 대가를 언급한 것이다.

사업가인 그가 아무 소득도 없이 자신의 힘을 쏟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토시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지 피식 웃더니 곁에 앉은 자신의 딸, 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치 네가 원하는 것은 없느냐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리 없는 봄은 생뚱맞은 반응을 보였다.

“왜요?”

“이거 생각보다 덩어리가 커.”

“그래도 전 관심 없어요.”

딸의 냉담함에 실망할 만도 한데, 사토시는 허허 웃었다.

하기야 다른 자식들을 다 제치고 자신의 후계자로 봄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공공연히 밝혔지만 천문학적인 재산에 대해 봄은 관심조차 보이지 않을뿐더러 거부했다.

그러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필상에게로 고개를 돌린 그는 단번에 의표를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사업이 추진되면 가장 큰 지분은 누가 소유하게 되는지 물어도 되겠나?”

“현재로서는 모모코가 일대 주주가 될 겁니다.”

“언니가요?”

역시 노회한 사업가였다.

정확한 상황을 알 리 없지만 필상의 아내, 모모코가 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기준임을 알고 있었다.

필상은 이 대답의 중요성과 향방도 예측되었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쌩을 가던 봄이 단번에 반응을 드러냈다.

사토시는 더 이상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이후 진행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입가에 진한 미소를 담은 채로.

“응. 본인이 원하더라고. 자신이 만든 클럽을 쓰고 싶다나?”

“그럼 저도 끼워 줘요.”

“그건 어렵지 않지.”

“똑같이. 언니랑 똑같이 투자할 거예요.”

“너 능력은 돼?”

“어, 언니가 얼마나 투자하는데요?”

물론 그건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절대 적지 않을 것이다.

모모코는 이미 여러 해에 걸쳐 거액을 벌었지만, 봄은 상황이 다르다. 현재 일본 여자 골프 최고의 선수지만 이제 막 떠오른 신성이라서 모은 돈이 많지는 않다.

혼자 쓰기에는 턱없이 많지만 대주주로 투자할 거액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추론하기 어려워 필상이 쉽게 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애가 달은 봄은 옆에 앉은 자신의 아빠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그러더니 한다는 말이.

“여기 무한 대출이 가능한 제 담보가 있으니까 얼마든 말만 하세요!”

“봄!”

“허허허! 괜찮네. 딸아이가 내게 뭔가를 기대는 게 얼마 만인지……. 난 그저 기쁠 뿐이네.”

“알겠습니다. 모모코와 상의해 결정하겠습니다.”

모모코와 상의한다는 말에 봄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아쉬워했지만 강한 반발은 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는 수긍한 것이다.

오히려 사토시 회장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그도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필상은 모모코가 기꺼이 동의해 줄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그 말은 삼켰다.

[세계 최고의 골퍼, 폭군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야마모토 본사에 방문한 필상은 정문에 게시된 커다란 플래카드를 보며 쓴웃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들은 마치 필상과의 계약에 회사의 사활이라도 건 것처럼 깍듯하고 열렬한 환영 행사를 준비했던 것이다.

직원들이 모두 꽃까지 들고 맞이하는 광경은 마치 유신 시대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귀국한 선수들을 맞이하려고 국민들을 동원한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속이 시커먼 늑대의 방문인 줄도 모르고 자신을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노라니, 미안한 감정도 없지 않았다. 실제 필상의 팬도 있는 것 같아 께름칙했지만 욕망을 숨기지 못하는 간부들의 태도를 대하자 그런 마음은 팍 수그러들었지만.

“어느 게 단조인지 맞춰 보시겠습니까?”

회사 전무라는 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던진 질문이다.

기술자 출신이라서 자신들이 만든 제품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모습은 흉하다기보다는 보기 좋았다.

하지만 다분히 도발적인 그의 행동을 그냥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 질문은 꽤나 까다로운 과제였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단조와 주조의 차이가 쉽게 구분됐다.

제조 공정의 차이일 뿐이나 주조 아이언은 아마추어들의 일정하지 못한 샷을 보정해 주기 위해 넓은 솔(Sole- 클럽 헤드의 바닥 부분)을 가진 캐비티백 스타일이고 단조는 보다 날렵한 머슬백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꺼내 놓은 두 클럽은 모양이 똑같았다.

날렵한 헤드 디자인과 얇은 솔을 지녔기 때문에 단조라고 보는 것이 적절했지만 주조의 특성도 섞인 묘한 형태였다.

“주조로도 단조 같은 성능을 낼 수가 있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저희 회사는 고른 가중치와 관성모멘트를 높이고 중력 중심을 다양한 위치에 배치할 수 있는 단조 웨지를 만들어 샷의 관용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인정하는 듯 보였으나 필상은 이미 60도 페이스 각도를 지닌 단조 웨지를 집어 들고 손가락으로 클럽 페이스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어느 게 단조인지 맞춰 보라는 질문에 답한 것이지만 이거라고 단정하지는 않았기에 뭐라고 딱히 대처하기 애매했다. 그래서 다시 권하려던 찰나, 필상이 툭 던진 말에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탄소강(carbon steel)의 비율을 줄인 것은 안타깝네요.”

“어떻게 그런 판단을 하신 겁니까?”

“두드려 보면 알죠. 수천만 번 휘둘러 보고 때려 본 프로가 그것도 모른다면 은퇴해야죠! 하하하.”

상대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제조 전문가인 자신도 손가락으로 튕겨 보고 탄소강의 비율을 가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상이 뻥을 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감히 그 말을 뱉지는 못했다.

필상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상이 한술 더 떴다.

“정통한 감각을 갖춘 프로 수준의 골퍼라면 단조 웨지에 이렇게 장난을 친 것을 기꺼워하지 않을 겁니다.”

“실제 그 단조 웨지를 쓰는 선수들이 있는데요?”

“그런가요?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성적이 말해 줄 겁니다.”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실험적인 사용을 하는 선수들은 대부분 시원찮은 결과를 거둔 것 같았다.

하기야 유명한 일류 선수들은 대부분 전담 스폰서가 제공하는 클럽을 쓴다. 검증되지 않은 걸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조가 반드시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여 두드린 장인의 정신과 선수의 마음이 합쳐지면 기적 같은 굿 샷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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