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억류(抑留)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공장이 훨씬 깨끗하고 크군요.”
“최근 경기가 좋지 않아 최소 인원으로 꾸리다 보니 생산라인을 다 돌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큰 포부를 가졌던 시기에 넓게 만든 공장은 현재 일부만 가동 중이었다. 녹록치 않은 현실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잘 정돈된 공장 설비를 보면 이들의 각오가 느껴졌지만 지금도 시장은 국산 클럽에 긍정적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재작년 전격적인 불매운동이 일어나며 대부분의 일본 제품 판매가 급감했지만 기이하게도 골프용품은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 버젓이 국산 제품이 있음에도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제가 한 번 쳐 봐도 되겠습니까?”
“아. 네. 준비해 뒀습니다.”
생산 시설과는 별개의 연구와 실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수익성이 좋지 않음에도 꾸준히 연구개발에 투자하기란 쉽지 않은데, 필상을 맞이하는 연구원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생산되고 있는 모든 제품이 위풍당당 전시되어 있었고 그중에 상급자를 위한 스펙을 시타용으로 펼쳐 놓은 상태였다.
두말없이 몸부터 푼 필상은 웨지부터 점검을 시작했다. 모든 과정이 녹화되고 있어서 이 대표가 보안에 대한 양 회장의 분명한 약속과 더불어 카피한 것을 받기로 합의하는 걸 들었다.
따악!
그저 형식적인 요식행위가 아니었다.
필상은 준비된 모든 클럽을 대여섯 번씩 휘둘렀고 좀 이상하다 여겨지는 클럽은 열 번 이상 쳐 보기도 했다. 도중에 연구원에게 뭔가를 묻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 과정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골프필드 수뇌진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필드의 지배자가 이곳을 찾아와 자신들의 클럽을 실험해 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기 때문이다.
금액이 얼마든 필상이 투자를 결정한다면 단숨에 길이 열릴 것이다. 기업의 이미지가 가파르게 상승할 것이고 이른바 폭군 테마주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도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정성껏 만든 클럽을 쳐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를 드려야지요.”
“시타를 하신 소감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앞으로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될지는 모르지만 오늘 제가 느낀 부분은 상세하게 데이터를 만들어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하!”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시타를 마친 필상의 표정이 밝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상은 느닷없이 양 회장에게 다가가더니 다소 엉뚱한 제안을 했다.
“회장님. 곧 퇴근 시간인데, 제가 오늘 여기 계신 분들에게 식사 한 끼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식사 대접은 제가 해 드려야지요.”
“아닙니다. 고생하시는 분들을 모두 모시고 싶습니다. 오늘 출근한 직원이 몇 명이나 되죠?”
“전 직원 회식을 하겠다는 겁니까? 서른 명이 넘는데요?”
“여러분들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시는 분들의 노고가 있기 때문에 저 같은 프로가 분에 넘치는 돈을 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찌 한턱 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우리 직원들이 크게 감동할 것 같습니다.”
“여기 이동갈비가 아주 유명하다죠? 포천 막걸리랑 곁들이면 환상의 조합일 것 같은데, 얼른 예약부터 하시죠.”
뜻밖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신나는 회식이 이뤄졌다.
골프 관련 직업을 가진 이들이기에 필상을 모르는 직원은 없었다. 그들은 필상이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받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뜨거운 격려와 환영을 받았고 필상도 오랜만에 과거와 같은 직장인이 된 기분을 느끼며 술도 몇 잔 넘겼다.
회식이 끝나자 필상은 모두에게 인사하고 집으로 복귀했다. 양 회장을 비롯한 수뇌부는 긴밀한 협의를 기대한 것 같았으나 그 문제는 자신의 관할이 아니었다.
추후 이 대표가 나서 일을 추진할 것이라는 말에 아쉬움을 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상은 공개적으로 나설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어땠어?”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지만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
“물론이죠. 이미 기술력이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더라고요.”
“그럼 추진하는 건가?”
“그냥은 안 됩니다. 당장도 아니고요.”
필상은 사안의 중요성을 확실히 인지했다. 안 할 것이면 몰라도 기왕 나설 거라면 단단한 준비가 필요했다.
돈이 오가는 사업은 이해관계에 따라 요동치는 요물이 될 수도 있기에 그저 감정만 가지고 함부로 뛰어들 수는 없다.
당장 자신이 골프필드를 방문한 사실은 나이키에 들어갈 것이고 그들은 실망을 감추지 않을 게 분명하다. 적어도 명분도 없이 가볍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투자가 아니라 흡수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할 것 같아요.”
“흡수? 골프필드를 사들인다는 거야?”
“만족할 만한 지분을 배분하면 되지 않을까요?”
“경영은?”
“의견만 일치한다면 그대로 맡겨도 좋을 것 같더군요.”
“음……. 그건 쉽지 않을뿐더러 리스크도 너무 크지 않을까?”
“TPK. 저랑 타이거 우즈, 필 미켈슨이 사용하는 클럽인데, 리스크가 아무리 커도 수익분기점을 넘지 못할까요?”
“프로가 대회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거야?”
“사실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장비를 탓하는 것은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짓이죠. 다만 단점을 확실히 잡을 필요는 있는데,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으음! 생각보다 너무 일이 커지는 것 같은데?”
“일본산 골프 클럽을 사용하는 한국 골퍼들의 10%만 사 줘도 대박이 날 겁니다.”
사실이다.
골프 클럽은 쉽게 사기도, 바꾸지도 않지만 수요가 꾸준하다. 고가이기에 한 번 붐을 타면 폭발적일 수 있다.
그 전제는 일본 제품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인데, 그 부분에 대한 필상의 판단은 확고했다.
또한 시기적으로 적절하다는 점도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잡다 못해 앞질렀는데, 하필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는 일본을 추종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다만 지나치게 서두르며 부푼 꿈만 쫓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충분한 검토와 진행 상황을 주의 깊게 봐야만 했다.
* * *
“출국하기 전에 일본에 좀 들리려고.”
“이번 주에 출전하는 봄을 응원하려고요?”
“그건 아니고 그냥 할 일이 좀 있어서.”
“할 일이요?”
영국으로 향하기 전에 일본에 들리는 목적은 밝히기 애매했다. 아직 골프 클럽 제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이 대표 외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곤란한 입장에 처한 필상은 모모코에게 개략적인 상황을 설명해야만 했다.
협조를 구할 필요도 있는 사안이라서 털어놓으니 편했다.
“와우! 우리 클럽을 만든다는 건가요?”
“응. 확인한 바에 의하면 우리 기술력이 충분하더라고.”
“그럼 이번에는 제가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당신이?”
“네. 저도 여기저기 묻어 둔 돈이 꽤 많잖아요. TPK에 투자하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어차피 연관되겠지만 따로 움직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모모코도 최근 거액을 착실히 벌고 있다.
메인 스폰서가 일본 기업이지만 워낙 강렬한 경기력을 보이기 때문에 한국 시장에서 폭발적인 효과를 보고 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제안을 꺼낸 것이다.
“미즈노와 결별할 수도 있는데?”
“아무렴 어때요? 제가 만든 클럽을 사용하는데!”
필상은 골프필드를 TPK 자회사로 구상 중이었다.
하지만 모모코가 나서겠다면 얼마든지 다른 구상이 가능하다. 특히나 일본인인 그녀가 나서면 복잡한 문제가 해결된다.
안 그래도 최근 무척이나 민감한 일본과의 경쟁으로 비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일본은 물론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타이거나 미켈슨은 적극적으로 도와줄 가능성이 높아 독립적인 회사로 키우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좋아! 한 번 해 보자고.”
“정말이죠?”
“근데 당신 너무 덤비는 거 아냐? 이거 저거 알아보고 난 뒤에 결정해야지.”
“흐흐흐……. 어차피 오빠가 다 알아서 해 줄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 당신이 공부를 해야지. 나한테 물어도 보고 이 대표와 상의도 하고.”
“알았어요.”
새로운 구도가 떠올랐다.
모모코를 일대주주로 내세우고 양 회장과 TPK가 동일한 비중으로 그 밑을 떠받드는 안정적인 안이다.
모모코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큰 결실을 기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필상은 성공 가능성을 상당히 높게 보고 있고 모모코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걸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기도 했다.
필상은 곧 자신의 메인 스폰서를 깨고 보다 세분화한 새로운 계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드라이브를 비롯한 정통 우드, 유틸리티와 같은 기능성 클럽, 가장 중요한 아이언, 또한 특성화된 웨지와 퍼터 등을 장단점에 따라 각기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 최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일일이 사용 계약을 따로 할 생각을 밝혔다.
‘에이! 어림도 없는 일이야!’
그렇게 단정하던 이 대표도 그 가능성을 직접 확인하고 합리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이키로서는 아쉬울지 몰라도 필상이 마음에 들어 하는 웨지 전문 회사로부터 사용에 대한 계약 여부와 계약금을 확인하고는 급히 방향을 선회했다.
찢으면 찢을수록 총액이 증가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필상이 직접 그 회사를 방문해 클럽 제조 과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제조 공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 자신감의 피력이며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다른 감각을 지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보는 족족 본질을 꾄다는 것을 그들이 알 리 만무했지만.
“오라버니!”
“어허! 나오지 말라니까!”
비밀리에 움직이려고 보안을 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인천공항은 은밀히 빠져나왔으나 승객 명단에 포함된 필상의 이름을 확인한 일본 기자들 몇몇이 공항에 나타났다.
그래도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아 가볍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미 벌떼처럼 몰려온 광경에 황당했다.
그 이유를 따져 보니 최근 일본 여자 골프계의 가장 핫한 골프 신데렐라, 이즈카 하루가 공항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어딜 가나 그녀를 따라다니는 전담 기자들이 공항으로 향하는 이유를 따져 봤고 필상의 입국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기껏 나오고 싶다는 미켈슨도 말렸건만.
“봄. 네 담당자가 누구지?”
“안녕하세요? 제가 하루의 전담 매니저, 방승아예요.”
“일단 기자회견 없다고 밝히고 공항 측에 안전한 통로를 확보해 달라고 전해.”
“네.”
방승아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면 자신이 유창한 일본어로 사회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 같았다. 겁을 먹기는커녕 기대한 걸 보면 배포가 크다는 것은 알겠는데,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래서 봄에게 확인했다.
“너 공항에 나오지 말라는 말 못 들었어?”
“네. 오라버니가 오면 마중 나오는 게 당연하잖아요.”
“쟤 한국으로 돌려보내야겠네!”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본인이 원하는 그림을 위해 고객을 번거롭게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은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남을 돕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었다.
그런데 분명한 의사를 밝혔음에도 기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으며 공항 측에서도 빠져나갈 통로를 제공하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이건 억류나 다름이 없었다.
보다 못한 봄이 씩씩대며 나서려고 했으나 제지한 필상은 일단 일행과 함께 입국장 안에 위치한 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직원들이 깜짝 놀랐지만 상황을 파악하고는 일단 의자를 내주며 호의를 베풀었다. 그 와중에 필상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넣었다.
“아빠죠?”
“응. 아쉬우니 어쩔 수 없네. 하하하.”
“금방 조치해 주실 거예요.”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에 자부심이 비쳤다.
최근 부친과의 관계가 호전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을 계기로 더 가까워질 것 같아 필상도 기분이 좋았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었다.
공항 책임자가 부리나케 달려와 사과했고 곧바로 특별 통로를 제공해 무사히 공항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수차례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면서 일본과는 역시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로 가죠?”
“일단 TPK 일본 지사로 가자.”
“아! 필 아저씨를 만나야 하는 거군요.”
“응. 같이 식사하기로 했어. 그런데 너 내일 연습 라운드 아냐? 이렇게 한가하게 놀아도 되나?”
“에이! 잘 알면서 왜 그러세요?”
“뭘 알아?”
“내 실력이요. 그러고 보니 제 경기는 검토도 안 하죠?”
“아, 아니야. 워낙 잘하고 있어서…….”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봄은 전혀 걱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도 사실이다. 수미가 이제 말문이 트여 필상만 보면 항상 붙어 있으려고 하는 통에 챙기지 못한 것이 많았다.
여하튼 봄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해하는 눈치였다.
“참. 아빠한테 문자가 왔어요.”
“아! 오시라고 해. 내가 식사 대접한다고.”
“그걸 기다리시는 것 같았어요.”
오랜만에 만난 미켈슨은 수척했다.
늘 낙천적이라 투어를 뛰지 않으면 살이 찌는 것이 고민이라던 그가 피부까지 거칠어진 것을 보며 안타까웠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지만 일하는 방식을 바꾸거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