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10화 (310/354)

310. 부르는 게 값

다음 날 아침 필상의 가족들은 비행기에 올랐다.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인천공항에는 기자들은 물론 셀 수 없이 많은 팬들이 몰려 필상의 우승을 함께 축하했다.

이어진 기자회견도 미국에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열렬한 이유는 서든 데스에서 일본 선수의 도전을 물리치고 우승했기 때문이었다.

축구든 야구든 그 어떤 종목에서도 반드시 일본에게만은 질 수 없다는 국민들의 정서는 최근 최악으로 치달은 한일 관계와 맞물려 더 큰 파급효과를 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필상의 생각은 좀 달랐다.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우리가 보다 관용적인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아내인 모모코 때문에 마음이 약해지신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저들은 곡간이 말랐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가만히 둬도 오랫동안 누적된 문제들로 인해 서서히 침몰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야지요.”

-아! 이미 국운이 역전이 되었다는 말씀인가요?

“사실입니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벽장 안에 금붙이를 쌓아두면 뭘 합니까? 당장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이 있어도 그러지 못하는데!”

은유적이고 파격적인 그 표현을 끝으로 기자회견을 마쳤다. 잠시 오해를 했지만 오히려 뼛속까지 더 깊은 우월함을 드러낸 필상의 말에 다들 크게 웃으며 돌아갔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현대문물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기회로 혼란에 빠진 이웃나라를 돕기는커녕 굴복시켰다.

예로부터 노략질을 일삼고 등 뒤에서 비수를 꼽는 족속들이 재빠르게 근대화를 이뤄 형편이 좀 좋아지자 더러운 야욕을 아시아 전역에 드러냈다.

문물을 전해 주고 호의로 대해 준 이웃나라들을 집어삼켰으며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본시 덕(德)이란 없는 나라다.

끝없는 야욕에 물든 그들이 원폭으로 폭삭 망했을 때도 다시 일어설 절호의 기회를 얻었는데, 그게 바로 한국전쟁이다.

이웃나라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는 와중에 잇속을 챙겨 경제대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얻었음에도 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다.

“오빠 생각에 저도 동의해요.”

“사실이야! 이젠 더 이상 국부를 유지할 여력, 경쟁력도 없다고 보는 것이 적절해.”

“점점 더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기는 해요.”

모모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실제 일본과 한국에서 다 살아 봤기 때문이다.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른 일본인들의 생활은 결코 한국인들보다 낫지 않다.

억만금의 자산을 가지고 있어도 당장 수입이 없으니 소비가 크게 위축되고 경제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허우적댄다.

세계적인 관광지에 그 많던 일본인들의 자취가 사라진 것만 봐도 그들이 겪는 각박한 현실이 어떠한지 확인된다.

“왜 일본이 그렇게 허물어지고 있는 걸까요?”

“은혜를 모를뿐더러 겁이 많아서 그래. 과감한 투자를 하지 못하고 늘 회의만 한다면서?”

“어쩌면 한국인들이 더 똑똑해서 그런지도 몰라요.”

차마 모모코에게 대놓고 말하기는 껄끄럽지만 필상은 일본인들의 민족성이나 근성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절대강자인 미국에 알랑방귀를 뀌며 특유의 성실함으로 세계적인 부국을 이뤘지만 그 영화의 끝이 보인다.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데,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며 역사를 수정해 합리화하려는 세력이 장기 집권하면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렸고 입마저 막고 있다.

죽음이 두려워 지배자에게 절대 순종해 온 민족성은 필요할 때에 헌신적이지만 민주적인 시민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인가?”

“에이. 그건 너무 나간 것 같은데요?”

“아니야.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일본 그 어디에도 다양한 의견은 존재하지 않잖아.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고.”

“있기는 해요. 한국의 광장 문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하하하! 그게 하루 이틀에 이뤄진 게 아니거든.”

편파적인 극우가 판을 치며 주도하는 일본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제국주의적 과거의 답습에 지나지 않지만 한국이 걸어온 다양성의 역사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왕이 혹정을 일삼으면 분연히 일어난 난(亂)이 있었고 인본을 외치는 민초들의 저항 역사는 서구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총칼로 무장한 일본 경찰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만세를 외쳤으며 독립에 대한 뜨거운 각오로 제 몸을 바쳐 잃어버린 국권을 찾고자 노력했다.

일본이 장악한 그 어떤 땅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치열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이 땅에서는 들불처럼 번졌으며 끊이질 않았다.

“일본인과 가장 닮은 사람은 한국인 아닌가요?”

“하하하! 외국인이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흡사하기는 하지. 실제 일본의 지배세력은 한반도에서 건너갔으니까!”

“그런데 왜 원수처럼 매일 싸우는지 모르겠어요.”

“때린 자가 할 소리는 아니지.”

“미안해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불편한 한일 관계로 인해 가장 답답할 사람이 모모코다.

어려서부터 운동만 했던 그녀가 양국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어쩌면 제대로 학습을 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편향된 시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오염된 인식을 가지도록 가르치니까!

때문에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필상은 아내가 보다 폭 넓은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많은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지독하다 못해 병적인 편견이 문제야.”

“어떤 편견이요?”

“자신들만이 최고라는 생각!”

“실제 가장 훌륭한 국민성을 지닌 것 아닌가요?”

“과연 그럴까?”

일제 때 기록을 보면 저들은 아시아 각국 국민들의 등급을 나눴다. 실로 어이없게도 그 당시 한국인을 비하했던 표현들을 지금도 사용하는 작자들이 이 나라에 살고 있다.

일본인, 언제부터 지들이 잘 살았다고 스스로 아시아 일등 국민이라고 자부하는가? 아니, 자부심을 가지는 것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그로 인해 타국인을 업신여기는 것이 문제다.

한때의 영광에 가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모습은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혐한은 정말 잘못된 것 같아요.”

“혐한이 나오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그나마 위로가 되지.”

“네?”

“혐오하는 이유가 뭘까? 두렵기 때문일 거야.”

“아!”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한국인에 대한 비하와 폄훼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그건 곧 위기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한국에 추월당하는 것이 무서운 거였군요. 그런데 일본이 머잖아 한국에 복속된다는 의견도 있더라고요.”

“하하하! 그렇게까지 되기야 하겠어? 그냥 서로 존중하는 이웃이 되어야지.”

모모코는 유튜브에서 본 내용을 언급했다.

국운이 크게 기운 일본이 결국 한국에 예속된다는 극단적인 주장인데, 일본은 그렇게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다만 자기들에게 기울었던 저울이 서서히 균형을 맞춰 가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서 이러다 정말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된 것이다.

밀리는 게 아니고 동등해지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장점은 한국인들도 가지고 있다. 성실하며 헌신적이고, 절대 따라오지 못할 큰 장점이 있다면 모험적이며 호전적이라는 것이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본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실패할지언정 포기하지 않으며 결국은 해낸다.

그것도 철두철미하고 무서우리만큼 빠르게!

* * *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전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는 않았다.

저녁 시간은 어김없이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냈지만 낮에는 연습도 하고 그동안 챙기지 못했던 TPK 사업도 살폈다.

그나마 이 대표가 워낙 꼼꼼하게 일을 하고 있어 한결 여유로웠다. 타이거나 미켈슨에 비하면 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정도였다.

거기에 보태 유명인이기 때문에 치를 수밖에 없는 일도 거를 수 없었다. 그저 한나절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면 상상하기도 힘든 거금을 건네는 광고, 그건 지나칠 수가 없었다.

“부르는 게 값이야.”

“선택의 폭이 넓겠군요.”

“그렇지. 그래서 인연이 중요한 거지. 어차피 같은 값이면 아는 라인을 타게 되니까!”

“하하하! 그래도 공평하다는 인식은 유지해야 합니다.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이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면 편했다.

필상의 입장을 정확하게 알고 움직여 주기 때문이다.

이미 벌인 일도 적지 않은데, 최근 필상의 신경을 건드리는 주제가 하나 있어 그걸 은근슬쩍 꺼내 봤다.

“혹시 국내 골프 클럽 현황에 대해 아시는 바 있으세요?”

“국산 골프채?”

“네. 얼마 전 마스터즈 기간에 대대적인 골프용품 부스가 열려서 잠깐 들려 봤는데, 너무 충격을 받아서요.”

“한국산이 하나도 없었지?”

“네. 수십 개의 메이커가 초청을 받아 부스를 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한국 제조사가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잖아요.”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관련 자료들을 찾아봤다.

하지만 드러난 정보보다 더 깊숙하고 정통한 내용을 알고 싶었다. 아무래도 골프 관련 사업을 했던 이 대표는 아는 게 많을 것 같아 화두를 열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국내 클럽 제조 기술은 절대 부족하지 않아.”

“몇몇 메이커가 있는 건 알고 있습니다. 고생하고 있다는 것도요.”

“그런데 이거 너무 위험한 데 발을 디디는 거 아닐까?”

“하하하! 발을 들이기는 누가 발을 디뎌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니까요.”

“그렇다 이거지. 좋아.”

놀랍게도 일본의 상당수 유명 메이커들은 한국에서 OEM 방식으로 생산된 제품에 상표를 붙여 수십 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이미 한국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국내 골퍼들은 오로지 브랜드 충성심 하나로 일본산을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경악을 금지 못하게 했다.

“이런 개 같은 일이!”

기술력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프로 골퍼가 된 자신이 그런 기본적인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러니 어디 아마추어를 탓할 수 있겠나?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마음을 알아챈 이 대표도 짬이 난 김에 직접 차를 끓여 내왔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투자는 할 수 있잖아.”

“투자할 만한 대상이 있군요?”

“당연하지. 자신의 인생을 모두 거기에 건 분을 알거든.”

컬러 볼로 골프공 시장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던 볼빅이 최근 새로운 클럽 시리즈를 내놨다.

골프공 제조사에서 토털 골프 브랜드로 도약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야심찬 클럽 세트를 내놓고 있는 와중이다.

하지만 그처럼 몇 년 새 새롭게 등장한 회사들을 언급한 이 대표가 정작 소개한 사람은 골프필드의 양 회장이었다.

무려 30년이다.

클럽 불모지에 우리 브랜드를 만들어 정착시키고자 하는 집념 하나로 걸어온 긴 세월이다.

IMF 당시 부도도 겪었지만, 또한 아직도 국내 브랜드의 우수성을 인식시키지 못했지만 그는 묵묵히 그 길을 걸어왔다.

대기업들도 포기하고 철수한 시장에서 미련하리만큼 국산 골프채 세계화에 목을 맨 골프필드의 노력은 듣는 필상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인연이 있으시군요?”

“굳이 인연을 말하자면 가장 가깝기는 하지. 관련업계 사람들 중에.”

“그럼 며칠 내로 날을 한 번 잡아 보세요.”

“양 회장님을 직접 만나 보려고?”

“아니요. 공장에 가 보고 싶습니다. 시타도 좀 해 보고.”

“디 오픈 뒤로 미루지 그래.”

“포천이면 멀지도 않은데요 뭘.”

“좋아!”

삼성, LG, 금호, 코오롱과 같은 대기업들도 국내 골프 클럽 제조업을 선점하기 위해 뛰어들었다가 모두 철수했다.

이미 오래전에.

국산 클럽이 외국 제품보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골퍼들의 선입견을 깨는 것이 너무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이다.

골프가 한때 있는 자들의 운동이었고 실력보다 일단 ‘장비빨’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너무 깊어 웬만한 투자로는 어림도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그런 풍토가 아직도 만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다 가능성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며 많은 아마추어들이 일본 제품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도 거슬렸다.

“저희 골프필드는 국내시장을 개척하고 동남아를 비롯한 전 세계 40여 개국에 클럽을 수출하고 있는 한국 유일의 국산 브랜드입니다.”

포천에 도착한 날은 이틀 뒤였다.

필상도 궁금했지만 저들은 필상이 관심을 가진다는 말에 당장이라도 풀 세트를 준비해 달려오겠다고 했다.

물론 그게 편하지만 필상이 원한 것은 그 과정을 정확히 보고 확인하는 것이기에 약속을 잡고 포천으로 간 것이다.

기술이사가 직접 필상과 함께 공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세세한 부분까지 소개했다. 양 회장과 이 대표도 동행했지만 그저 조용히 지켜봤다.

인사를 나눌 때, 그의 감정이 어떤지는 이미 느꼈다. 필상이 클럽 후원사를 바꿀 일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나이키가 천문학적인 지원을 하고 있음을 알기에.

그러나 투자를 했다는 소식만 알려져도 회사의 이미지는 금방 달라진다는 것을 그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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