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 근본적인 문제
“가지!”
“네.”
히데키가 세 번째 샷을 시도하는 동안 필상은 기다리지 않고 서서히 그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인데, 그래도 히데키는 카미카제 조종사의 출격 전 모습처럼 거의 제사를 드리듯 루틴을 밟았다.
하지만 러프 투 러프!
타구는 그린에 떨어졌지만 스핀은커녕 미친 듯이 굴러 그린을 훌쩍 오버해 다시 러프로 기어 들어가고 말았다.
버디는 고사하고 파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필상이 버디를 실패할 가능성까지 감안하면 칩인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포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듯.
“그냥 먼저 넣을까?”
“에이! 기다리시죠. 우승 퍼팅인데!”
두 선수가 처한 상황은 천양지차였지만 그린에 다가오자 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우승자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여기까지 승부를 끌고 온 위대한 선수들에 대한 존중의 의미였다.
필상은 모자를 벗고 환호에 답했지만 히데키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그린을 넘어 걸어갔다. 아마도 팬들의 환호성이 모두 필상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어진 그의 칩샷은 깃대를 향했으나 홀컵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사이 준비를 마친 필상은 버디를 가볍게 집어넣은 후 그의 공을 집어 건네줬다.
“와아아아! 퍼펙트!”
“폭군! 폭군!”
팬들의 축하가 폭발했지만 필상은 히데키와 악수부터 했다. 경쟁하는 동료가 없다면 우승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수고했습니다.”
“추, 축하합니다. 미스터 퍼펙트!”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너무도 반가운 얼굴이 이쪽을 향해 아장아장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
“하하하! 우리 딸!”
필상은 얼른 마주 달려가 수미를 번쩍 안아 들고 맴을 돌았다. 이어 도착한 모모코와 엄마와 함께 감격의 포옹을 나눴고.
아내와 모친이 우승 세리모니에 참가한 적은 있지만 어린 수미와 감격을 나누기는 처음이라서 감동이 배가 되었다.
“이 녀석! 당신 닮았나 봐. 수줍어하지도 않잖아. 하하하!”
“치! 담력은 당신 따라가기 힘들 걸요. 퍼팅을 해야 하는데 아빠한테 간다고 얼마나 보채는지.”
“하하하! 그랬어?”
미사키, 이 대표, 서 팀장도 불러내 다 같이 팬들에게 인사했다. 이번 우승은 그 어느 때보다 사연도 많았고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단 4일 동안 펼쳐지지만 그 안에 녹아든 드라마는 책으로 써도 한 권은 족히 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뭉클해지기도 했다.
[위대한 프로 골퍼, 공필상! 전 세계인을 열광시키다!]
[6연속 메이저 재패! 진정한 지존임을 증명하다]
[유난히 어려웠던 우승, 하지만 그는 결국 필드를 지배했다]
[이제 대기록 달성에 남은 퍼즐은 단 하나, 4주 뒤 150회를 맞이하는 디 오픈!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로 가자!]
골프 전문 매체가 아닌 일반 언론들도 앞다퉈 필상의 우승 소식을 전했다. 위대한 골퍼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고 기량은 물론 강한 정신력에 대한 찬사가 주를 이뤘다.
갑자기 체중이 푹 빠진 상태로 나타난 필상은 특유의 날카로운 샷이 터지지 않으면서 대기록 달성에 빨간 불이 켜졌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예선 성적이 그리 나빴던 것도 아니지만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기에 건강 문제를 제기한 일부 전문가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 와중에 거둔 우승이기 때문에 기량보다는 강한 집념의 결실이라고들 평가한 것이다.
“미국에 온 김에 며칠 놀다 갈까?”
“아뇨. 얼른 우리 집에 가요.”
“수미가 미국은 처음 왔잖아.”
“기억도 못할 텐데 나중에 와도 되요. 그냥 공기 좋고 편한 집에서 노는 걸 더 좋아할 거예요.”
필상은 가족들이 미국에 온 김에 며칠 노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모코는 물론 엄마는 단칼에 잘라 냈다.
실제 체중이 빠진 필상을 대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얼른 고향집에 데려가 잘 먹일 생각만 할 뿐.
그래서 예정대로 다음 날 바로 출국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시상식이 끝나 갈 무렵, 이 대표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영주권이 아니라 미국 시민권이요?”
“응. 원하면 언제든 심사해 주겠다는데, 사실은 그냥 주겠다는 거지.”
“하하! 세금 내라는 거군요.”
“지금도 내지. 그보다는 국적을 뺏고 싶은 걸 거야. 위대한 미국인이 될 기회를 준다고!”
“장난하나?”
“내 그럴 줄 알고 연락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했어.”
세금 문제가 아니다.
돈도 돈이지만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슈퍼스타가 미국에 귀화하면 그들이 자랑하는 아메리칸드림으로 인식될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는 많이 가진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먼저 그 추악한 짓을 벌여 왔다. 원정 출산까지 감행하며 뼛속부터 사대적인 근성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 외국에 쌓아 놓고 호의호식하려는 의식을 가진 자들이 많다는 것을 미국 관리들이 먼저 알고 제안한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자회견에 그 얘기는 꺼내지 마.”
“그럴게요.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하하하.”
이런 제안을 받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일왕이 내린 작위를 받고 제 동포를 전쟁터로, 강제 노역이나 위안부로 내몬 작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불법적 권력에 기생해 민족의 고혈을 빠는 추악한 짓은 과거로부터 시작해 지금도 진행형이다.
청산하지 못한 끔찍한 역사로 인해 아직도 사회가 변질되고 분열되어 아픔을 겪고 있으니, 그 와중에도 눈부신 경제 성장과 풍성한 문화를 피워 낸 우리 민족의 우수함은 따로 형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승 소감부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를 믿고 끝까지 응원해 주신 팬들 덕분에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필상은 우승 소감을 최대한 짧게 마무리했다.
너무 자주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다 들어간 소감이었다.
대회 중에 일어난 몇몇 상황에 대한 설명, 그리고 언급할 필요도 없을 디 오픈 우승에 대한 각오도 밝혔고 이날 인터뷰에서 주목받은 특별한 내용은 다음 두 가지였다.
-갑자기 체중이 준 이유는 뭡니까? 우승을 하시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건강에 대한 팬들의 우려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이전 대회와는 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 것에 대한 솔직한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솔직하게 답을 할 수 있는 화제가 아니었다. 사전에 준비하지 않았다면 당황했을 테지만 필상은 담담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인체는 참으로 신비롭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현대 문명의 이기 속에 살고 있지만 늘 자연으로 돌아간 인간 본연의 삶에 대해 늘 그리워하고 있으며 그래서 산을 자주 찾습니다.”
-그렇다면 US 오픈을 앞두고 산속에 들어가 장기간 머물렀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그렇습니다. 최소한의 음식을 취하면서 제 자신을 관조하고 성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로 인해 체중이 확 줄었는데, 믿기 힘드실 테지만 건강은 더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경기 성적은 그렇지 않았는데, 그 효과가 늦게 나타났다는 말씀인가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당장 체중 손실로 거리가 나가지 않아 당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번에 겪어 봤으니 앞으로 팬들이 걱정하실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연인’이라는 주제는 가끔 방송에도 다뤄지는 내용이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한가운데 사는 현대인이 미처 누리지 못하는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싶은 이들이 적지 않다.
아직도 문명과는 고립된 오지에 살고 있는 족속이 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주제인데, 그 주인공이 다른 사람도 아닌 최고의 프로 선수인 필상이라는 고백에 뜨거운 화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혹자는 필상의 비범한 기량의 원천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왔다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는 이들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부작용도 예상되지만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주는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계기가 되는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2번째 서든데스 세컨샷에서 샷을 방해하는 행위가 확인되었는데, 그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필상은 중계진이 그 문제를 심각하게 다뤘음을 경기 후에 들었다. 여러 가지 생각할 것이 많았으나 일단 동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세세하게 밝힐 경우, 봄이 취한 보복 행위가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골프는 민감한 운동이죠. 당시 빛이 반사되어 샷을 멈춘 것은 맞습니다만 경기에 임하는 프로 선수는 그런 것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의성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수차례 시야를 방해한 것이 밝혀졌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씀인가요?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갑자기 속담을 언급하자 기자들의 주의력을 기울였다.
뜬금없이 한국 속담이라면 알아듣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은 쉽게 풀어 줬다.
“열 명이 한 도둑 못 잡는다고 합니다. 설사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방해하려고 해도 그걸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프로는 그 어떤 상황도 이겨 낼 수 있는 대비를 해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누구든 매너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가요?
“그건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골프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그건 강제할 규정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행위인 겁니다. 남들이 어찌 생각하든 자신이 좋아하는 골프를 즐기고 선수를 응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있는 거죠.”
-멘탈이 강한 프로님 같은 경우는 상관이 없겠지만 민감한 선수들은 팬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선수는 구제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건 동의하지 않는 거군요?
최근 팬들이 마음껏 떠들 수 있도록 허용한 대회도 생겼다.
하지만 골프의 특성상 허용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백스윙을 하는 선수에게 소리를 빽 지르면 어찌 정상적인 샷을 할 수 있겠나.
결국 골프는 선수와 팬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운동이다. 애초에 심판이 없으며 동반자들이 서로의 플레이를 체크하며 사인해 그걸 인정하는 유일한 스포츠다.
항간에는 고의적으로 규정을 어기는 선수들이 많아져 심판이 필요하단 말이 있고, 대회의 규모나 예산을 고려하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건 PGA 같은 대규모 투어에서나 가능할 뿐, 작은 투어나 아마추어 대회도 모두 심판이 필요하다면 그 예산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며 그건 전통적인 골프가 아닌 것이다.
“극히 극소수의 우매한 자들 때문에 골프가 변질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왜 그런 짓을 하는지, 그걸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죠?
“아무런 이익이 없는데 왜 범죄 행위를 저지르겠습니까? 저는 제 경기에 돈을 거는 행위, 거부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화제가 스포츠 베팅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는지, 기자들은 빠르게 필상의 말을 기록했다.
틀리지 않은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이익이 걸렸기 때문에 흑심을 품고 죄를 짓는 것이다. 만약 이해관계가 없다면 그럴 이유조차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스포츠 베팅 업체가 이미 스포츠계에 뿌리 깊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점이다. 야구는 물론 축구, 골프를 비롯해 거의 모든 프로와 아마추어 스포츠에 돈이 걸린다.
-그 문제는 프로님이 건드리기 부담스러우실 정책 사안인 것 같은데, 역시 용감하시군요.
“아! 제가 너무 무모한 건가요? 하지만 우리 솔직해집시다. 여러분 주변에 어렵게 일해 번 돈을 그걸로 한 방에 탕진한 사람 없나요?”
좌중은 답을 하지 못했다.
없다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대답을 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봤다.
도박이다.
법이 허용한다고 도박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적당히 즐기면 괜찮다고 하지만 도박의 특성은 그렇지가 않다.
당장 끼니를 때울 여유가 없는데도 베팅을 한다.
그런 처절함이 건전해야 할 필드에 접목하는데 어찌 양심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저를 믿고 선택하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당사자인 저도 제게 배팅을 하는 것을 말릴 수 없는 현 시스템, 이건 우리 모두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선수나 팬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기자회견이 큰 화두를 던진 채 끝이 났다.
기자들은 그동안 숨겨지고 가려진 비리의 온상을 헤집은 필상을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드리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존재였고 뒤에서 흘리지 않고 당당하게 밝혔기 때문에 오히려 박수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 이들도 있었다.
물론 필상도 그들을 제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버젓이 선수 유니폼에 베팅 업체 사이트 주소를 새겨 넣는 세상에 살고 있다. 거대한 자본의 위력은 절대 꺾이지 않을 것이다.
“오라버니. 오늘 멋졌어요!”
이동 중에 슥 다가온 봄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오로지 둘만 공유한 비밀이기에 그 말을 하는 봄은 기분까지 좋아 보였다.
“너. 다음부터는 그런 짓 하지 마.”
“제가 뭐요?”
“으흐! 알았지?”
“치! 그런 놈들은 당해도 싸요. 그런데 어째 예감이 별로 좋지 않아요.”
“뭐가?”
“공개적으로 들이대는 이들이 많아지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오라버니처럼 영향력이 있는 선수라면 더더욱.”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