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08화 (308/354)

308. 응분의 대가

필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히 티잉 그라운드를 내려왔지만 갤러리들의 박수 소리는 좀처럼 끊이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틸리티를 잡고 327야드나 보낸 것은 모두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외할 만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히데키가 티 박스에 올라섰음에도, 진행요원들이 ‘조용히’라는 팻말을 치켜들었음에도 팬들의 환호성은 그치지 않았다.

마치 필상의 우승이 당연하다는 듯 시위를 벌이는 모습에 하는 수없이 필상은 앞으로 나서야 했다. 팬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인사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만 다음 샷을 보시죠!”

워낙 시끄러워 필상의 말이 들릴 리 없었다. 하지만 필상이 뭔가 말하는 것을 지켜본 팬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말을 한 필상이 머쓱할 정도로.

그 와중에도 필상은 깨끗한 매너를 보였다.

“히데키. 천천히 준비되면 샷을 하십시오.”

“아! 네.”

선수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특별한 상황이 빚어졌을 때에는 동반자의 동의하에 시간을 더 쓸 수가 있다. 그게 공평하니까.

하지만 필상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낯빛은 이미 거무튀튀해진 지 오래였다. 의욕은 사라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전투력은 이미 바닥을 친 것이다.

-이런 말을 꺼내기 미안하지만 끝난 것 같군요.

-바로 그겁니다. 폭군이 노린 것이!

-아!

프랭크의 설명에 공감했지만 차마 설명을 보탤 수 없었다.

만약 의도한 것이라면 대단하기도 하지만 문득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정글이다.

잡아먹지 못하면 잡아먹히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는 있을지 몰라도 승기를 잡으려는 노력까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래도 히데키의 티샷은 무난했다.

모든 것이 그를 압박하는 상황이지만 쉽지 않았을 거리에 대한 욕심을 버린 샷이 터진 순간, 필상도 고개를 끄덕였다.

“봄. 오빠의 공격이 주효하지 않았나 봐.”

“아뇨. 이미 타격을 입었어요. 아까는 러프에서 믿기 힘든 샷을 했지만 그게 어디 날마다 열리는 장날은 아니잖아요.”

“크크. 날마다 열리는 장날? 그런 표현은 누구한테 배웠어?”

“누구긴 누구겠어요. 우리 노친네죠.”

오랜만에 입에 오른 봄의 부친, 이즈카 사토시.

모모코도 부친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지만 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나마 최근에 가끔 만나 밥이라도 먹는 것은 사토시가 필상에 대한 절대적인 호의를 드러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악화되고 있는 한일 관계에 대한 우려, 특히 일본 골프의 미래를 걱정하며 여러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중심에 필상의 역할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봄도 동의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챙길 겨를이 없다며 단호하게 잘랐다. 적어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뒤에나 말을 꺼내라고 했는데, 그 목표가 중간에 일본 선수로 인해 어그러질 뻔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님. 러프가 아까보다는 짧은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149야드야. 다시 붙이기는 어려울 거야.”

“흐흐흐. 그렇죠?”

필상은 웬만해서 남의 샷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진 않는다.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남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졸자로 비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표현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가끔 무당도 울고 갈 신기를 보이는 필상이기에 미사키는 모처럼 가슴을 펴고 편안하게 히데키의 샷을 지켜봤다.

필상이 그렇게 언급한 이유는 그의 심리상태를 읽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없을 기회의 순간에 와 있지만 필상의 살벌한 샷을 보고 난 뒤, 그의 뇌리를 채우고 있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전 홀에서 그 러프 샷이 그냥 들어갔어야 했어!’

인생 샷이었다.

본인도 그렇게 환상적인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절묘하게 그린에 올라 깃대를 향해 굴러가는 공을 보며 그는 우승을 직감했었다.

뒤늦게 나타나 세계 골프계를 휘어잡은 필상에 대한 부러움을 넘어선 시기심, 그리고 자신의 조국인 일본을 무시한 행태에 대한 감정은 증오에 가까웠다.

게다가 필드의 절대자라고 불리면서 그 누구도 꿈꾸지 못한 대위업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왜 그 주인공이 자신이 아닌 한국인이어야 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 위업을 자신이 깨뜨린다고 느끼는 순간, 그를 휘어감은 희열은 그 어떤 카타르시스도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은 홀컵을 스쳐 지나갔고 결국 재연장에 돌입하고 말았다. 천추의 한이 될 수도 있는 샷이 되고 만 것이다.

퍽!

클럽 헤드에 공이 맞는 소리가 그렇게 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의 샷보다 이전 샷에 대한 아쉬움에 몰입된 히데키는 이 중요한 순간에 또 다른 인생 샷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어! 더프(Duff-클럽 헤드가 볼에 직접 맞지 않고 공 뒤의 잔디나 흙을 치는 행위)인가요?

-네. 이 중요한 상황에 뒤땅을 때리고 맙니다. US 오픈 2차 연장선 세컨샷인데…….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멍하니 서 있네요. 안타깝습니다!

남은 거리는 149야드지만 공은 100야드도 나가지 않고 또다시 퍼스트 컷에 멈추고 말았다.

그 공을 한참 바라보던 히데키는 결국 자기 통제력을 잃고 말았다. 들고 있던 아이언을 양손에 나눠 쥐더니 그냥 무릎으로 두 동강을 내고 말았다.

시합 중인 서양 선수들에게는 자주 나오는 광경이지만 늘 예의바른 태도를 견지하던 그에게서는 절대 연상되지 않는 광경이기에 갤러리들의 놀란 음성이 코스를 압도하고 말았다.

결국 사람의 감정이란 누구나 똑같은 법인 듯.

그러나 그 행동을 바라보는 팬들의 생각까지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예의 바른 듯 보이지만 사실은 흉심을 품은 일본인, 그렇게 여겨지지 않을까?

“105야드에요.”

“샌드웨지.”

히데키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지만 필상이 클럽을 잡고 샷 루틴에 들어가자 순식간에 좌중은 침묵 모드로 돌입했다.

보통 선수가 어드레스를 취하기 전까지는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통상적이나 이례적인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이번 샷이 중요하며 필드의 절대자라 인정받는 필상을 존중하는 분위기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샷은 그냥 그린에 올리기만 해도 유리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야말로 위기를 자초하는 자해 행위가 될 수 있다.

히데키가 러프에서 세 번째 샷으로 칩인하거나 홀컵에 붙이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몰릴 사람은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100야드만 보자.’

이번에도 탄도가 높으면 뒷바람을 타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97야드 정도가 최적이지만 3야드는 백스핀으로 해결하려고 작정한 것이다. 걸고 싶지 않아도 스핀이 걸리는 것이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부담스러울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스윙 동작에 들어갔던 필상은 놀랍게도 백스윙 탑에서 동작을 멈추고 물러났다. 말은 쉬워도 절대 쉽지 않은 동작인데,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테이크 백을 하던 필상의 시선은 당연히 공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빛이 반사되며 얼굴 주변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왜 그러죠?

-폭군이 어드레스를 취한 뒤로 그의 동작을 자세히 볼 수 있는 화면을 저속으로 다시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뭔가 있군요!

캐스터 챔블리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선수 출신인 프랭크는 단번에 의구심을 품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중계 기술진에게 슬로우 화면을 요구했다.

그리고 곧 확인되었다.

누군가 거울 등을 이용해 샷을 하는 필상에게 햇빛을 반사시키는 악의적인 행동을 취한 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만약 그냥 한 번 스쳐 지나간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몇 차례 눈가 주변을 오락가락하는 광경이 고스란히 찍혔다.

-현대 과학을 무시하는 더러운 이 행위는 반드시 밝혀져야 합니다. 지금 이 홀에 동원된 카메라가 무려 12대입니다. 실시간으로 모든 광경을 촬영하고 있기 때문에 범인을 색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아! 정말 그럴 수 있겠군요. 누가 봐도 저건 범죄 행위죠.

-만약 중계진이 밝히기 어렵다면 수사를 의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승부 조작! 추악한 행위가 신사의 스포츠인 골프 경기에 더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얼핏 들으면 지나친 발언 같지만 사안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공감한 이들은 적지 않았다. 이런 행위가 하루 이틀 반복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잘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불이익을 받는 대상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경우도 있으며 투어의 핵심 선수들에게는 감히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놈이에요!”

“저 사람이 왜?”

“저기 나이 많은 히스패닉. 대표님, 일단 저자의 사진을 찍어 두세요. 여러 장.”

봄은 단번에 범인을 지목했지만 영문을 알지 못한 모모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대충 감을 잡은 이 대표는 얼른 스마트 폰을 꺼내 그자를 찍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짓을 벌이고도 뻔뻔하게 경기를 지켜보는 그자의 주변에는 동조자로 보이는 몇몇 놈들이 함께 있었다.

아마도 그 범죄행위를 도와준 것 같았으며 그 이유는 스포츠 베팅과 무관지 않아 보였다.

“봄. 저자가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베팅이죠! 전 저 자들이 히데키에게 베팅한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요. 도대체 뭘 믿고!”

“배당이 아주 높았겠지.”

“하기야 100배도 넘을 수 있겠네요. 저 쓰레기 같은 놈들!”

그 말을 던진 봄이 일행에서 벗어나 이동을 시작했다. 그냥 딱 봐도 불량기가 풀풀 묻어나는 자들에게 다가가 대체 뭘 하겠다는 것인지, 깜짝 놀란 모모코가 그녀를 붙잡았다.

하지만 봄은 싱긋 웃으며 괜찮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제 곧 우승 세리머니를 할 거니까 어서 돌아오라는 말을 했지만 인파가 겹겹이 쌓인 지금, 시간 안에 그자들이 있는 곳에 이를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왜요?”

미사키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뒤에 서서 필상의 스윙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어드레스를 풀 필상이 아니라는 생각에 내용을 알고자 했다. 하지만 필상은 그저 씩 웃으며 다시 샷 루틴에 돌입했다.

입에 담아 봐야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 것 같이 무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필상도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정확히 파악했지만 그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프로 선수가 팬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 경기 중인 자신이 고심해야 할 사안이 아니었다.

‘매너를 갖추지 못한 갤러리들마저 존중하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범죄행위는 방조할 수 없지!’

그렇다. 이건 사적 이익을 추기하기 위한 범죄행위였다.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믿기에 그것에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이와 관련된 사례는 2019년 KPGA에서 벌어진 일화를 보며 느낀 바가 적지 않다.

팬의 무례한 행위에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린 뒤, 클럽으로 바닥을 내려친 선수가 있었다. 좋지 못한 팬의 행동에 대해 어필할 수 있지만 팬의 사랑을 근간으로 하는 프로 선수로서의 기본을 망각한 행위였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고 달라질 것이 있는가?

차라리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팬에게 정중히 어필했다면 지각 있는 갤러리들의 동의를 받았을 테고 그는 팬들의 사랑을 더 듬뿍 받는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플레이어는 골프의 정신에 따라 규칙을 지키면서 플레이하여야 한다. 플레이어가 골프의 정신에 어긋나는 매우 부당한 행동을 한 것으로 판단될 경우, 위원회는 그 플레이어를 경기에서 실격시킬 수 있다.]

골프의 정신에 팬에 대한 태도를 언급한 바는 없다. 하지만 코스를 고의로 훼손한 행위는 분명히 벌타의 대상이 된다.

규정이 바뀐 지 오래되지 않은 시기였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라서 즉각적인 조치가 이뤄지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벌타를 받고도 우승했다면 자신의 불미스러운 행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도 극복한 것이기 때문에 팬들도 동의할 수 있고 선수 본인도 그 우승이 더욱 값지지 않았을까?

스윽!

필상의 두 번째 샷은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터졌다. 긴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지만 저간의 상황을 모르는 대다수의 팬들은 폭군도 긴장해서 샷을 멈추고 다시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가끔 보이는 인간적인 면모에 그저 크게 웃었을 뿐, 이어진 멋진 탄도의 웨지 샷이 그린에 떨어진 뒤에 또다시 스핀을 쭉 먹으며 탭인 버디 기회로 이어지는 믿기 힘든 광경에 비명을 지르기 바빴다.

이제 러프에서 쏠 히데키의 세 번째 샷이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필상의 우승은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그러나 환호 받는 필상의 시선은 엉뚱한 곳에 닿아 있었다.

‘봄. 이 녀석!’

대다수의 팬들이 필상의 우승 샷에 난리 났지만 한 사내는 오른팔을 부여잡고 허겁지겁 도망쳤고 근처에 있던 몇몇 남자들도 그자의 뒤를 서둘러 뒤쫓았다.

꽉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맺혀 뚝뚝 떨어지는 처참한 광경을 확인한 이는 오로지 필상과 봄뿐이었다.

사건 현장 부근에 선 채 놈들의 줄행랑을 바라보다 증거물인 작은 손거울을 회수하는 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필상과 눈이 마주치자 방긋 웃는 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만든 이유는 놈이 또다시 헛짓을 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음흉한 시도가 있었나요?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눈치를 채지 않았나 싶습니다!

중계방송 주관사는 필상이 두 번째 샷을 할 때도 누군가 방해하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증거를 찾는다면 그 또한 대박 성과였기에 쉬고 있던 카메라들까지 모두 동원해 주변을 이 잡듯이 꼼꼼하게 촬영했다.

하지만 놈들의 수법이 한 수 위였다. 이미 가용한 카메라의 위치와 방향까지 파악한 놈들은 교묘하게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막아섰다.

물론 필상은 그 방해마저도 무시한 채 샷을 할 각오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봄은 그 상황을 묵고하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