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07화 (307/354)

307. 영혼을 탈탈 터는 샷

“괜찮을까요?”

“런이 없는 건 아쉽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다고요?”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필상의 티샷이 끝나자 경쟁자들은 세컨샷 지점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보통은 썰물이 빠지듯 엄청난 인파가 대이동을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워낙 많은 인파가 몰려 18번 홀은 미어터질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티샷 한 순서에 따라 일렬로 걷는 선수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세 선수의 티샷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각자의 표정에 나타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일단 히데키가 가장 안 좋군요. 그런데 어째서 페어웨이에 보낸 게리보다 폭군이 더 여유로울까요?

-일단 3번 우드로 충분한 거리를 확보했기 때문일 겁니다.

-어? 공이 박혔는데 괜찮다는 말인가요?

-어차피 박힌 공은 구제를 받을 수 있고 그 규정에 따르면 폭군은 손해 볼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아! 그게 그렇게 되나요?

필상은 단번에 정확한 지점을 찾아 공을 꺼냈다.

제법 긴 러프였지만 잔디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공의 색깔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완벽히 박혀 있어서 누가 뭐래도 구제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허용된 구제 구역의 일부가 페어웨이에 걸쳤기에 행운이 따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남은 거리는 142야드에 불과했다.

드라이브를 잡았던 우드랜드가 145야드를 남겼기 때문에 티샷 결과가 가장 좋았던 선수는 필상이었던 것이다.

“이거 좀 닦아 줄래?”

“흐흐흐. 정말 괜찮네요.”

“애매하네. 갭 웨지로 풀 샷을 할까? 아니면 피칭으로 컨트롤을 할까?”

미사키의 대답을 원한 질문은 아니다.

그 말을 던진 필상이 주변 상황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본래 이런 경우 필상의 선택은 늘 후자였다.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어 필요한 만큼 컨트롤하는 장면은 필상만의 남다른 기량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도 고심을 하는 이유는 샷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향성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자신이 생각한 크기로 치면 자꾸 그린을 넘어가는 궤적이 그려졌다. 지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팔로 윈드(Follow wind-타구 방향과 동일한 방향으로 부는 바람)가 공중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닌데?”

“네? 뭐가요?”

“지금 뒷바람이 부는 것 같아?”

“아니요. 바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요? 비도 그쳤고.”

애써 감각을 묶지 않아도 이젠 자연스럽게 필요한 정보들이 취합되었다. 중단전이 열리며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짚어 낼 수 없었다.

먼저 샷을 한 우드랜드의 타구도 샷 크기보다 더 날아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소심한 샷을 했기에 타구는 그린 앞부분에 겨우 걸쳤을 뿐이었다.

팬들의 실망한 한숨 소리가 개념 없는 팬들의 함성에 가려 들리지 않았지만 필상은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믿자!’

그걸 믿지 못하면 자신에게 벌어진 일련의 기적을 부정하는 행위라고 판단한 필상은 피칭이 아닌 갭 웨지를 잡았다.

그리고 녹색으로 그려지는 이미지에 맞는 스윙을 했다. 대략 그린에 겨우 걸칠 정도의 부족한 힘이었다. 멀리서 봤지만 모모코는 필상이 충분치 않은 스윙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한마디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 너무 짧지 않을까?”

“아뇨. 정확해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모모코는 확신하는 봄의 얼굴과 타구의 궤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데 높이 치솟은 공은 생각보다 체공 시간이 길었고 떨어질 때는 정확히 깃대를 향하는 모습에 비명이 터졌다.

“으으! 들어가나?”

“에이. 길어요.”

봄은 필상이 마지막 순간에 조금 더 밀어 쳤다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작용한 것이다.

그 결과 공은 깃대를 훌쩍 지나 내리막 라이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린에 크게 튄 공은 기적 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경사를 거꾸로 거스르는 강한 백스핀이 먹기 시작한 것이다.

“와아아아! 백스핀!”

“인 더 홀!”

만약 정상적인 그린 상태였다면 들어가고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축축하게 젖은 그린은 스핀마저도 갉아 먹었는지 홀컵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아쉬운 탄식과 몸부림이 사방에서 속출했지만 필상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신이 의도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무려 US 오픈 연장전이다. 걸린 상금도 많지만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명예는 이루 말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다.

더욱이 필상은 메이저 대회 6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걸렸으며 캘린더 그랜드슬램의 마지막 두 조각 퍼즐만 남긴 상태다. 그런데도 긴장하거나 흥분하지 않고 환상적인 샷을 선보인 것이다.

-와우! 폭군(暴君)!

-정말 기가 막힌 컨트롤 샷이었습니다.

-전 짧을 줄 알았어요. 무려 142야드에요. 갭 웨지를 들고 저리 가볍게 치면 저는 100야드도 날아가지 않을 텐데, 확실히 프로의 임팩트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습니다.

-프로도 다 같은 프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저도 너무 약하게 쳤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타구는 오히려 길었고 그 와중에도 스핀을 먹여 탭인 버디 기회를 만들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 샷 하나로 승부는 결정된 듯 보였다.

이미 샷을 한 우드랜드의 공은 버디를 잡을 가능성이 10%도 되지 않는 거리였고 아직 샷을 하지 않은 히데키의 공은 러프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1년 US 오픈을 빛낼 스윙이 또 나왔다.

쉬익!

필상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히데키의 샷을 지켜봤다.

러프에서의 샷이 쉽지 않음은 잘 알기 때문에 그린에 올리기만 해도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에게서 느껴진 강한 기운은 제게 주어진 난관을 깨부수려는 강력한 의지의 분출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맞은 것 같은 타구는 생각보다 짧았다. 그러나 런이 많은 러프에서의 타구는 꾸역꾸역 그린에 올라온 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깃대를 향해 유영하기 시작했다.

“어? 저게? 저게?”

“안 돼!”

모모코는 타구의 방향에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지만 곁에 섰던 봄은 가차 없이 외쳤다. 들어가면 안 된다고.

남다른 능력을 지닌 봄이 그런 주문을 외운 이유는 그 타구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반증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같은 시간 느긋하게 바라보던 필상의 표정도 붉게 상기되었다.

만약 그게 들어가면 경기는 끝난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순간에 터진 샷 이글 하나에 자신이 꿈꾸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을 하자 아찔했다.

대체 무얼 하고 있던 건가?

-어! 정말! 정말 아깝습니다! 저 공이 어떻게 그냥 홀컵 위를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거죠?

-너무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린이 젖어서 평소보다 느리기 때문에 딱 들어갈 줄 알았거든요. 히데키의 입장에서는 정말 아쉬울 것 같습니다.

-그렇죠. 들어갔다면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러프 샷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틀리지 않은 말이다.

여러 투어에 걸쳐 통산 15승을 거뒀지만 US오픈 우승은 그 무엇보다 큰 가치를 인정받았을 것이다. 필상의 대기록을 막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을 테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외로군!”

“그러게요. 카미카제 같아요.”

“하하하. 자폭이라도 한다는 건가?”

미사키의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승을 못할 것 같으면 같이 죽기라도 하겠다는 독한 의지가 느껴진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골프라는 것이 독심만으로 성취할 수는 없다.

때로 큰 행운이 작용할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수없이 많은 땀과 수련의 결과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히데키는 우승할 자격을 갖춘 선수로 존중받아 마땅했다.

“게리. 수고하셨습니다.”

“하하하. 끝까지 좋은 결과를 빕니다. 미스터 퍼펙트.”

결국 게리 우드랜드는 버디 퍼팅에 실패했고 필상과 히데키는 버디에 성공하며 2차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린을 벗어난 필상은 팬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게리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히데키는 냉큼 자신의 카트에 올라탄 반면, 패자를 우선 챙기는 필상의 모습은 진정한 강자가 누군지를 극단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 같았다.

어찌 보면 승부의 팽팽한 긴장 속에 남을 챙기는 것이 불필요한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행동은 상대적인 법, 히데키가 잘못한 것은 없지만 필상의 여유로운 행동으로 인해 그는 의문의 1패를 당하고 말았다.

-하하하! 폭군이라는 표현이 틀린 건가요?

-플레이 중에는 폭군, 코스 밖에서는 좋은 동료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죄도 없는 히데키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그는 다음 샷에 모든 신경을 기울여도 부족할 테니까요.

-하하하! 그 말씀이 더 아프게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졸지에 한일전이 되었는데, 중계진의 해설은 다분히 편파적이었다. 물론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의 골프팬들이 바라는 방향인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히데키의 우승보다는 필상이 대기록을 달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미운 오리 새끼로 전락한 일본의 신세가 투영되는 순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둘만 남았군요!”

“마쓰야마. 당신의 러프 샷에 깜짝 놀랍습니다.”

“아! 저도 미스터 퍼펙트의 멋진 웨지 샷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하하. 그런가요? 후회 없는 승부가 되길 빕니다.”

“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둘의 승부로 좁혀졌지만 히데키는 여전히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게리를 대하는 필상의 넉넉한 태도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을 법도 한데, 그런 티는 일절 내지 않았다.

역시 속마음을 감추는 재능은 남다른 족속이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었다. 만약 필상에게 각별한 재능이 없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테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반감이 아닌 강한 적대감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기선을 제압하실 거죠?”

“아니.”

아너인 필상은 다시 한 번 우드를 잡았다.

하지만 아까처럼 3번도 아닌 18도 유틸리티 우드였다.

5번 우드 대용으로 사용하며 비거리는 통상 265야드에 맞춰진 클럽이다. 431야드인 18번 홀에서 다시 한 번 치러지기 때문에 코스에 대한 정보는 따로 살필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다들 필상이 과감한 선택을 할 것이라고 봤지만 유틸리티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가는 선택은 의외였다.

아까 히데키의 샷 이글이 나올 뻔했던 순간, 깨달았다.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유 따위를 부릴 여유가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자신의 장점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장타가 필요한데, 필상은 그보다 더 무서운 무기를 감추고 있었다.

-왜 드라이브를 잡지 않죠? 폭군이 아니라면 이런 상태에서 그 누가 드라이브를 잡을 수 있단 말인가요?

-저로서도 좀 의외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던 홀이고 티샷 정확도는 독보적인 선수인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역시 안전한 샷이 최고라고 판단한 걸까요?

-히데키의 샷이 워낙 날카로워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유틸리티를 들고 올라온 선수는 바로 필드의 절대자라고 불리는 공필상 프로라는 겁니다.

-아! 뭔가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하는 거군요. 하지만 아무리 잘 쳐도 270야드일 텐데, 그러면 세컨샷이 160야드 이상이 남습니다. 그걸 붙이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고 해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나 필상의 연습 스윙을 보는 순간, 다들 말을 잃고 말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봄. 지금 오빠가 뭘 하려는 걸까?”

“제 생각에 저 클럽을 부수려는 것 같아요.”

“부수다니?”

“거리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다고요.”

“야! 쉽게 말을 해. 지금 네 말은 저걸로 장타를 때리려고 한다는 거지?”

“네. 흐흐흐.”

“흐으으……. 그렇다면 한 번 지켜볼까?”

함께 있는 이 대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장타를 날릴 것 같으면 그냥 드라이브를 잡으면 되지 않겠나? 굳이 짧은 클럽을 선택해 무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필상의 무시무시한 우드 샷을 직접 접한 뒤에는 그 이유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 터진 타격음부터 전율이 돋더니 까마득하게 치솟은 타구가 쭉쭉 뻗어 나가는 광경에 현기증이 일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실로 무서운 장타가 터졌다.

-어? 어? 타구가 떨어질 줄을 모르네요. 하하하!

장단을 맞춰야 할 해설위원 프랭크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연습 스윙을 할 때부터 강한 스윙을 할 것이라는 예감은 들었다.

평소 늘 한계를 깨부수는 필상이기에 18도 유틸리티로 300야드를 넘길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막상 총알처럼 쏘아지는 타구를 접하자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짝꿍이 말이 없자 챔블리가 타구에 대한 설명을 해야 했다. 화면에는 타구를 추적하는 최신 장비의 데이터가 속속 표기되고 있었다.

-300야드를 넘었습니다, 정확한 캐리만 302야드! 게다가 아직도 구르고 있네요! 아직도 굴러요!

그랬다. 실제 타구의 비거리가 300야드를 넘겼으며 물렁한 페어웨이에 떨어졌음에도 사정없이 런이 발생했다.

워낙 탄도가 낮았기 때문인데, 그런 탄도로 어떻게 300야드를 넘길 수 있었는지가 바로 수수께끼였다.

“저거에요!”

“흐흐흐. 300야드 넘은 거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저기 히데키의 표정을 좀 봐요.”

“아! 저걸 노린 거구나! 상대의 전의를 상실케 하는 샷!”

“영혼을 탈탈 털어 버리는 거죠. 크크크!”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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