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06화 (306/354)

306. 프리 드롭

“오랜만입니다. 미스터 퍼펙트.”

“아! 반갑습니다. 히데키. 마지막 홀의 버디 퍼팅은 정말 멋지더군요.”

“하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히데키가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일본이라면 진저리를 치지만 그래도 사람이 싫은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일본인 아내를 두고 있기 때문에 호의적인 사람까지 경계할 이유는 없다.

이미 여러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히데키는 5살이 어린 선수인데, 경험은 사실 필상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지만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물론 피 튀기는 경쟁 상황에서는 삭막해질 수밖에 없겠지만.

“게리. 오랜만입니다.”

“아, 네.”

웃겼다.

필상과 연장전에 들어가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얼굴을 마주하고도 인사 없이 외면하는 것은 심했다.

설사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히데키와 필상이 인사를 나누면 자신도 자연스럽게 끼어 인사를 나누면 그만인데, 굳이 회피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나이나 어리면 이해를 하겠지만 통산 5승을 거둔 1985년생에 덩치도 곰처럼 커다란 인간이 좀스럽게 왜 그러는지.

하지만 필상은 먼저 안부를 물었고 마지못해 대답하는 그를 보며 싸우기도 전에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묘하네요.

-챔블리. 무슨 뜻이죠?

-미국 내셔널타이틀 대회 연장전에 3명의 선수가 올라왔는데, 한국과 일본 선수가 당당히 나와 있는 광경 말입니다.

-하하하!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대회이기 때문에 이런 해도 있고 저런 해도 있는 법입니다. 신인 스타가 탄생하기도 하고 진정한 실력자가 위용을 발휘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그나마 게리 우드랜드가 미국의 체면을 세웠다고 봐야죠.

-하기야 골프는 개인 스포츠니까요. 그래도 부러워하는 선수나 협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아니, JGTO 같은 경우는 오랜만에 선전한 히데키로 인해 상당히 흥분해 있을 것 같군요.

-제가 접한 소식 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프랭크는 일본의 한 언론사 기사를 언급했다.

필상의 불참 선언과 KLPGA의 흥행으로 한 풀 꺾인 일본 골프계는 US 오픈 3라운드부터 취재 열기가 달아오르고 특집 방송이 줄을 잇고 있었다.

최근 성적이 시원찮던 히데키가 줄곧 선두권을 유지했기 때문인데, 그에 못지않게 다뤄진 기사 내용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필상의 경기 내용이었는데, 기량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기 껄끄러웠는지 유난히 운이 나빴던 플레이들을 강조하며 대기록이 물 건너갔다는 투로 써 갈겼다.

서구인들에 비해 아시아 출신 선수의 체격이 왜소하며 운동 능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대기록 달성이 애초에 무리한 도박이었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프랭크는 바로 그 이상한 대목을 지적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도 아시아에 속한 나라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 같습니다. 본인들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가 볼 때는 상당히 이상한 성향을 지닌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 일본인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죠. 하지만 비뚤어진 우월 의식을 가진 이들이 꽤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거죠?

-과거 아시아의 패권을 쥐었던 제국주의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이들 중에도 동조하는 이들이 많은 걸 보면 확실히 역사 교육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 그렇게까지 봐야 하는 건가요?

-한때 아시아의 선두주자였으나 최근에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몰락하면서 아시아의 지뢰 같은 존재가 되는 것 같은데, 본인들만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프랭크는 의외로 동아시아 상황에 밝았다.

스스로 밝히길 지한파라고 했는데, 일본을 좋아하고 옹호하는 이들이 많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보기 드문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 경향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최근 몇 년 새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크게 호전되며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그들의 흥미를 끄는 이유는 인구나 땅덩이는 보잘 것 없지만 유수의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다양한 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이 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빠르게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기적 같은 경제력, K-POP과 영화, 드라마가 큰 호평을 받고 있으며 고난을 이기고 지켜 온 한겨레의 전통과 역사, 알면 알수록 깊이 빠져든다고들 고백한다.

물론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시키는 첨병으로 필상이 그 역할을 다하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먼저 치면 더 좋을 텐데…….”

뽑기로 순서를 정했는데 히데키, 우드랜드, 필상 순이다. 미사키는 필상의 컨디션이 최고였기에 아너로 나서 장타를 날리면 기선 제압이 가능하다고 봤는지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어차피 US오픈과 같은 메이저 대회를 우승하려면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신들린 샷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한다. 아무리 필상이라도 단판 승부라면 감히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이미 믿기지 않을 멋진 샷으로 버디를 잡으며 연장전에 들어선 선수들이다. 다만 서로를 의식하게 되면 엉뚱한 플레이가 나올 수도 있어 그걸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됐어.”

“왜요?”

“어떻게 치는지 지켜보고 그에 맞추면 되니까.”

가장 먼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는 히데키의 모습에서는 일본인 특유의 비장한 무사도 정신이 엿보였다.

마치 칼을 차고 생사를 건 일기토를 하러 나가는 무장(武將)같았다. 평소에도 늘 지나칠 정도로 진지한 그의 태도는 아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필상과는 사뭇 달랐다.

평정심이 아닌 강력한 승부욕, 그게 그를 지탱하는 정신력의 원천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런데 필상은 그에게서 아쉬운 부분을 찾아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군.”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표정은 장비 저리 가라 할 태세지만 잘 봐! 힘의 밸런스가 지나치게 상체에 쏠려 있잖아. 의욕만큼 체력이 따라 주지 못한다는 거지.”

“그게 보이세요?”

“당겨질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조용히 히데키의 티샷을 지켜봤다.

본인도 체력적인 부담을 느꼈는지 에이밍을 하며 다리를 번갈아 흔들면서 무게중심을 낮게 가져가려는 노력을 했다.

게다가 계속 웨글(Waggle-클럽에 탄력을 붙이는 동작으로 백스윙을 시작하기 전에 손목만으로 가볍게 클럽을 흔들어 굳어 있는 부분을 부드럽게 하는 운동)을 반복하기 때문에 샷 루틴이 평소보다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긴장하는 건가요?

-긴장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걸 얼마나 잘 극복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아! 일단 스윙은 아주 부드럽고 좋네요!

루틴은 길었으나 어드레스를 취하자 과감하게 휘둘렀다.

오랫동안 준비한 스윙이었기에 흠 잡을 데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필상의 예언을 들었던 미사키는 타구의 방향을 주시했다. 그냥 보기에는 당겨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18번 홀은 좌측으로 휘는 홀이기 때문에 적당히 휜다면 나쁠 것 같지도 않았다. 때문에 부드럽게 드로우가 걸리는 광경에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좋은데요?”

“이제부터야!”

필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타구가 강한 훅이 걸리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잡아끄는 것처럼 말린 타구는 다행히 페어웨이에 떨어지기는 했다.

그러나 물렁한 지면임에도 낙하한 공은 페어웨이 경계를 지나 러프로 기어들어 가고 말았다.

비거리는 309야드, 적은 비거리는 아니지만 문제는 러프의 라이가 어떠냐는 것인데, 그건 현 위치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미사키는 얼른 필상의 표정부터 살폈다.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 상황도 종종 알아내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미사키와 시선이 마주친 필상은 애매한 미소를 그렸다.

“왜?”

“어때요? 라이가.”

“쉽지는 않겠지만 130야드면 그린에 올릴 수는 있겠지.”

“아! 괜찮나 보네요.”

“생각하기 나름이지. 그런데 쟤 표정을 봐.”

미사키는 필상의 시선이 닿은 지점, 히데키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로서는 정확한 상황이 확인되지 않을 텐데 이미 전쟁에서 패한 장수처럼 침통한 얼굴이었다.

그나마 공의 라이를 확인하고 평정심을 찾는다면 다행이지만 지금 같은 심리상태라면 좋은 샷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페어웨이가 좁기는 하지만 그래도 러프에서의 샷이 어려운데, 페어웨이를 놓친 것은 아쉽네요.

-힘이 좀 많이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실망할 단계가 아닙니다. 그 샷이 가장 나은 상황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경쟁자들의 샷부터 봐야죠.

-자! 이제 2019년 챔피언과 2020년 챔피언의 샷이 남았습니다. 게리가 좀 흥분한 것 같지 않나요?

-하하하! 원래 혈색이 붉은 편입니다. 제가 유심히 그의 행동을 지켜봤는데, 너무 큰 부담감을 느끼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그냥 자신의 샷만 할 수 있으면 되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루키도 아니고 우승 경험도 많은데 잘 치겠죠!

필상의 대기록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팬들이 많다.

하지만 팔은 역시 안으로 굽는 법, 우드랜드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서자 팬들의 우레와 같은 응원이 터졌다.

문제는 그 응원 소리가 그에게는 압박감으로 작용한 것인지, 그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뿐더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굉장히 빠르게 샷을 감행했다. 에이밍을 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어드레스를 취했고 빈 스윙도 없이 과감하게 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와! 샷 좋은 데요?”

“응. 힘을 빼고 가볍게 쳤어.”

그의 샷은 예상과 달랐다.

급하게 서둘러 미스 샷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봤던 필상도 그의 전략이 먹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무리하지 않고 방향만 정확히 유지하려던 발상 자체가 훌륭했다고 보는 게 적절했다. 역시 경험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들고 있던 드라이브를 미사키에게 건넨 필상은 3번 우드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로 향했다. 드라이브가 아닌 우드를 들고 나서는 필상의 행동에 팬들의 기대에 찬 함성이 쏟아졌다.

-와우! 431야드인데 3번 우드면 충분할까요?

-충분합니다. 그냥 280야드만 보내도 되니까요. 중요한 것은 페어웨이를 지키는 것입니다. 만약 히데키에 이어 게리까지 러프에 들어갔다면 드라이브 장타를 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게리의 현명한 선택을 보고 굳이 장타를 때릴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자! 오늘 폭군의 3번 우드 샷, 이게 이번 대회를 상징하는 샷이 될지, 아니면 대기록을 코앞에 두고 무너진 샷이 될지 다함께 지켜보시죠.

필상은 굉장히 느리게 움직였다. 우드랜드처럼 빠른 샷을 할 경우, 실수할 가능성이 높아 그걸 따라 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평소보다 더 느려 슬로비디오처럼 아주 느린 테이크백, 그건 장타보다는 정확성을 기하려는 확고한 의지의 산물처럼 느껴졌다.

따앙!

누가 느리다고 했는가!

올라갈 때는 거북이처럼 더뎠지만 내려오는 클럽 헤드의 스피드는 총알처럼 빨랐다. 그냥 공을 부숴 버릴 것처럼 무지막지한 임팩트가 이뤄졌다.

그와 동시에 타구의 안착을 비는 무수한 팬들의 응원의 함성이 골프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어허! 드로우 샷을 건 건가요?

-네. 오른발을 살짝 뒤로 뺐습니다. 딱 저만큼만 빼도 드로우가 걸립니다. 아마추어들의 경우 지나치게 빼는 사람이 많은데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스탠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스윙 궤적이기 때문입니다.

-아! 인에서 아웃으로 빠져나가는 궤적 말씀이군요.

육안으로 식별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높이 치솟은 타구가 떨어지려면 한참 걸릴 것이기 때문에 화면에는 필상의 스윙이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었다.

그런데 프랭크가 말했던 궤적, 그리고 평상 시 필상의 스윙 궤적이 한 화면에 비교되면서 동시에 비쳤다.

확실히 구분될 정도로 인에서 아웃으로 밀어치는 동작을 확인한 시청자들은 이어서 비친 공의 궤적에 입을 쩍 벌렸다.

홀이 꺾이는 지점의 우측에 페어웨이 벙커가 하나 있는데 거기까지의 거리는 268야드였다. 그런데 필상의 타구는 그보다 훨씬 우측으로 출발했다.

만약 드로우가 걸리지 않는다면 나무가 겹겹이 방해하는 숲으로 들어갈 방향이었다. 그런데 힘이 빠지는가 싶은 순간, 환상적인 곡선이 그 자취를 드러냈다.

“됐어요!”

“어? 봄.”

“네. 언니. 저 왔어요.”

“어딜 갔다 온 거야?”

“숙소에요. 뭘 했는지는 나중에…….”

대화가 길어질 수 없는 이유는 타구가 랜딩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많이 휘었는데도 공은 우측 벙커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 러프와 페어웨이 경계선에 떨어졌다.

드로우 구질이기 때문에 좌측으로 튈 가능성이 높지만 그 순간, 심장이 떨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운이 없으면 이상하게 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으! 저게 뭐죠?

-박힌 것 같습니다.

-벙커 바로 옆의 러프에 떨어졌는데요?

-네. 살짝 높은 벙커 턱에서 물이 흘러내린 낮은 지점이라면 질퍽한 진흙일 수도 있습니다.

-러프에 들어간 공은 구제를 받지 못하…… 아니, 일반 구역이기 때문에 가능하겠군요. 프리 드롭!

2019년에 바뀐 규정에 의하면 골프코스는 5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티잉 구역, 벙커, 페널티 구역, 퍼팅 그린, 그리고 그 외의 모든 플레이가 가능한 지역을 일반 구역이라 칭한다.

또한 공이 일반 구역에 박힌 경우에 한해 구제를 받을 수 있다. 다만, 박힌 볼의 정의는 공의 일부가 잔디가 아닌 지표면의 아래로 들어간 상태를 말한다.

그럴 경우, 구제 구역은 기준점으로부터 한 클럽 이내로 기준점보다 홀에 가깝지 않은 구역으로 일반 구역이어야 한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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