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05화 (305/354)

305. 역시 US오픈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은 써야지. 상종하지 말아야 할 뿐!”

“치! 비오는 날 먼지 나게 맞고 싶은가 봐요.”

“어허! 신경 쓰지 말라며?”

“그러니까요!”

모두가 필상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다.

편협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사고는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건 웬만한 성인이라면 어쩔 수 없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에 바뀔 수 없다. 자신이 배우고 경험한 것들, 이해가 맞물리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보여 준 생생한 기록들은 뭇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몸을 더 낮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건, 저건 아니죠! 아무리 특정 선수가 싫어도 그렇죠. 경기에 임하는 선수에게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골프는 아주 민감한 운동입니다. 선수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돌출 행동은 자제해야 합니다. 신사의 스포츠인 골프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를 응원하는 것 외에도 다른 선수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사실 말이 나와서인데, 미스터 퍼펙트는 그런 편견과 선입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었죠. 당당한 실력으로 연거푸 우승했지만 거의 10승을 거두기 전까지는 전문가들 중에 그의 기량을 인정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의 국적이 미국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백인 선수였다면 어땠을까요?

말이 필요치 않은 얘기였다.

모든 스포츠를 다 묶어도 필상처럼 큰 슈퍼스타는 없었을 것이다. 주 무대가 미국이고 동양계 선수이기에 이 정도였다.

지금 목표로 삼고 있는 대기록을 달성한다면 상황은 또 달라질 수 있겠으나 아직은 시샘하는 이들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다.

“드라이브.”

“런이 거의 없겠죠?”

“응. 바람은 거의 없으니까 그냥 꽂힐 거야.”

“거의 캐리만 확보된다고 봐야겠네요.”

“입은 그만 풀어도 되니까 말 시키지 마.”

“윽!”

필상은 여유로웠다.

날씨도 칙칙했고 방금 전에 신경을 건드리는 작자의 방해도 받았다. 하지만 자신감이 충만했다.

더 연구하고 노력해 봐야겠지만 지난밤 명상 중에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중단전이 열리면서 자신의 기량은 한층 더 심오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이젠 애써 토납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주변의 기운이 모든 행동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능력을 봉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아직 충분치 못한 수련 탓일지도 모르지만 이틀 동안 깨닫고 체득한 것만으로도 이전의 기량보다 훨씬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깡!

-우후! 공이 깨질 것 같습니다!

-체중이 불었나요? 대회 중에 그럴 리는 없는데?

프랭크는 필상의 비거리가 줄어든 것이 체중 감량 때문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래서 필상이 1번 홀 티샷을 315야드나 보내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런이 거의 없는 코스 상태였고 비까지 내리고 있어서 300야드를 넘기는 선수는 거의 없었기에 더 놀라웠다.

하지만 필상의 날카로운 샷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로 잰 듯 정확히 떨어진 세컨샷이 홀컵에 바짝 붙자 사방에서 함성 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중계진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어제도 1번 홀에서 버디를 기록했지만 이후 맥을 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 안녕하세요?”

“네. 수고 많았죠?”

“수고는 프로님이 하셨죠. 그런데 연락도 없이 어떻게?”

경기에 집중하던 서 팀장은 누군가가 뒤에서 자신을 꼭 껴안자 기겁했다.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며 안다고 해도 이렇게 스킨십을 나눌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

한국에 있을 모모코가 지금 US 오픈이 열리는 코스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기야 자신이 아내라도 필상의 힘든 상황을 안다면 당장 달려왔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서 팀장, 네가 일 잘하는지 보러 왔어.”

“아! 대표님.”

“경기를 봐야 하는 건 아는데, 부탁 좀 할 게 있어.”

“무슨 부탁이요?”

“지금 클럽하우스에 가면 수미랑 어머님이 계셔. 아무래도 날씨가 을씨년스러워 경기가 끝날 무렵까지는 숙소에 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제가 모시고 가 있다가 시간 맞춰 올게요.”

“미안해서 어쩌지?”

“그게 제 일인데요 뭘.”

“근데 우리 봄 프로는 어디 갔어? 경기가 한창인데.”

“아! 뭘 좀 사러 간다고.”

“뭘? 여하튼 좀 특이한 성격이라니까!”

이 대표와 모모코가 수미를 꼭 안고 떼어 놓지 않는 어머님을 모시고 미국에 건너온 것이다. 성적은 우승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승을 축하하기보다는 힘들어하는 필상을 하루라도 일찍 보기 위해 힘든 여정을 날아온 것이다.

서 팀장이 클럽하우스로 향하자 이 대표와 모모코는 필상의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순간인가?

그런데 이제 막 201야드 파3, 3번 홀 티샷을 멋지게 붙인 필상이 샷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이쪽으로 달려왔다.

둘이 서 있는 곳은 엄청난 인파로 인해 겨우 시야가 트일 정도로 비좁은 공간인데, 필상은 이미 모모코의 기운을 읽었던 것이다.

“모모코!”

“오빠!”

오늘 엄한 자가 돌출 행동을 하는 바람에 필상의 조가 경기를 할 때는 갤러리 라인이 동원되었다.

그래 봐야 얇은 끈이지만 선수들의 원활하고 편안한 플레이를 돕기 위해 팬들은 그 라인을 일절 침범하지 않았다.

그런데 팬이 아닌 선수가 그 라인을 넘어 팬들 사이로 들어서자 진행요원들이 깜짝 놀라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목격한 것은 불미스러운 광경이 아닌 진한 포옹이었다. 뭔가 떠올린 사람들은 필상의 품에 안긴 인형처럼 깜찍한 여자가 바로 필상의 아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둘이 함께 찍은 그림 같은 광고 화보가 미국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물이 더 낫다나?

워낙 인상 깊었는지 선수들의 경기 내용을 비춰야 할 중계 카메라에 그 광경을 고스란히 잡았다.

-오호! 골프 여신이 왕림하셨군요!

-미야 모모코! 미스터 퍼펙트의 아내이자 일본을 대표하는 프로 선수입니다. 지금은 KLPGA에서 활약하는데, 이미 올해 2승을 거두며 출산 전의 기량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합니다.

-광고에 워낙 자주 등장해서 그런지 저도 낯이 익네요. 팬들도 그녀를 알아보고 신기한 듯 쳐다보며 박수를 치는군요.

-미스터 퍼펙트가 집을 떠나온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또한 건강에 문제가 있어 보여 달려온 것 같습니다. 진즉에 오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갓난아이가 있어서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랑은 위대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사랑의 위대함이라……. 재미있네요!

좀 오버한 것은 맞지만 좋은 그림에 그 정도 해설은 보태져도 무방할 것 같았다. 일단 팬들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면 메마른 승부의 순간에도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남들의 시선이 따가울 만도 한데, 필상이나 모모코나 거리낌이 없이 서로 그리웠던 마음을 아낌없이 나눴다.

폭 껴안고 가볍지만 입술까지 맞추는 모습에 휘파람을 부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해후의 시간은 넉넉히 허용되지 못했다.

필상과 함께 플레이하는 동반자가 주어진 시간 안에 티샷을 하기 위해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쉬움을 뒤로 한 필상은 다시 일반 구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수시로 시선을 맞추며 간지러운 미소를 주고받았다.

“프로님.”

“아!”

동반자들의 티샷이 끝나 이동할 타이밍이 되었던 것이다. 걸으면서도 자꾸 아내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자 보다 못한 미사키가 한마디 던졌다.

“집중하세요. 사모님도 왔는데 경기를 망칠 수는 없잖아요.”

“사모님?”

“호칭이 마땅치 않아요. 저보다 어리지만 한국에서는 남자 서열을 따라간다면서요.”

“하하하! 누가 그래?”

“오빠가요.”

하기야 그렇기는 하다.

나이가 위라고 모모코에게 말을 놓기는 애매했다.

더욱이 모모코는 유부녀라서 이 대표도 늘 조심한다. 표현이 마땅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추천할 호칭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미사키가 말한 내용이다.

집중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한 필상은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이내 경기에 집중했다.

3.5야드지만 쉽지 않은 라이였는데, 버디로 연결하고야 말았다. 칭찬이라도 받고 싶었는지 공이 홀컵에 들어가자 아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손 하트를 날렸다.

-하하하! 저런 모습, 아주 이상할 것 같았는데 막상 보니까 그렇지는 않네요.

-걱정입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한국 남자들의 다정다감한 모습, 이젠 제법 알려진 사실인데, 이제 TV 중계에 잡혔으니 매일 요구할 거 아닙니까?

-누가요?

-저를 비롯한 우리 아내들 말입니다.

-아! 그러면 폭군은 남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는 건가요?

-아마 오늘 이후 여성 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겠죠!

농담처럼 주고받는 말이지만 여자들에게는 정말로 심각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 남자들이 특별하다는 것은 이미 감춰진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K-POP을 좋아하는, 한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람들은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본인들이 바라는 대로 기형적으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만도 한데, 한국 문화의 우수성이 눈부신 경제 성장과 맞물려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높이고 있으며 국운이 크게 융성한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헐벗고 굶주렸던 동양의 작은 나라 이미지가 몇 년 새에 급격한 이미지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추락하고 있는 일본과 대비되며 더욱 돋보이는 경향이 심했다.

“괜히 걱정했나 봐요.”

“그러니까! 좀 마른 것 같기는 한데, 표정도 아주 밝고 오히려 힘은 더 넘치는 것 같아.”

“이제 3타 차까지 따라붙은 거죠?”

“응. PGA 챔피언십의 최종 라운드가 재현될 것 같아.”

“그럼 어머님도 정말 좋아하실 것 같아요.”

“여하튼 좋겠다.”

“흐흐흐……. 언제나 그랬어요. 오빠는 그렇게 맥없이 무너질 사람이 아니거든요.”

이 대표가 좋겠다며 부러워하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사흘 내내 고생했지만 결국 우승할 것이라는 확신은 기본이었고 오로지 아내만이 누릴 수 있는 야한 행복, 그게 부러운 것 같은 뉘앙스였다.

하지만 배시시 웃은 모모코는 모른 척하며 필상을 두둔하기 바빴다. 본인도 염려하지 않았을 리 없지만 그건 까맣게 잊은 듯 조잘조잘 떠들었다.

모모코는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도 필상의 경기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봤을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은 필상에게 다르게 다가왔다.

필상은 좋은 샷을 할 때마다 모모코가 있는 방향을 보며 큰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화면에 잡힌 그 표정은 뜨거운 경쟁의 한가운데 있는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이걸 먼저 넣고 기다려 봐야겠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못 넣더라도 폭군의 우승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봐야 합니다. 이미 역전한 상황이고 뒤에 있는 9명 중에 유일하게 폭군을 위협하는 선수는 1타 차 공동 2위인 우드랜드와 히데키인데, 남은 두 홀에서 타수를 줄이기는 정말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골프는 장갑을 벗어 봐야 안다고 하니까 일단은 저걸 집어넣고 여유롭게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 퍼팅 루틴에 들어갔습니다.

필상은 최종 라운드에서 버디 7개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엉뚱한 실수가 나오면서 더블보기를 하나 적어 낸 것이 옥에 티였다.

하지만 뒤에서 네 번째 조에서 출발한 필상이 최종 성적 -2를 기록하면서 뒤따라오는 선수들을 오히려 긴장시켰다.

분위기대로라면 우승의 8부 능선을 넘었다고 봐도 되는데, 들어갈 것 같던 퍼팅이 그냥 지나가면서 사위가 조용해졌다.

그래도 괜찮다던 해설자 프랭크도 잠시 말문이 막혔는지 침묵을 지켜 챔블리는 얼른 수습에 나섰다.

-어려운 라이였습니다. 평소 저 정도 거리의 퍼팅 성공률이 무척 높지만 이미 익숙해진 지난 사흘간의 그린 스피드와 달라서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페어웨이가 물렁해져 볼이 튀어 험지로 들어갈 확률은 확연하게 줄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페널티가 발생했다.

자꾸 공이 땅에 박히고 이물질이 범벅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제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지만 필상을 제외하면 하위권에 머문 몇몇 선수들만 언더파를 기록했을 뿐, 선두권은 대부분 타수를 잃었다.

하지만 우드랜드가 442야드로 조성된 17번 홀에서 롱 퍼팅을 구겨 넣으며 필상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히데키마저 18번 홀에서 버디에 성공하며 공동 선두는 3명으로 끝이 났다.

플레이오프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역시 US 오픈답습니다.

-저는 솔직히 두 선수가 이렇게 추격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지만 추격에 성공하면서 오히려 두 선수가 선기를 잡은 상황인 거죠?

-보통은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그들이 상대해야 할 선수는 폭군입니다. 다른 조에서 플레이할 때와는 느낌부터가 다를 겁니다.

-아! 그것도 그러네요. 하하하!

승부의 향방은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경기를 마치고 모모코와 나란히 서서 닭살 돋는 장면을 연출하던 필상도 경기위원의 호출을 받고 두 선수와 조우했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