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 프리퍼드 라이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연락을 받고 얼싸 좋다 나타난 기자들이기에 감사를 표하는 필상에게 도리어 고마워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필상을 보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사말이 끝나자 질문이 와르르 쏟아졌다.
-최종라운드에서 5타 차를 뒤집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도 적지 않은데,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먼저 열렬히 응원해 주신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 송구하게 생각하며 성적과 상관없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승하겠노라 다짐이라도 하라는 투였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무모한 제안인지 그들도 모르지 않는다. 예선에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으나 오늘 필상은 정말 흠 잡을 데가 없는 경기를 펼쳤다.
그런데도 선두와 5타 차 공동 9위에 머물렀다. 이는 곧 내일 아무리 선전해도 우승을 장담하기는 어려운 타수 차였다. 행운의 여신이 옴팡 깃들지 않는다면.
참석한 6명의 기자들도 현재 대회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어서 자신들이 바라는, 또 모든 골프팬들이 희망하는 대기록이 멈출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진한 아쉬움을 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의논해 보고 싶은 사안이 있어서 대화를 요청한 겁니다.”
-기자들과의 대화라고 말씀하시니 보다 편안하게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까?
“네. 제가 제법 잘나가는 프로지만 대회 분위기나 팬들의 반응과 생각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기탄없이 의견을 나눠 보려 합니다.”
-대체 무슨 사안인지 궁금하군요.
사실 기자들은 대충 감을 잡았다.
그런 촉이 없으면 언론에 몸을 담그고 버티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필상의 자의적인 생각과 판단이어야 기사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이 대회에서 코스 세팅에 대한 말들이 많더군요.”
-그렇습니다. 직접 경기를 해 본 공 프로님의 생각과 느낌을 말씀해 주시면 저희도 힘을 보태겠습니다. 하하하!
가지들의 표정은 거의 똑같았다.
자신의 예상이 맞아 흐뭇한 얼굴.
하기야 필상의 오늘 경기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하루에 10언더도 칠 수 있다는 필상이 최선을 다했음에도 성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코스 상태를 좋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린은 여타 대회들도 비슷한 추세를 보이지만 정리되지 않은 길고 질긴 러프와 딱딱한 페어웨이가 선수들의 경기력을 무너뜨린다는 의견에 저도 한 표를 던집니다.”
-다양한 불만이 폭주하지만 그 두 가지가 가장 큰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공 프로님의 솔직한 의견을 들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가치도 없겠군요!
필상은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프로를 아마추어로 만드는 코스 세팅!
변별력이 떨어지는 코스 세팅!
거의 경기위원회에 폭탄을 던지는 것 같은 사이다 발언에 기자들은 신바람이 났다. 필상은 일개 선수라고 치부하기에는 골프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너무 짙고 길기 때문이다.
결국 기자들은 필상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고 인터뷰를 자청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상상한 것보다 훨씬 강력한 발언에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듯, 골프코스의 세팅은 골퍼들의 즐겁고 유익한 플레이를 위해서 조성되어야 합니다. 팬들의 생각을 무시한 경기 방식이 어떻게 인정을 받으며 선수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대회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서두가 너무 거창해서인지 기자들은 순간 헷갈렸다.
하지만 발언의 핵심은 분명했다.
골프장은 기업이나 개인의 소유이고 대회를 주최하는 조직은 존재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골퍼들을 위해 소용되어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
선수들의 기량이 상향평준화되고 과학의 힘으로 장비가 초현대화를 이루는 까닭에 코스의 난이도를 높이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게 선수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가 되어야 하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정한 방식이어야 한다.
전통이나 역사를 읊조리는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은 폭발하고 있는 골프 붐에 오히려 찬물을 끼얹는 행위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공 프로께서 생각한 대안은 있으십니까?
“코스 세팅을 강제할 규정이 없다는 것이 더 놀랍습니다. 대회를 주최하는 위원회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방치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R&A와 USGA에서 권장하는 기준은 있지 않나요?
“권장사항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규정을 가장 잘 준수해야 할 PGA가 자신들이 주최하는 대회부터 무시하고 있는데, 어느 경기위원회가 그걸 지키겠습니까!”
이건 그냥 대놓고 쏘는 함포사격이었다.
어찌 되었든 필상은 PGA 소속 프로 선수였고 규정을 어길 시에는 강력한 제재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조직이다.
그런데 대놓고 비판하는 모습은 위험천만해 보이면서도 일면 너무도 당당해 쓴웃음이 절로 지어질 정도였다.
-발언이 너무 센 거 아닙니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에 상관없습니다. 많은 관계자들의 심사숙고한 발언을 경청하지 않는다면 그 조직은 생명이 다한 겁니다. 저는 PGA를 비롯한 유수의 골프 협회들이 이 사안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의견을 밝혔지만 그건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뒷받침해 주는 조미료였다. 기자들은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부지런히 원고를 송부하며 특종 경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초대받지 못한 언론사들도 비슷한 시점에 동일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필상이 인터뷰를 진행할 때, 또 다른 유명 인사들이 같은 주제로 발언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는 필 미켈슨, 태국에 있는 타이거 우즈가 필상과 미리 의견을 조율하고 동시에 기자들 앞에 섰던 것이다.
“혹시 TPK가 거론되지는 않았나?”
“네. 세 분이 같은 의견을 내자 아주 적극적으로 호응한 선수들이 많아요. 특히나 각국을 대표하는 주요 선수들이 나선 것이 주효한 것 같아요.”
“음……. 아주 바람직하네.”
TPK의 세 주주가 동시에 의견을 낸 것이 께름칙했다. 아무리 위상이 높아도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보일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기 때문인데, 친분 있는 이들도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미국은 물론 영국, 호주, 남아공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 선수들도 점차 심각해지는 일관성 없는 세팅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불만과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에 PGA는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당장 미국의 내셔널 대회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자 경기위원회는 발칵 뒤집혔다.
“주최 측이 당황스럽겠군!”
“벌써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러프는 건드리지도 않지만 살수차를 동원해 페어웨이에 물을 뿌리는 것 같았어요.”
“비가 온다고 하지 않았나?”
참으로 주먹구구식 행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린과 러프는 그대로 두고 일단 가장 문제시 되는 페어웨이부터 손을 댄 것이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한계가 있을 텐데, 차라리 기우제나 드릴 것이지!
필상도 잠시 연습을 멈추고 코스를 정비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대회 중에는 코스 관리에 엄청난 신경을 쓴다. 잔디를 자르고 디봇을 정리하며 그린은 각별히 관리해야만 한다.
“헛수고를 하는군!”
“그래도 물을 뿌리면 훨씬 낫지 않을까요?”
“팬들의 의견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좋은데, 모든 일에는 적정한 시기라는 것이 있는 법이거든!”
서 팀장과 미사키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봄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마치 무슨 뜻인지 이해한다는 듯.
시간이 지나면 이해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서 팀장은 그날 밤 자다 말고 화장실이 급해 일어났는데, 깜짝 놀랐다.
밤새 소나기가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름이 돋아 테라스에 나가보니 주변이 다 흥건했다. 페어웨이에 물을 뿌린 덕에 최종 라운드는 질퍽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날씨가 제법 싸늘하네요! 낮이 되면 기온은 올라가 선수들의 플레이에 지장은 없겠지만 지난밤 폭우로 인해 코스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보입니다.
-네. 날씨도 예측하지 못하고 어제 저녁 내내 물을 뿌린 주최 측이 아주 난감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딱딱한 것보다는 낫지 않나요?
-물론 프리퍼드 라이 룰을 적용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 또한 상당한 운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번 US오픈은 이래저래 오명을 남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 티오프가 시작될 즈음에도 비는 뿌렸다.
그냥 이 정도 비는 상관이 없는데, 이미 지난밤 상당한 침수가 진행된 구역에는 가랑비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중계가 시작되자 날씨부터 화제에 올랐다.
-어제 난리가 났더군요!
-아! 몇몇 선수들의 인터뷰 말씀인가요?
-네. 골프 팬들의 반응도 아주 뜨거웠죠. 최근 몇 년 새에 뚜렷하게 드러난 썩 좋지 못한 경기 양상에 대한 비판이 이렇게 거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보는 재미가 반감된 부분이 결정적인 것 같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도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모습, 아름답지는 않거든요. 멋진 모습을 보며 본인들도 따라 하고 싶어져야 하는데, 아마추어와 구분되지 않는다면 관심이 수그러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는 솔직히 좀 걱정스럽더군요. 특히나 폭군 인터뷰 내용은 사무국 측에서 심한 도발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아마 책임을 지고 있는 핵심 간부들은 오히려 불안했을지도 모릅니다.
PGA는 세계 최고의 무대다.
권위는 물론 보유한 실질적인 권력도 만만치가 않다.
자신들의 행사에 대치되는 언행이나 행동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했던 적도 많다. 아니, 과도할 정도로 조직 우선주의로 일관해 왔다.
그런데 어제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기사를 확인하고는 늦은 시간임에도 PGA 주요 인사들이 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권위에 도전하는 선수들 중에 몇몇을 본보기로 징계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대부분의 인사들은 우리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다만 공개적인 입장 표명은 뒤로 미루고 일단 최종 라운드를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중에 하나가 비가 올 줄도 모르고 페어웨이에 물을 퍼부은 것이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코스 세팅을 수정한 것에 대한 팬들의 반응이요.”
“비웃음을 샀겠군!”
아이언 연습을 마친 필상이 우드로 넘어가려던 차다.
그런데 나란히 뒷자리에 앉은 세 여자가 열심히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필상의 샷 점검을 해도 시원찮을 미사키마저 시시덕대며 쑥덕거린 이유는 팬들의 실시간 반응 때문이었다.
“날씨를 체크하지 않고 무조건 물을 뿌린 경기위원회의 어설픈 행정력에 대해 심하게 성토하고 있어요.”
“그래도 나름 위원회에서 정성을 쏟은 건데, 팬들의 반응에 어이가 없겠군!”
“본인들이 자초한 거잖아요. 그나저나 비에 젖은 코스 적응 훈련을 해야 하지 않나요?”
“우드도 잡고 천천히 나가 보지 뭐.”
신발 여유분을 따로 챙겨야 할 만큼 지면이 축축했다.
이런 라이에서는 정상적인 샷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필히 적응해야 한다. 찍어 치기보다 쓸어 쳐야 하기 때문이다.
찍을 경우 물렁한 땅을 파고든 클럽은 흙과 물까지 튕기며 의도한 거리에 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어프로치는 더 민감해지기 때문에 필상도 바짝 집중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출전 시간이 되어 필상은 1번 홀로 이동을 시작했다. 비싼 티켓이 아까워서였는지,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우산을 든 갤러리들이 밀려들어 아주 혼잡했다.
물론 필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뜨거운 갈채가 줄을 이었다.
“우승 갑시다!”
“폭군. 파이팅!”
영어 응원에 간혹 한국말도 섞여 있는 것을 보면 한인들도 상당히 많이 찾은 것 같았다.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는데, 기분이 좀 묘했다.
국기는 나라를 상징하는 징표인데, 특정 정치 세력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여하튼 혼잡한 와중에도 팬들의 성원에 감사를 표하며 이동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이동 경로는 진행요원들이 곳곳에 서서 확보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라인을 넘어 온 한 남자가 필상에게 뭔가를 휙 던졌기 때문이다.
“으흐!”
하얀 분말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걸 본 필상은 본능적으로 피했으나 깜짝 놀란 갤러리들도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문제는 겹겹이 쌓인 인파로 인해 넘어진 사람이 속출하는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밀가루입니다. 괜찮으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군중이 밀집한 장소였기에 갑작스럽게 퍼진 하얀 분말을 오해할 소지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사태를 일찍 파악한 필상은 대처가 가능했지만 갤러리들은 식겁했다.
그런데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외침이 들려왔다.
“싫으면 너희 나라로 가! 어디 건방지게…….”
진행요원 여럿이 이런 상황을 상정한 교육을 받았는지 백인 남성을 재빨리 둘러싸 필상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그러자 미리 준비라도 한 듯이 구호를 반복해서 외쳤다. 워낙 비이성적인 언사라서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그 분위기를 봤다면 물러설 만도 한데, 소리까지 고래고래 지르는 통에 결국은 경비들에게 끌려 나갔다. 아마 퇴장 조치를 받을 것 같았다.
보기 드문 필상의 안티 팬이었던 것이다.
양지 뒤에는 늘 음지가 있다. 열성 팬이 늘어난 만큼 안티 팬도 덩달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주로 필상과 경쟁하는 유명 선수들은 필상을 곱게 보기 힘들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