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내 안에 폭탄
“오라버니보다 제가 더 절실한 문제거든요.”
“그렇기는 하지.”
“제가 한 번 시도해 볼 테니까 좀 봐 주실래요?”
“그래.”
연습이라도 하자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일단 연습은 딴전이었고 봄이 실험이라고 말했던 사안에 대해 확인하기 위해 둘은 마주 보고 좌정했다.
주변을 슥 둘러본 이유는 지금 둘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은밀한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마주 앉으니까 좋네요.”
“흰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내력을 방출해 봐.”
“치! 하여튼 목석이라니까!”
“목석? 넌 거울도 안 보고 다니냐!”
“윽!”
기껏 예쁘게 차려 입고 왔던 봄은 그 한마디에 살쾡이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담담한 필상의 시선을 대하자 본론을 떠올리며 마침내 중요한 실험을 개시했다.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더니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하자 코에서부터 시작해 전신의 모공에서 하얀 아지랑이들이 살랑살랑 피어올랐다. 자신이 품고 있는 기운을 필상이 가르쳐 준 토납법을 운용하며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대체?’
필상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이능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렇지 않다면 봄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가 느껴질 리가 없지 않겠나.
평범한 사람이라면 파악할 수 없는 감각이 동원된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 문제는 차후 다시 확인하기로 하고 봄의 몸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면밀하게 살폈다.
그런데 전제부터가 틀렸다. 둘은 서로 상이한 기운을 품었을 뿐더러 후천적인 필상과는 달리 봄은 천형의 몸이었다.
그래서인지 기운을 배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봄의 수련이 부족한 면도 있지만 오랫동안 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진원지기는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고 후천적으로 취득한 기운들이 먼저 배출되었다.
‘도돌이표인가?’
흩어지는 내기의 대부분이 다시 봄의 몸으로 흡수되는 장면을 보면서 경과 또한 자신과는 상이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꾸준히 내력을 비우려고 노력하자 어느 정도의 성과는 나타났다. 문제는 그게 과연 본격적인 시도를 하는 잣대로 적당한지 여부였다.
더 긴 시간이 요구된다는 판단이 서는 순간, 필상도 오랜만에 토납법을 운용하며 몸 안의 변화를 살폈다.
‘없어!’
놀랍게도 자신이 기운을 모았던 하단전은 깨끗했다. 그래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봄의 생각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려 했다.
그런데 운기를 멈추려는 순간, 전신에 아주 청명한 기운이 삽시간에 쫙 퍼지는 것을 체험했다.
‘이건 뭐지?’
정확한 지점을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하단전이 아닌 가슴 부위에 그 기운의 원천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과거 하단전에 축기했던 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미약했다. 이런 미세한 진원지에서 어떻게 전신에 퍼질 수 있는 기운을 발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고 결국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중단전이라고 했던 공간이다. 하단전은 말끔히 비워졌으나 새로운 공간에 더 정순한 기운의 싹이 튼 것이다.
어쩌면 그건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단초라고 해도 무방했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전혀 토납을 하지도 않았고 하고자 하는 의사도 없었는데, 그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멈췄던 토납을 하며 운기를 하려고 하자 순식간에 그 청명한 기운이 전신에 퍼지며 일시에 준동한 것이다.
“오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인지도 못하는 사이, 필상은 무아지경에 빠질 만큼 토납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인시키려고 토납을 멈추고 눈을 뜬 봄은 앞에 앉은 필상의 몸에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제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현상이 필상의 주변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빛 무리, 정확히 표현하자면 필상의 몸에서 빛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후광이라고 봐야 할 신성한 기운이 필상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봄의 음성을 들은 필상은 그제야 자신이 깊은 명상에 빠져 있음을 깨닫고 서서히 운기를 멈췄다.
“네 말이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어.”
“뭐죠? 성인(聖人)이라도 된 건가요?”
“어쩌면……”
“무슨 대답이 그래요?”
“내 몸에 축기했던 기운이 다 사라진 건 맞아.”
“그럼 제 말이 틀린 거잖아요.”
“하지만 내 몸이 새로운 단계에 돌입한 것 같아.”
“혹시 업그레이드라도 된 건가요?”
“아직은 어설퍼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른 바 중단전이 열린 것 같아.”
“주, 중단전이요?”
봄도 인체의 신비에 대한 다양한 서적을 접했다.
얼토당토않다고 치부하는 책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이 평범하지 않은 몸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필상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인간에게 허락된 또 다른 신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천형에서 벗어났고 남다른 성공을 거두고 있으니 당연했다.
때문에 중단전의 의미도 알고 있었다.
실제 자신도 하단전에 축기를 하게 되면서 인간의 내공에 대한 이해와 확신은 했지만 중단전이 실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상이 지금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컴컴한데, 지금 몇 시나 됐지?”
“어머! 아홉 시가 다 됐어요.”
시간이 많이 흐른 게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기척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여기 9시까지 빌린 건가?”
“네. 주변의 시선을 돌릴 공간이 별로 없어서 9시까지 비워 달라고 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일단 가자.”
이럴 것 같았으면 그냥 숙소로 가면 될 일이었다.
미사키나 서 팀장이 신경 쓰였으면 봄의 숙소로 가면 된다. 아마도 봄은 사실을 확인하고 그게 샷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확인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버뮤다 해협이 바라다 보이는 자연지기가 풍성한 장소였기에 보다 정확한 실험이 진행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다들 걱정할 테니까 돌아가서 같이 식사부터 하고 숙소로 가 있어.”
“오실 거죠?”
“그래.”
기껏 작정하고 결단한 일이 도로 아미타불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아쉽기는커녕 필상의 표정은 밝았다.
새로운 경지에 대한 기대감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실제 투어 경기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쉽지 않다는 것도 더불어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도 초월적인 능력에 기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식사를 마친 후 봄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그 내용을 봄과 공유하며 그녀에게도 더 밝은 미래가 열려 있음을 주지시켰다.
-와우! 폭군! 오늘은 뭔가 특별해 보이죠?
-언급하기 껄끄러웠으나 공동 13위, +3의 성적은 필드의 지배자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틀 동안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나 오늘은 단단히 작정한 것 같습니다.
-시원시원한 장타를 보니 너무도 반갑습니다. 하하하!
무빙 데이 첫 티샷을 장타로 장식했다.
어젯밤 중단전의 존재를 확인한 필상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체중이 늘지 않았으나, 또 권능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으나 샷은 힘차고 정확했다.
역시 심리적 안정감이 크게 작용한 듯.
“330야드 정도 나온 것 같아요.”
“거리보다 페어웨이를 지켰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하하하!”
“네. 대체 어젯밤에는 어디서 주무신 거예요?”
그런 질문을 예상치 못했던 필상은 당황스러웠다.
외박을 한 것은 맞지만 잠을 자지는 않았다. 새로운 경지에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 다가왔을 뿐이다.
다만 미사키가 괜한 오해를 할 것 같아 그게 걱정스러웠다.
“안 잤어.”
“네? 그럼 밤새 뭘 하셨는데요?”
“뭘 하다니?”
“아니에요…….”
잠을 자지 않았다는 말이 더 큰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필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의아해도 필상의 순수한 마음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미사키나 서 팀장은 필상이 어제 바로 옆에 붙은 봄의 숙소에서 밤을 보낸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신경이 필상에게로 향하고 있으니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어젯밤 아주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거다. 비우려고 하면 할수록 채워진다는 이치, 만약 결단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새로운 길은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단전을 열고 자신의 지난 상태를 되돌아보니 자신은 너무 위험한 경계를 넘나들었다는 판단이 섰다. 본인은 안정기에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반복적인 축기와 방출은 또 다른 부작용의 촉매제가 될 수도 있었음이다.
‘내 안에 폭탄을 장착하고 있었던 거였어!’
내기를 채울 때마다 큰 만족감이 찾아왔었다.
그걸 기반으로 그 어떤 일도 처리할 수 있을 절대적인 힘을 얻었지만 스스로 능력의 발산을 자제하면서 쌓인 기운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음껏 방출할 대상이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 와중에 자꾸 커져 간 내력의 결정체는 주기적으로 필상의 몸을 흔들었다.
만약 모두 비워 버린 결단이 없었다면 어느 한순간, 다시 찾아온 위기에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과 몸을 비우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내력을 굳이 몸 안에 쌓지 않아도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이른 바 절정의 경지를 넘어 화경에 접어든 것이다.
“113야드 남았어요.”
“아! 샌드 줘.”
“잠도 안 주무셨는데 힘이 넘치시나 봐요.”
“어허!”
“알았어요.”
싱긋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걸 보면 장난이다.
긴장하기 쉬운 경기 중에 그 정도 농담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래도 그 내용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해 경고했다.
찔끔한 미사키가 얼른 태도를 바꿔 다행이다. 어쩌면 각별한 봄과의 관계를 시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늘 붙어 다니는 관계일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더욱이 흑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스 샷!”
부드러운 컨트롤 샷이 깃대를 살짝 오버하는 것 같았으나 벡 스핀이 걸린 타구는 홀컵을 가로지르며 들어갈 뻔했다.
샷 이글이 나왔다면 금상첨화였을 테지만 환상적인 웨지 샷에 팬들의 함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필상의 날카로운 샷 감각이 돌아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필상은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버디로 연결했다. 하지만 1번 홀에서 반짝했던 상승세는 한껏 치솟은 팬들의 기대를 채워 주기에는 부족했다.
정말 좋은 샷을 했음에도 딱딱한 페어웨이에 떨어진 타구가 엄하게 구르는 통에 타수를 줄일 기회를 번번이 잃었다.
게다가 들어갈 것 같았던 퍼팅도 홀컵을 외면하기 일쑤였다. 지켜보는 팬들이 분노를 터트릴 정도로 복불복 상황이 이어지면서 중계방송을 보던 팬들의 불만도 이어졌다.
-이쯤 되면 한 번쯤 고심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시청자들의 실시간 반응을 말씀하시는 거죠?
-네. 지금 경기를 직접 따라다니는 팬들의 댓글도 있습니다. 페어웨이에 잘 보낸 공이 세컨드 컷까지 튀어 들어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반응에 저도 공감합니다. 게다가 러프에 떨어진 공이 페어웨이로 튀어나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치라는 건가요?
-선수들은 물론 팬들도 그런 부분은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군요. 승부가 가려지는 과정에서 행운이 너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에 다들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흥분하는 것은 선수들이 흘린 땀과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상황입니다. 그건 아니지요!
코스의 난이도를 높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아무리 메이저 대회가 어렵다는 전통과 역사를 중시해도 실제 선수들이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무시할 수는 없다.
특히나 프랭크가 언급한 선수들의 노력이 무산되는 경기의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는 언급은 많은 팬들의 공감을 받았다.
노력해도 안 되는 스포츠는 팬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PGA가 직접 주관하는 내셔널 타이틀이 걸린 대회에서 더 심한 경향이 드러났으니 방향의 조정이 절실해 보였다.
결국 필상은 이븐파로 경기를 마쳤다.
버디 3개에 보기 3개.
한 골프 채널에서는 필상이 경기를 마침과 동시에 오늘 경기력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특집을 마련했는데, 거기서도 난이도 조정에 대한 언급이 쏟아졌다.
“프로님. 오늘 거의 모든 언론에 동시에 떠오른 화제가 하나 있어요.”
“뭔데?”
샤워를 마친 필상은 지원 팀과 함께 식사부터 했다.
얼마나 허기졌는지 족히 서너 명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시키고도 주문을 추가했다. 마주 앉은 세 여자의 입이 떡 벌어질 식사량이 아닐 수 없었다.
식탐이 어쩌니 하는 말이 나왔지만 그 와중에도 서 팀장은 기사 하나를 스크랩해서 필상에게 보라고 건네줬다. 자신의 본분을 놓치지 않은 행동이 보기 좋았다.
기사를 꼼꼼하게 읽는 필상은 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건넸다.
“혹시 내 인터뷰를 원하는 기자들이 있나?”
“그야 수두룩하죠. 인터뷰를 하시려고요?”
“응. 다 모으지는 말고 평소에 우리에게 우호적인 기자들 몇 명만 모아 봐.”
“무슨 내용을 말하시려고요.”
“이거에 대한 내 입장.”
필상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낭패를 본 몇몇 선수들이 이미 기자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그건 불만을 토로하는 패자의 항변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이븐파를 치며 공동 8위까지 치솟았지만 필상의 성적도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이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