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도로 아미타불
-와우! 아주 기묘한 이글 퍼팅이 나왔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냥 튀어나올 것 같더니 공이 다시 빨려 들어가는군요.
-네. 평생 희귀한 장면을 수도 없이 봤지만 이번 퍼팅처럼 저렇게 마술 같은 결과는 또 처음 봅니다.
-하하하! 역시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폭군! 이글 퍼팅을 성공하면서 오늘 잃었던 2타를 단숨에 복구했습니다.
-이븐파로 부진했지만 순위는 오히려 공동 11위로 올라섰습니다. 다들 상당히 고생하고 있다는 거지요.
-여하튼 바람을 한 번 탔으니 백 나인 홀의 플레이가 더 기대가 되네요. 오늘은 언더파를 기록할 수 있을까요?
이전 같으면 그럴 것이라고 냉큼 대답했을 프랭크지만 그냥 화제를 돌렸다. 마침 다른 조의 경기가 화면에 비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랭크는 물론 챔블리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좋게 해석하자면 필상에게서 보다 인간미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지 밝히라면 꼭 짚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보였다. 행운이 따른 이글 퍼팅도 그러했지만 인간이 아닌 듯 독야청청하던 월등한 기량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이글을 성공한 필상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하는 거였다. 팬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지만 그에 대한 인사도 하지 않았다.
“으! 프로님이 우릴 쳐다보는데요?”
“네. 우리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네요.”
“근데 저는 왜 오금이 저리는 거죠?”
요즘 라운드를 임하는 필상의 표정은 밝았다.
이전처럼 냉랭한 표정을 유지하지 않았고 본인도 그것에 굉장히 만족했는데, 지금 서 팀장과 봄을 쳐다보는 얼굴은 예전의 그 포커페이스였다.
일정한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지만 서 팀장은 왠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자신이 아닌 봄에게로 향하고 있음은 정확히 인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작 차가운 시선이 자신에게로 고정된 것을 알고 있는 봄은 전혀 개의치 않고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둘 사이에 뭔가 불꽃이 튀는 느낌.
“프로님. 이동하셔야죠.”
“그래.”
“근데 저쪽은 왜 그렇게 노려보셨어요?”
미사키도 느낀 것이다.
두 여자를 쳐다보고 있는 필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동반자들의 퍼팅이 끝나 다들 이동하는데도 시선을 그쪽에 고정시킨 것을 확인한 순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필상은 멋쩍게 씩 웃을 뿐, 대답은 회피했다. 요즘 필상과 도란도란 얘기하며 경기를 뛰는 것이 참 좋았는데, 갑작스러운 분위기의 전환은 결코 기껍지가 않았다.
“드라이브를 가급적 잡지 말아야겠어.”
“왜요? 오늘 티샷 정확도가 괜찮은 것 같은데……”
“후반에는 보다 더 정교한 샷을 구사해 보려고.”
여러 난점이 있지만 후반 나인 홀의 전장은 그리 길지 않았다. 2개의 롱홀이 있지만 도그렉이 워낙 심해 2온을 노리다가 낭패를 본 선수들이 많아 무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교한 샷의 시작은 183야드 파 3, 10번 홀이었다.
티 박스와 그린, 그리고 그린 앞에 붙은 그린만 한 크기의 페어웨이를 제외하고는 러프뿐인 삭막한 홀이다.
물론 US오픈에 초대 받은 선수들 중에 안전한 공간을 놓칠 선수는 별로 없지만 그린 앞의 페어웨이도 C자를 뒤집어 놓은 형태였고 가운데는 깊은 벙커를 위치시켜 위압감을 추가했다.
“7번 아이언.”
“네.”
너무 길지 않을까 싶었지만 미사키는 흔쾌히 필상의 요구에 따랐다. 필상이 자랑하는 컨트롤 샷을 기대하며.
그런데 필상의 아이언 샷은 아름답지 못했다.
특유의 부드럽고 간결한 스윙은 이뤄졌으나 약간 덜 맞은 느낌의 타구는 예상한 탄도보다 높이 떠올랐고 앞뒤 폭이 35야드나 되는 그린에 미처 도달하지도 못했다.
거의 두 클럽 이상 짧은 다소 어이없는 결과가 나오자 관전하던 팬들 중에는 크게 웃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비웃는 것은 아니었고 필상이 이처럼 눈에 띄는 실수를 범하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 팀장도 곧바로 반응했다.
“어떻게 된 거죠?”
“딴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딴생각이라니요? 그런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저는 볼일을 좀 보고 와야겠어요.”
“볼일?”
봄은 이미 명성이 자자한 여자 프로 골퍼다.
물론 미국에서는 아직 그녀를 알아보는 팬들이 없지만 일본 골프계의 신데렐라로 혜성처럼 등장한 인기인이다.
본인이 스스로 밝히길 미국은 초행이라고 했으면서도 혼자서 뉴욕까지 날아온 것도 특이한데, 갑자기 볼일이라니?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는 것과 필상의 미스 샷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답은 찾지 못했다.
‘저 녀석 어딜 가는 거지?’
문제는 필상이 자리를 뜨고 있는 봄의 행방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필상은 방금 전의 이글 퍼팅이 들어간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튀어 나올 공이 마치 누군가 툭 친 것처럼 홀컵으로 사라진 현상은 누군가의 능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염력이 가능했던 본인이 의지를 발현하지 않았으니 의심의 대상은 봄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녀가 그런 능력을 갖췄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 봄의 능력이 성장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바라던 정당한 승부와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이라서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인지 필상의 후반 나인 홀 플레이는 산만했다.
-항상 잘할 수는 없죠. 인간인 이상.
-그렇습니다. 이글을 성공한 후로 다시 2타를 잃었지만 폭군의 성적, +3은 현재 공동 14위입니다. 얼마든지 결선 라운드에서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긍정적인 예상을 해 봅니다.
-아! 정말 진귀한 기록인데요. 한 시즌에 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위업, 그 기적을 바라는 팬들의 기대를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지나치게 편파적이라고 생각하실 시청자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으나 골프를 사랑하는 동호인이라면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혹시 기분이 상하신 분이 계신다면 너른 아량으로 이해를 구합니다.
-최근 불같이 타오르고 있는 골프 붐이 미스터 퍼펙트의 기록 행진과 무관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팬들이 웃어넘겼지만 공공연한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대회에 출전한 모든 선수들은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인데, 그게 어디 지금만 그랬던 건가?
프로 스포츠가 일정한 시기에 크게 시장을 넓히는 경우는 대부분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영웅의 등장과 맞물린다.
이미 그 서막은 열렸고 기왕이면 그 열기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골프와 관련된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강렬했고 일반 골퍼들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선수들의 기량이 점점 더 상향평준화가 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대스타인 필상의 등장은 아시아 시장의 확대와 맞물려 많은 이들이 응원을 보태고 있었다.
“서 팀장. 봄은 어디 갔어?”
“모르겠는데요. 무슨 볼일이 있다고 하던데 제게 내용을 알려 주지는 않았어요.”
“얼른 연락해 봐. 샤워부터 하고 나올 테니까 내가 잠깐 보자고 해.”
“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았기에.
그래서 일단 봄에게 사실 확인부터 하고자 했는데, 행방이 묘연해 호출하라고 지시한 필상은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만나는 동료 프로들이 수고했다며 인사를 건네는데, 분위기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기보다는 너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뉘앙스가 풍겼다.
웬만해서는 그런 분위기 따위는 무시하는 성격이지만 이상하게도 찜찜했다. 은근히 부아가 일기도 했고.
그래서 오랜만에 찬물을 틀고 그 아래 서 있는데, 이게 웬 일인가? 엄청나게 추워 얼른 꽁무니를 빼야 했다.
“하! 이거 모양 빠지게 왜 이래!”
뇌기를 품기 전에도 필상은 냉수마찰을 좋아하고 즐겼다.
한겨울에도 남들이 기겁하는 찬물 샤워를 하곤 했는데, 아무리 능력을 비웠다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핑계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적당히 못해도 그 원인을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괜히 봄을 다그칠 생각까지 하지 않았던가!
실로 비겁한 행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다시 찬물을 틀고 그 아래로 들어갔다.
“으! 괜한 짓을 했나?”
소름이 돋았지만 용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런데 부슬부슬 추위가 느껴졌다.
저녁으로는 선선한 봄 날씨지만 한기를 느낄 정도는 아닌데, 고집을 부리다가 감기 기운이 돋친 것이다.
어이가 없었으나 일단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땀을 흠뻑 흘릴 수 있도록 운동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세 여자가 나란히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나 봄은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는데, 필상이 다그치려고 했다는 것을 알 텐데도 무척 떳떳한 기색이라 놀랐다.
게다가 한다는 말이.
“실망스러웠어요.”
“뭐?”
“폭군은 무슨! 패잔병 같았다니까요.”
필상이 인상을 구겼음에도 봄은 할 말을 다 했다.
개인적으로 오누이처럼 지내지만 그래도 명색이 코치가 아니던가!
그런데 얼굴만 화끈거릴 뿐, 마땅한 대꾸가 떠오르지 않았다. 멍하게 서서 인상만 구기고 있자 얼른 미사키가 거들었다.
“하루.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정말 그랬나요?”
미사키가 꾸짖었지만 봄은 필상에게 되물었다.
어찌되었든 얄밉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그렇다고 쥐어박을 수도 없는 노릇, 필상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싫어요. 저랑 갈 데가 있어요.”
한 발 물러났음에도 봄은 마치 땡깡을 부리는 건달처럼 물러서지 않더니 급기야 필상에게 다가와 팔에 매달렸다.
아니,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이끌려 가는 모습에 남은 두 여자는 따라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한 상태로 있다가 결국 뒤늦게 쫓아갔다.
하지만 향한 곳은 주차장, 조수석에 딱 앉더니 필상에게 운전석을 권하며 출발하라고 말했다. 저 멀리 미사키와 서 팀장이 깜짝 놀라 달려오는 것을 보고도 필상은 운전을 시작했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 쉬어.”
차창을 열고 그렇게 말한 필상은 일단 골프장을 벗어났다.
봄이 어디로 가라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필상은 그냥 도로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말없이 달리면서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봄에게서 따스한 기운이 자신에게 옮겨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일단 몸살 기운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자위하면서.
얼마나 달렸을까, 기분이 좀 풀렸다 싶은 순간에 봄의 음성이 들렸다.
“저기 팻말 보이죠?”
“햄프셔 컨트리클럽?”
“네. 연습장 깨끗하게 비워 놨어요.”
“거길 갔다 온 거야?”
“네. 오라버니가 뭔가 착각을 하신 것 같아서요.”
“…….”
평생 봄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몰랐다.
하지만 죄 지은 아이처럼 필상은 조용히 팻말을 따라 봄이 예약해 둔 골프장의 연습 라운지로 향했다.
멀지 않은 곳에 꽤나 좋은 코스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아무도 없는 연습장에 도착한 필상이 차를 세우자 봄은 트렁크에 넣어 뒀던 필상의 골프백을 꺼냈다.
“그건 언제 넣어 둔 거야?”
“오라버니랑 미사키가 샤워할 때요.”
“미사키 허락도 없이?”
“네.”
“어이가 없네.”
“그만 보채시고 일단 연습 시작하시죠.”
“같이 좀 뛸까?”
“그것도 좋죠.”
뛰다 보니 자연스럽게 골프코스를 접하게 되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근처에서 큰 대회가 열려도 금요일 오후면 라운드를 도는 골퍼들이 없을 리 없다.
그런데 전혀 개의치 않고 코스를 향해 들어서는 봄을 보며 녀석이 골프장을 통째로 빌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도 크지!
하지만 말없이 같이 뛰었다. 그냥 가볍게 조깅하듯이 달릴 생각이었으나 봄이 속도를 붙이며 도발했다.
질 수는 없었다.
‘헉! 헉! 헉!’
숨이 가빠와 곁눈질을 했다.
그런데 봄의 호흡은 일정했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귀밑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보면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닌데, 오히려 속도를 더 붙였다.
대략 10km를 달린 뒤, 출발 지점이 보이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혹시나 녀석이 더 달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필상이 속도를 줄이자 봄도 덩달아 멈췄다.
얼마나 다행인지…….
필상은 숨을 고르느라 미처 말을 할 여유가 없었으나 봄은 마무리 운동을 하면서 다시 도발적인 말을 뱉었다.
“체력이 많이 떨어지셨어요.”
“야! 난 오늘 18홀 라운드를 돌았잖아.”
“맞아요. 그런데도 10km를 39분에 완주하셨어요.”
“…….”
10km 마라톤 기록이 어떤지 생각해봤다.
일반인은 1시간 안에 들어오기 힘들고 코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39분이면 전문 마라토너들을 제외하면 순위에 들 기록이다.
놀라운 것은 봄이 거리와 시간을 쟀다고 것이었다.
왜? 냉수 샤워를 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던 것을 재확인이라도 시키려는 것일까?
“오빠의 실험은 성공하기 힘들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 제가 몇 차례 시도해 봤는데, 안 되는 것 같았어요.”
“수련이 부족해서 그런 거겠지.”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오라버니의 조언대로 확인한 결과는 전혀 달랐어요. 오히려 일시적인 충격에 고생만 할뿐, 도로 아미타불이던데요?”
“하하하!”
봄의 표현이 웃게 만들었다.
한국어에 능통하지만 설마 그런 말까지 구사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녀석의 말이 어느 정도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도 알지 못한 것을 어떻게 확인하고 확신하는 것인지 그게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