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301화 (301/354)

301. 봄이 온 이유

“오라버니가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면 정말 좋겠어요.”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직은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아.”

“그런가요? 어제 경기 장면을 다 살펴봤는데, 제가 볼 때는 좀 불안하던데……”

“그랬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이젠 온전히 내 능력으로 해내야 하니까!”

왜 그런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골프에 한해서라면 능력을 버린 것은 아주 치명적이다. 필상의 재주가 남다르고 의지도 굳건하다는 것은 알지만 필드를 지배하는 폭군의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물론 최선을 다해야겠지.”

“전 다 잃어도 좋아요.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쉽사리 대꾸하기 어려웠다.

음기가 너무 강렬한 몸을 타고난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을 살아왔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필상을 만나 삶을 연장했고 나름의 작은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그런 성취는 그녀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일말의 걱정도 없는 평범한 삶, 그녀에게는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뇌기를 품은 필상도 고생은 좀 했지만 그로 인해 단기간에 눈부신 성과를 내지 않았던가!

편중적인 기운이 몸을 잠식한 것은 같지만 그녀에 비하면 필상이 벼락을 맞은 것은 불운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사람은 참 이기적인 것 같아.”

“죄송해요.”

“아니. 네가 왜 죄송해. 네 얘기가 아니고 나 말이야. 고비는 있었지만 난 복 받은 놈이거든.”

“그런 말씀 마세요. 오라버니 덕분에 제가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거잖아요.”

“아니야. 네가 도와줘서 내가 이렇게 일찍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거지. 이번에 귀국하면 나랑 같이 자연지기가 풍성한 곳을 찾아 들어가 네 문제부터 심각하게 들여다보자.”

“고마워요.”

아직은 자신의 상태도 자신하기 어렵다.

그러나 필상이 걱정스러워 자신의 일은 접어 두고 미국까지 날아온 봄의 입장을 생각하자 자신의 문제는 일도 아니었다.

당장 자신은 이번 시도가 무위에 그쳐도 크게 잃을 것은 없지만 봄은 다르다. 어설픈 행위는 그녀의 삶을 앗아갈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필상의 마음도 무거웠다.

그 무게감에 짓눌린 둘은 이후 조용히 식사만 했다. 가벼운 농담으로 화제를 돌릴 수도 있지만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둘을 관통하는 이 사안은 인생이 걸린 중대사였고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프로님 파이팅!”

“서 팀장. 혹시 봄을 알아보는 팬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각별히 신경 써.”

“치! 그건 걱정 마시고 프로님은 경기에나 집중하세요.”

“알았어.”

티오프 시간이 다가와 필상은 이동해야만 했다.

늘 함께 지내지만 경기 중에는 갤러리들과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는 서 팀장은 손까지 들며 격한 응원의 말을 보탰다.

그녀와 같이 움직일 봄이 그저 희미한 미소만 드리울 뿐, 다른 말은 꺼내지 않는 것과는 묘하게 대비를 이뤘다. 여하튼 기껏 파이팅을 외쳤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봄을 살펴 달라고 말하는 필상이 얄미웠는지 서 팀장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방이 3개뿐이라 어쩌죠?”

“걱정 마세요. 전 따로 얻었으니까.”

“얻었다고요?”

“네. 바로 옆 505호 객실이에요.”

“그 스위트룸을 혼자서 얻었다고요?”

“아무래도 오라버니와 가까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네.”

갑자기 찾아왔지만 봄은 J&L의 고객이다.

최근 JLPGA 투어 3연승을 기록하며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선수다. 때문에 서 팀장은 봄에게 방 하나를 양보하고 미사키와 지내야 하는 게 영 마뜩찮던 차였다.

하지만 봄의 배포는 남달랐다. 하루에 몇천 달러나 하는 스위트룸을 그냥 혼자서 얻었다지 않은가!

돈을 잘 벌뿐더러 일본 경제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사람이 아끼는 딸이라는 말도 기억나 더는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서 팀장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봄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 대표님은 왜 안 오시죠?”

“제가 있는데 대표님이 왜 오셔야 하죠?”

“오고 싶어 하실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군요.”

실은 이 대표도 올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미국에 있다가 돌아간 게 한 달 전이다. 게다가 서 팀장이 필상을 보좌하고 있으며 매일 보고서를 작성해 보낸다.

굳이 그녀가 올 필요가 없는데도 매일 직접 전화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귀찮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 대표의 동향을 정확히 짚고 있는 봄을 보며 서 팀장은 필상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폭군의 스윙이 확실히 다이내믹해진 것 같습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요?

-체중이 줄면 거리도 덩달아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근육이 받쳐 주지를 못하니까요. 그래서 자연스러운 체중 이동을 통해 공에 더 힘을 실으려는 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보통 스윙의 변화를 줘도 템포나 체중 이동은 잘 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닌가 보죠?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고유한 스윙 템포의 변화는 아주 민감한 영역입니다. 저도 어제 중계를 마친 뒤에 확인했는데, 폭군의 스윙 템포가 빨라진 것은 분명했습니다.

-아! 정말 그랬군요.

-중요한 것은 그래도 빠른 편이 아니라는 겁니다. 워낙 테이크백이 느려서 다운스윙이 상대적으로 빨라 보이는 것일 뿐, 폭군보다 느린 템포의 스윙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확실히 역동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달라진 것은 백스윙 탑에서 숨을 고르듯 멈추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물 흐르듯 부드럽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하체가 이동하는 타이밍이 미세하게 빨라진 것이 눈에 띈 것일 뿐. 하지만 구경하던 이들의 눈에는 그게 강렬하게 느껴졌다.

다른 선수에 비해 파워가 우월하기에 굳이 역동적일 필요가 없었으나 이젠 스스로 방법을 모색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실질적인 변화는 스윙 궤적이 보다 업라이트해진 것이다. 아무래도 횡적인 움직임보다는 종으로 내리치는 힘이 중력과 일치해 힘을 가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189cm 장신의 장점을 십분 활용한 변화였으나 워낙 교과서적인 스윙이라 중계진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러프네?”

“그러게요. 이번에는 더 깊이 박힌 것 같아요.”

“무슨 놈의 골프코스를 이렇게 세팅하는지 모르겠어요. 골프를 하자는 건지, 서바이벌 경기를 하라는 건지!”

서 팀장은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잘 버티고는 있지만 워낙 빠른 그린으로 인해 레귤러 온을 하고도 버디는 잡지 못한 반면, 러프에 들어갈 때마다 여지없이 타수를 잃었다.

9번 홀 티샷을 마친 지금 2오버를 기록한 필상의 합산 성적은 +3, 이건 폭군의 스코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눈에 띄는 큰 실수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 불운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잘 날아가던 티샷 타구가 막판에 살짝 당겨졌을 뿐인데, 페어웨이에 떨어진 공이 러프로 튀어 들어간 장면은 욕이 저절로 치솟게 만들기 충분했다.

“괜찮아요. 오빠는 극복해 낼 거예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요?”

“네. 그건 너무도 당연해요.”

“근거는 뭐죠?”

“차카게 살잖아요.”

“네?”

뭔가 확실한 근거라도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너무 기막힌 대답에 서 팀장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을 뿐,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필상의 주변에 있는 몇몇은 도무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이비 종교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느낌이랄까?

물론 자신도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은 늪에 자꾸 빠져드는 착각이 일었다.

“나이스 샷!”

확실히 러프가 질기고 깊었다.

하지만 필상은 이번에도 과감한 샷을 시도했다. 러프에서의 샷이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기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엉뚱한 실수가 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깔끔한 결과를 손에 쥐게 되었다.

9번 홀은 508야드의 전장을 지닌 롱홀이다. 파 5치고는 거리가 짧기 때문에 티샷만 잘 나오면 얼마든지 2온이 가능한 홀이라서 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드로우 샷을 구사했다.

러프에 튀어 들어가기는 했으나 티샷 비거리는 326야드를 기록하며 남은 거리는 186야드에 불과했다. 그 상황에서도 레이 업을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필상은 제 거리에 맞는 8번 아이언을 잡았다.

-와우! 2온! 러프에서 폭군이 2온을 성공했습니다!

-아주 영리한 공략이었습니다. 무려 5개의 가드 벙커가 그린을 뺑뺑 두르고 있기 때문에, 솔직히 저는 무리하지 말고 잘라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하하!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우리가 잠시 깜빡한 겁니다! 필드의 폭군, 그가 저희들의 우매함을 꾸짖듯 당당한 위용을 적시적소에 터트리고야 말았습니다!

-러프에서의 샷은 스핀이 걸리지 않고 많이 구른다는 것을 감안하고 정확한 방향만 유지시킨 전략적인 샷이었습니다.

-조금만 틀어져도 벙커의 함정에 빠지는데, 역시 배포가 남다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 홀에서 오늘 잃은 타수를 모두 복구했으면 좋겠습니다.

런을 이용해 그린에 올리기는 했으나 핀이 우측에 꽂혀 있는 터라 거리도 만만치 않고 퍼팅 라이는 꽤 까다로웠다.

이미 유리알 그린이라는 것이 확인된 터라 잘 붙여 버디만 잡아도 큰 성공처럼 느껴질 상황이었다. 하지만 필상은 동반자들이 칩샷을 하는 동안 그린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마치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말이다.

다른 선수들이 그린 주변 플레이를 하고 있었지만 팬들의 시선은 모두 필상에게 몰려 있었다. 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린을 살피는지 직접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저거 바로 넣기는 어렵겠죠?”

“전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이요?”

내리막 뒤에 오르막이며 적어도 오른쪽 두세 컵은 봐야 하는 라이였기에 서 팀장은 어렵다고 생각해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봄은 확률을 운운한 것도 아니고 확신에 찬 단언을 했다. 강한 바람을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봄의 말을 들은 뒤로 서 팀장도 들어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긍정적인 생각은 역시 전염성이 강한 것 같았다.

라이를 살피던 필상은 동반자들의 칩샷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유심히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2온을 할 수밖에 없었던 동반자 두 명의 칩샷이 좋은 선생님 역할을 해 줬다.

한 명은 우측으로, 다른 한 명은 좌측으로 길게 치는 바람에 홀컵 주변의 라이를 마치 안내라도 해 주는 듯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필상이 마크 앞에 자세를 잡고 앉아 공의 라인을 맞췄다. 보통 이렇게 저렇게 고심하는 시간이 길지만 필상은 공을 놓은 뒤 한 번 조정하고는 바로 일어섰다.

스윽! 스윽!

공의 뒤에 서서 굴러갈 라인을 보며 힘 조절해 퍼터를 밀어 보는 동작은 필상의 독특한 습관이자 오래된 퍼팅 루틴이다.

일반적인 퍼팅 루틴은 어드레스를 취하기 전에 옆으로 선 채로 빈 스트로크를 하지만 필상은 공 뒤에서 힘 조절을 마친 뒤, 곧바로 어드레스를 취한다.

물론 그립을 완성한 뒤에는 자신이 굴려 보낼 라인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며 가장 중요한 과정, 마음을 가라앉힌다.

족히 천 명은 됨직한 엄청난 갤러리들이 필상이 자세를 취하자마자 일시에 침묵하는 광경, 마치 예배를 드리러 온 수도자들이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신비로운 장면이었다.

낙엽이 휘날리며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 무거운 정막 속에 온통 자신만을 향하고 있는 시선을 의식하게 되면 선수는 자신의 플레이를 할 수가 없다.

‘9.6야드!’

자신이 보낼 거리를 정확히 암시한 필상의 퍼터가 부드럽게 뒤로 빠졌다. 퍼팅 성공의 절반은 그 액션이 결정한다.

불안하거나 마음의 동요가 있을 때는 정확히 빠지지 않을뿐더러 부들부들 떨기도 한다. 하지만 필상의 테이크백은 밥을 담은 수저가 입가로 향하듯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슥!

빠른 그린에서는 아무리 긴 퍼팅도 때리는 느낌이 들면 무조건 실패다. 그냥 물고기가 유영하듯 스르르 다가오는 퍼터 페이스에 밀려 나가는 것처럼 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 더 홀!”

“이글!”

“들어가!”

수업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개구쟁이들이 선생님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소리를 지르듯, 한껏 참았던 팬들의 응원의 함성이 사방에서 동시에 폭발했다.

혹자는 너무 약하게 민 것은 아닌지 의심했으나 그렇게 부드럽게 밀었는데도 공은 내리막을 타고 가속까지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이 과연 오르막을 이기고 홀컵에 다가설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오르막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한 번 가속이 붙은 공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듯 그냥 쭉쭉 거슬러 올라갔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었다.

라이가 좌측이 낮아 왼쪽으로 돌 것 같은데 너무 조금만 본 게 아니지 의심했었다. 하지만 탄력이 붙은 공은 그 라이를 완벽히 무시하고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텅!

깃대를 정통으로 맞춘 그 음향은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소리일 수도 있고 가장 무서운 소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르막을 오르면서도 전혀 힘이 죽지 않은 필상의 퍼팅은 깃대에 맞지 않았다면 버디도 어려울 거리에 섰을 지도 모른다.

문제는 생각보다 강하게 맞은 공이 다시 홀컵 가장자리에 맞으며 홀컵 주변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는 것이다.

그냥 토해 낼 수도 있고 뚝 떨어질 수도 있다.

스트로크를 마치고 뒤늦게 타구의 진행을 확인하던 필상의 콧등에 주름이 잡힌 걸 보면 결과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너무 강했으며 그나마 깃대에 맞았지만 그냥 튀어나올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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