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오라버니의 선택
“선수가 이렇게 웃으면 일본 선생님들은 혼을 내는데!”
“왜? 정신머리가 틀려먹었다고?”
“네. 진지하지 않으면, 아니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고 가르치거든요. 정말로 그렇다고 믿는 것 같아요.”
“우리도 과거에 그랬어. 권위적이고 판에 박힌 완고함이 모든 것을 지배했지. 하지만 한국인들은 잘못된 것을 알고도 참을 수 있는 그런 민족은 아니더라고.”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대통령도 쫓아내는 열정, 또한 불의에 대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냈던 기록들이 꽤 많더라고요.”
“어허! 한국에 대한 공부 좀 했나?”
“한국어를 배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특히 한국 역사에 대한 자료들이 인터넷에 상당히 많더라고요.”
“유튜브? 거기 거 다 사실은 아니니까 잘 가려서 봐.”
“흐흐흐. 우리 오빠가 알아서 보내 줘요.”
“흑돈이?”
의외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자상함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 같은 인간이 바로 성호다. 하지만 자신도 모모코에게 미처 해 주지 못한 것을 녀석은 연인에게 해 주고 있었다.
특히나 한국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미사키와의 결혼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자신도 따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온함을 유지하며 웃을 수 있는 경기 태도는 자신과 미사키에게 모두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선수가 중요하지 캐디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캐디의 역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전에는 애써 무시해 온 것이 사실이다. 딱히 조언이 필요치 않았던 자신에게는 초월적인 능력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력을 비우며 그로 인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거만함도 함께 버리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편의 캐디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텐데?”
“네?”
“결혼하면 아무래도 같이 있고 싶을 거 아냐?”
“싫어요. 멀리 있으니까 더 애틋한 것 같아요. 며칠 함께 있으면 자꾸 싸우더라고요. 그리고 이만한 수입이 보장되는 자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거든요!”
“하하하! 그런가?”
흑돈과 결혼하면 캐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사키는 솔직하게 말했다. 자신이 필상의 캐디라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낄 뿐만 아니라 고소득 직업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저 자를 생각 마세요!”
“누가 자른다고 그래?”
“부족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더 잘할 게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성호 녀석보다 훨씬 나아.”
“정말이죠? 호호호!”
그녀만큼 좋은 캐디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까칠한 성격을 모두 받아 내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지금까지 자신이 지나온 과정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미사키는 자신이 지켜야 할 선을 한 번도 넘지 않았다.
기술적인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이 깊은 신뢰다.
수많은 팬들의 관심을 받는 필상의 일거수일투족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그녀처럼 조용하게 일을 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제는 이전보다 잔소리를 더 해도 좋아.”
“재가 언제 잔소리를 했다고요?”
“참았겠지. 하지만 이제는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언제든 말을 해. 내 생각이나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니잖아.”
이건 정말 큰 변화였다.
늘 필상의 판단은 옳았다. 아니, 믿기 힘들 정도로 정확해 하고 싶은 말도 참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괜히 나섰다가 결과에 악영향을 미치면 조용히 있느니만 못하기 때문에 침묵이 미덕이라는 마음가짐을 견지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생각을 기탄없이 말하라니?
말뜻은 이해했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캐디와 소통하는 새로운 관계의 정립을 원했다.
-폭군의 오늘 공략 테마는 정교함인 것 같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생각보다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아직은 코스 적응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아! 서서히 발동을 건다는 거군요. 그런데 행방이 묘연했던 3주간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챔블리가 돌연 그런 의문을 제기한 이유는 어제 한 신문에 실린 특집 기사 때문이다. 기자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체중이 쭉 빠진 채 뉴욕으로 날아온 행적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평소 연습 벌레로 알려진 필상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어딘가 틀어박혀 혹독한 훈련을 진행했을 것이라고들 생각했는데, 그렇게 보기에 미심쩍은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덴버에서 집중 훈련을 하지 않았을까요?
-덴버? 왜 하필 거기죠? 거긴 캘리포니아나 뉴욕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지역이잖습니까!
-그건 알 수 없죠. 선수가 어디에서 훈련을 하건 그건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니까요.
-만약 그가 훈련을 진행한 코스가 있다면 골프장 입장에서는 큰 홍보가 될 텐데, 확인된 곳이 전혀 없습니다.
집요하게 파고든 기자는 PGA챔피언십을 마친 필상이 외국에 나가지 않았다는 출입국 사실을 확인했고 덴버에 오래 머물렀다는 증거까지는 찾아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콜로라도 인근 골프장에서 필상이 훈련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필상이 아무 일도 없이 나타났다면 화제가 될 이유도 없지만 홀쭉이가 되어 나타난 필상은 체중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쳐다만 봐도 넘치던 카리스마가 사라진 광경이 자주 목격되었고 스윙이 전과 같지 않다는 동료 선수의 제보도 있었다.
-프로 골퍼가 공인이라며 사적인 영역까지 상세하게 파고드는 것은 그다지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 저희까지 부추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제가 봐도 그의 스윙이 달라진 것 같아 여러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점은 저도 아쉽게 생각합니다. 지난 대회 최종 라운드 경기는 누가 봐도 압도적이며 완벽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기량을 계속 유지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왜죠?
-그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기분 하나에도 스윙 궤적이 달라지는 인간, 그게 아니라면 누가 그와 경쟁하기 위해 대회에 나올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하하! 그도 그렇군요.
필상이 과감한 결정을 내린 이유도 그와 무관지 않았다.
필요하다고 판단해 잠재웠던 초감각을 이끌어 냈지만 결과를 돌아본 필상은 정당하지 않은 승부라는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선수가 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아무리 합리화를 하려고 해도 자신의 능력은 지나쳤다. 그런 초월적인 능력으로 아무리 많은 우승을 거둔다 한들, 그게 떳떳할 것 같지는 않았다.
벼락을 맞은 것이 자신의 선택 옵션은 아니었다.
얼마든지 타고난 능력으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하늘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허락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걸 만끽하면서 내내 께름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어 스스로 이능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막바지에 몰리자 결국 꺼내 쓰고 말았다. 그런 뒤에 밀려온 감정이 기쁨이 아니라 굴복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가부간 결단을 내리고자 산을 찾았다. 당시에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았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명상 중에 깨달았다.
자신은 은연중에 원하고 있었다. 평범한 삶을.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고생했어.”
“제가 뭘요. 그런데 좀 아쉽기는 해요.”
“점점 나아지겠지.”
“그렇겠죠?”
필상의 1라운드 성적은 1오버파였다.
나중에 확인된 순위는 공동 16위로 크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버디 2개에 보기를 3개나 기록한 내용은 필상의 위상에 어울리는 성적이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누구든 압도할 수 있는 폭군이라는 닉네임에 어울리는 파격적인 샷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상은 스스로 만족했다.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자신의 스윙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공 프로님. 인터뷰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샤워를 마친 필상이 클럽하우스로 나오는 도중, 갑자기 앞을 막아선 백인 남자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칙칙한 인상을 지닌 뿔테 안경의 돌출 행동에 대기하던 서 팀장이 깜짝 놀라 얼른 달려왔다. 대회 중인 선수에게 이렇게 느닷없이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은 통상적인 매너에 어긋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어디의 누구시죠?”
“아! 저는 위클리 골프의 데이비드 기자입니다.”
“그 이상한 기사를 쓰신 분이시군요. 그런데 이건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것을 모르시나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속 기사를 기다리고 있는 팬들이 워낙 많아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기자분의 생각일 뿐이고 적어도 담당 매니저인 제게 미리 양해부터 구하셔야죠!”
꽤나 따갑게 대했으나 능글맞게 웃으며 필상의 대답을 기다리는 기자의 행동과 표정에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제대로 한 건 했다는 우쭐함에 젖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필상은 그의 말을 받아 줬다. 아예 상종도 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는 판단은 들지만 필상도 기사의 내용을 알고 있던 터라 마침표를 찍어 줘야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불필요한 풍문이 이어질 가능성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제가 등산을 좋아합니다.”
“아! 3주 동안 산에 있었다는 말인가요?”
“네. 증인은 찾기 어렵겠지만 제가 로키마운틴 국립공원을 드나든 흔적은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대체 왜? 누구랑? 산중에 그렇게 오래 머물렀나요?”
“사람의 생존 능력은 굉장히 강합니다. 야생에서 홀로 생존을 위해 험한 상황을 극복하다 보면 사람과의 경쟁이 훨씬 가볍고 쉽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죠. 저는 그걸 즐깁니다.”
사실과 픽션이 혼재된 그 대답은 즉석에서 엮은 스토리지만 꽤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질문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필상은 즉시 이동을 시작했고 따라오려는 그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더는 안 된다는 손짓에 움찔한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사람 좋아 보여도 마주친 눈빛에서 광선이 쏘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사키까지 홀딱 속았는지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 통에 며칠 간 골치가 아프기는 했다.
그에 반해 늘 함께 움직인 서 팀장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았다. 사람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는 입장인데, 정작 필상 자신은 그런 느낌이 별로 없었다.
다만 대회를 마치고 귀국해 모모코를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건 궁금했다. 뭔가 신선할 것 같다는 기대도 했다.
“뭐지?”
다음 날 아침, 2라운드 출전을 준비하며 연습에 몰입하던 필상은 돌연 우측 뺨이 따가울 정도로 확연한 시선을 느꼈다.
기이하다 여긴 필상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돌아갔는데, 전신을 덮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봄?”
일본에 있다고 생각했던 봄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믿기 어려워 눈을 껌뻑이고 다시 확인했는데도 그녀였다.
그녀의 등장이 전율할 사건인 것은 아니다. 필상의 모든 감각들이 곤두선 이유는 시선을 느낀 순간, 그 대상이 봄이라고 자신이 인지했다는 점이었다.
다 버린 줄 알았던 신비한 기운이 아직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너. 어떻게 여길 왔어?”
“비행기 타고 왔죠.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서.”
“나 참. 우리 차 한 잔 마시러 갈까?”
“그보다 배고파요. 밥 사 주세요.”
“그, 그래.”
왜 심장이 요동을 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봄과 자신을 잇는 동질감을 그녀의 동의도 없이 비운 것이 문제가 될 리는 없다. 그건 순전히 자신이 선택할 사안이니까.
그런데도 말을 더듬을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이는 자신을 납득할 수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좀 이상한 것은 봄을 모르지 않는 서 팀장이나 미사키가 인사는 나눴지만 함께 따라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어요.”
“뭘?”
“오라버니의 선택이요.”
“어떻게 알았어?”
“그냥 느껴졌어요. 화면에 비친 오빠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래서 달려온 거야? 혹시 내게 위험한 일이 나타날까 봐?”
“겸사겸사. 말했잖아요. 오라버니가 보고 싶었다고요.”
최근에는 오라버니, 오빠라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선생님, 둘이 있을 때는 주로 호칭을 생략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복적으로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그 어감이 주는 느낌은 이성적이기보다는 친근한 누이 같았다. 아마도 오랜만에 만나는 어색함을 덜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 아닌가 싶다.
“난 아주 좋아.”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제가 안심할 때까지 주변에 머물 거예요. 괜찮죠?”
“어차피 이번 대회 끝나면 한국으로 들어갈 텐데 뭘.”
“그럼 저도 같이 들어가면 되겠네요.”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미국까지 날아온 그녀다. 이 대표가 붙여 준 직원까지 떼 놓고 온 걸 보면 이 대표나 모모코에게도 알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차피 3일이기 때문에, 또 봄이 있으면 여러모로 안심도 될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식사부터 하자고 권했다.
“저도 수련하면 가능할까요?”
“가능할 거야. 내가 힘껏 도와줄게.”
너무도 당연하게 이기적으로만 생각했는데, 식사를 마칠 무렵 꺼낸 그녀의 질문에 필상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필상이 걱정스럽기도 했으나 그와 동시에 부러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초월적인 능력은 우연히 얻었으나 그 귀한 것을 버릴 때는 스스로 결정했다.
그것을 자유의지로 해냈다는 것이 그녀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킨 것 같았다. 그녀야말로 어려서부터 겪어 온 지독한 굴레를 벗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