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탁월한 선택
“역시 좁군!”
US오픈은 그린만 빠른 게 아니다.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필상은 좁은 시야 때문에 답답함을 느꼈다. 양쪽에 즐비한 거목이 마치 심장을 조여드는 것 같은 강렬한 압박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좁은 페어웨이가 단단한 것도 이 코스의 특징이다. 정확한 티샷을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세컨샷 지점에 가 보면 페어웨이의 경사를 타고 러프에 멈춘 경우가 흔하다.
그린 위에서처럼 페어웨이에서도 공이 데굴데굴 굴러간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받은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다.
‘러프는 말할 것도 없지!’
빠른 그린에 좁고 딱딱한 페어웨이, 깊고 질긴 러프는 난이도의 극한을 체험하게 만든다. 지난 대회에서 겪은 혹독한 경험도 감히 US오픈을 따라가기 힘들다는 것이 중론이다.
클럽 헤드가 러프를 파고들 때의 저항이 엄청나 미들 아이언이나 롱 아이언으로 최상의 탈출 장면을 노리다가는 손목을 다칠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만 한다.
통계자료를 무색하게 만드는 ‘복불복의 게임’이 될 가능성이 급증하는 현실이 과연 메이저 대회의 본색인지에 대한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티샷에 집중해야 할 타임, 필상은 차분하게 샷 루틴을 밟으며 공을 향해 다가갔다.
쉬익!
골프를 시작한 이래 수없이 많은 스윙을 했지만 언제나 새롭다. 아니, 언제나 떨리고 긴장된다.
하지만 그걸 거부할 수는 없다.
긴장을 놓는 순간, 공은 여지없이 그 방심을 타고 들어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완벽한 집중력으로 무장한 필상은 특유의 느린 테이크 백, 백스윙 탑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듯 공백을 찍은 뒤 가차 없이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클럽 헤드가 터트린 소음이 전신의 감각을 극도로 날카롭게 만드는가 싶은 찰나, 샷의 절정에 다다른다.
까앙!
지켜보는 팬들은 경쾌한 소리와 스윙 폼으로 샷의 결과를 예측하지만 선수는 손에 느껴지는 감각만으로도 알 수 있다.
얼마나 정확한 임팩트가 이뤄졌는지.
필상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깊은 감동을 느꼈다.
지금까지 멋진 티샷을 수없이 날렸지만 지금의 느낌은 그때와 달랐다. 왜냐면 벼락을 맞은 뒤로 자신에게 늘 따라붙었던 초월적인 능력을 스스로 버린 뒤의 첫 샷이었기 때문이다.
연습 때에도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비거리도 새롭게 조정했고 온전히 자신의 감각과 능력에 의존한 스윙이었기 때문이다.
-와우! 엄청난 스윙입니다. 장타가 터질 것 같지 않나요?
-네. 폭군이 저렇게 강하게 때리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저보고 뭐라고 하시더니, 프랭크도 그의 새로운 닉네임을 쓰시네요.
-허허허. 그게 입에 쫙쫙 붙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필상의 티샷이 굉장히 강력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이능을 버리면서 피치 못하게 선택하게 된 타법이다. 아이언은 한 클럽 정도 거리가 줄었으나 우드 비거리는 거의 새롭게 세팅을 해야만 했다.
그전처럼 안전 모드인 60%의 힘으로 치면 300야드를 미처 날아가지 않았다. 체중이 불면 거리는 자연스럽게 늘겠지만 300야드를 공략하지 못하면 긴 전장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기본을 70%로 상향조정했으며 그로 인해 체중의 이동이 좀 더 눈에 띄는 스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스윙 밸런스 어땠어?”
“좋았죠. 당연히!”
익숙해지려고 며칠 동안 수없이 많은 스윙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 정도 노력으로 샷이 완성되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때문에 샷을 마친 필상은 미사키에게 자신의 스윙 밸런스부터 확인했다. 결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원하는 리듬대로 스윙을 했는지 여부였기 때문이다.
미사키는 필상이 전보다 더 다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하지만 대화가 끝날 무렵 땅에 착지한 타구는 여러 면에서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311야드? 맞바람이 있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바운드가 크게 튀면서 평소보다 런이 많았습니다.
-그렇다면 폭군이 장난이라도 친 건가요? 엄청나게 큰 스윙을 한 것처럼 보였는데…….
-스윙이 크게 보이기는 했으나 폭군 특유의 리드미컬한 정석 스윙이었습니다. 311야드면 짧은 거리도 아니고요.
-그래도 마치 바람 빠진 풍선 같은 장면이라 좀 아쉽기는 하네요. 여하튼 보는 재미는 있었는데 결과가 나쁘지는 않죠?
-바운드가 오른쪽으로 튀면서 러프로 굴러들어 가기는 했으나 다행히 세컨샷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첫 티샷부터 깜짝 놀랄 비거리를 예상했던 중계진의 어투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더 큰 위기도 수없이 극복했던 기억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세컨샷 지점에 도착한 필상도 실망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이 굴러들어 가지 않은 것에 크게 안도한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평소 라운드 중에 그런 미소는 절대 보이지 않던 그였기에 그 장면은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감정 하나 드러나지 않은 얼굴도 나름 조각상처럼 멋지지만 미소가 담긴 표정은 그보다 훨씬 멋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븐파만 쳐도 만족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네.”
“그러니까요. 며칠 전에 비가 왔는데도 땅이 이렇게 딱딱하면 물이라도 뿌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도 퍼스트 컷은 좀 잘라 놔서 다행이야. 최소한 그 범위 안에는 넣어야 할 것 같아.”
사실 페어웨이가 좁은 것이나 나무가 많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멘탈이 강하고 정교한 샷을 구사하는 필상에게는 큰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회 책임자는 굉장히 심술궂은 사람이 분명했다. 조금만 선수들의 입장을 배려하면 훨씬 멋진 경기를 관전할 수 있을 텐데, 실제 경기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공, 러프에서 벗어나지 못해 화를 내는 선수, 그린 주변에서도 비명이 자주 들렸다.
“굿 샷!”
남이 어떻든 신경을 끄기로 한 필상의 세컨샷은 그린 앞에 떨어졌다. 원하는 만큼 친 샷이다.
행여 그린에 떨어져 런이 많으면 그린을 오버해 어려움에 처할 것 같아 앞에 떨어뜨려 굴러 올라가기를 바란 샷이었다.
하지만 그린 앞의 러프는 그런 희망을 꺾어 버렸다. 마치 떨어진 공을 꽉 붙잡은 것처럼 바운드가 작았던 타구는 그린에 올라가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버렸다.
“러프에서의 샷인데도 저건 좀 심하네요!”
“그러게.”
마음에 들지 않아도 표정에 드러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지금처럼 허허 웃으며 받아넘기는 성격도 아니다. 때문에 미사키로서는 갑작스러운 이 변화를 좋게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필상의 확고한 집념이 한 단계 낮아진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곁눈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뭘 그렇게 자꾸 쳐다봐?”
“이상해서요.”
“뭐가?”
“프로님 이렇게 널널한 사람 아니잖아요?”
“널널? 하하하. 내가 지금 널널해 보여?”
“네. 전에는 이럴 때 찬바람이 쌩쌩 불었거든요.”
“속은 시베리아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하하하.”
내용은 믿음직했지만 여전히 웃고 있는 모습은 낯설었다.
그런 태도의 변화가 경기 운영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지만 필상의 경기력은 쇠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부드러워진 태도는 샷을 할 때 여유롭게 비쳤고 팬들이나 동반자들의 부러움까지 샀다.
“피칭 줘.”
“네.”
빠른 그린 주변에서 헤드가 무거운 클럽으로 어프로치를 하는 것은 모험이다. 조금만 힘 조절에 실패해도 핀을 확 지나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프의 저항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 내려면 헤드가 가벼운 웨지보다는 묵직한 클럽이 낫다.
-피칭을 잡았네요?
-좋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아까 래슐리가 피칭을 잡았을 때는 러닝 어프로치가 너무 무모하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아! 제가 그랬나요? 그건 각 선수의 특성을 고려한 판단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린이 빠른 경우, 웬만해서는 스핀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힘 조절도 아주 어렵지요.
-차별이 아니라 기량의 차이라는 말씀이시군요. 하하하! 하지만 저도 이해는 됩니다. 다른 선수는 몰라도 폭군이 피칭을 잡으니까 뭔가 잘 해낼 것 같다는 느낌이 드니까요.
-네이트 래슐리 선수에게는 미안하지만 실제 그의 샷 결과는 터무니없이 길었습니다. 그 샷과 지금 결과를 비교해 보면 왜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는지 납득이 되실 겁니다.
프랭크 해설의 이 발언은 상당한 책임이 뒤따르는 언급이었다. 만약 필상이 멋지게 붙이면 아무 상관이 없지만 래슐리와 별 다르지 않은 결과를 낸다면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표정의 변화는커녕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필상이 어서 칩샷을 감행하기만을 기다렸다.
절대적인 신뢰였다.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할 중계방송 해설가로서 적절한 태도는 아니었으나 그렇기 때문에 팬들의 관심을 더 끌어낸 측면도 없지 않았다.
피칭을 잡은 필상은 공이 놓인 라이를 꼼꼼하게 두세 번이나 확인했다. 헤드가 지나갈 자리의 풀이 헤드에 얼마나 걸리는지, 또한 어느 방향으로 누웠는지도 면밀히 살펴야 최적의 힘 조절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닌가요?
-바로 저런 모습을 다들 배워야 합니다!
-혹시 지연 플레이를 권고하시는 것은 아니죠?
-물론입니다. 길게 느껴지지만 폭군의 평균 샷 소요 시간은 투어 내에서 가장 빠른 편에 속합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티잉 그라운드나 페어웨이에 있을 때와 트러블 상황을 구분해 신중한 샷을 하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가끔 아마추어들과 플레이를 하다 보면 빨리 치는 것이 자랑인 것처럼 번개 샷을 구사하는 분들이 있죠. 연습 스윙도 한 번 하지 않는 방자함, 그건 필히 고쳐야 할 아주 나쁜 습관입니다.
-일전에 제게 말씀하셨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자한 그분이 혹시 사모님 아니던가요?
-챔블리……. 집중하세요. 폭군이 어드레스를 취했습니다.
프랭크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았다.
다만 후환이 두려워 밝히지 않을 뿐.
여하튼 필상은 생각보다 강하게 찍어 쳤다. 그냥 퍼팅을 하듯이 부드럽게 밀면 될 것 같은 상황이었기에 헛바람을 터트린 팬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헤드가 미처 깔끔하게 빠져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러프의 저항이 심상치 않았음이 확인되었다.
그래도 너무 강했다.
퉁 하고 튀어 오른 타구는 남은 25야드의 절반 지점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린의 속도를 고려하면 핀을 지나 반대편 러프로 굴러들어 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떨어진 타구가 움찔하는 순간부터 팬들의 환호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와우! 백스핀!”
“나이스 칩샷!”
움찔한 타구가 스핀을 먹었는지 마지못해 엉금엉금 기어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리막이기 망정이지 오르막이라면 당장이라도 섰을 정도로 강한 백스핀이 공의 진행을 가로막았다.
이대로는 깃대에 훨씬 못 미친 지점에서 설 것 같았다.
하지만 서서히 스핀이 풀린 공은 아주 느리게 구르기 시작하더니 홀컵을 향해 또르르 굴러가기 시작했다. 구른다기보다는 너무 미끄러워 밀리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났다.
그러면서 ‘인 더 홀!’이라는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사방에서 거의 동시에 터지기 시작했다.
-피칭으로 저런 스핀을 먹이다니요!
-그냥 밀어 쳐서는 저런 스핀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찍어 치듯이 내리 깎은 샷이 만들어 낸 아주 오묘한 칩샷 기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폭군의 저 피칭웨지 그루브를 한 번 보고 싶네요. 공의 표면이 깎인 자국이 있지 않을까요?
-있을 겁니다! 그냥 밋밋한 페이스로는 절대 저런 스핀이 걸릴 수가 없을 테니까요.
카메라맨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얼른 필상의 피칭웨지를 확대해 보여 주려고 했다. 하지만 클럽을 건네받은 미사키는 심술 맞은 아낙처럼 클럽 페이스를 수건으로 쓱 문질렀다.
물론 그녀는 공이 어디에 서는지 보느라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캐디로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했을 뿐이었다.
“이야! 파는 무조건 할 수 있겠네요.”
“파잖아!”
“아!”
그래 봐야 파(PAR)다.
하지만 마치 칩인 버디라도 들어가거나 이글을 노린 어프로치가 버디 기회를 맞이한 것처럼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당사자인 필상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행동했다. 듣고 보니 그러했는지 미사키도 어색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 필상의 가슴은 심하게 격동하고 있었다. 왜냐면 이능을 버린 자신이 원하는 샷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탁월한 선택이었어!”
“네. 피칭으로 정말 기가 막힌 스핀을 거셨어요. 역시 제가 모시는 우리 프로님다우셨어요.”
“하하하! 그래 좋아.”
필상은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솔직한 발언이었다. 그걸 미사키가 엉뚱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마침 대화의 짝이 잘 맞아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서로 마주 보고 웃으니 그 만족감이 순식간에 배가 되는 것을 느끼며 대회에 임하는 새로운 자세를 깨닫게 되었다.
의지는 강철처럼 단단하고 마음은 한겨울 북풍처럼 차갑게 유지하지만 그런 속내를 감추고 허허로운 자세를 드러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