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97화 (297/354)

297. 보통 사람

“우리랑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잖아!”

“그게 무슨…….”

경기에 집중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찜찜했다. 필상은 경기 중에 삭막할 만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만 가끔 눈이 마주치면 옅은 미소를 보였다.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해도 이 대표는 그 눈맞춤이 너무 좋아 지루하거나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이 팬들 속에 묻혀 있지만 그래도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기분 좋게 만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미켈슨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도 뭔가 허전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불꽃쇼를 하고 있음에도 필상이 타인처럼 느껴져 감정이입이 어려웠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어제 너무 충격을 받았나?”

“그래서 더 정신을 바짝 차린 거 아닐까요?”

“플레이가 좋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왠지 그게 좋게 느껴지지는 않아. 이 느낌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11번 홀에서 다시 버디를 잡는 순간, 필상은 단독 선두로 올라섰다. 선두였던 스피스가 9번 홀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는 필상이 무서운 기세로 추격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잘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턱밑까지 추격한 것을 알고는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패착이 되고 말았다.

기껏 줄인 1타를 까먹고 -4로 내려선 뒤로는 달아나는 필상을 추격하기는커녕 점점 더 깊은 늪으로 빠졌다.

“이제 살살 가셔도 될 것 같아요.”

5타를 줄인 필상이 2위와의 격차를 3타로 벌렸고 필상에게 유리한 13번 롱홀에 이르자 미사키는 참았던 말을 뱉었다.

잘 치고 있는 선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녀도 필상의 낯선 모습에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무슨 말이라도 받아 줬을 필상이지만 오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또다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염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경쟁자들이 어떻든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마술 같은 정교한 샷을 터트리며 13, 14번 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아냈다.

-한 마디로 폭군(暴君)이로군요. 하하하!

-철의 무제(武帝) 같은 위용입니다. 어제 박복한 플레이로 타수를 잃은 충격이 굉장히 컸던 모양입니다. 오늘은 마치 감정이 없는 샷 머신처럼 한 치의 빈틈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도 완벽해서 도리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괜히 기가 질리고 숨이 막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절대자가 보여 준 플레이는 골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18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까지 흩뿌리는 악천후, 장소는 TPC 하딩파크, 그가 우승을 향해 질주하는 이 대회는 다름 아닌 PGA 챔피언십입니다.

이미 작년에 우승을 맛봤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럴 리는 없지만 지난해 우승이 어? 어? 하다가 졸지에 성취한 느낌이 강한 반면, 올해는 쏟아지는 압박감에 심장이 터질 정도였다.

평생 투어를 뛰어도 우승 한 번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도 부지기수다.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하니 필상이 나오지 않은 대회의 우승 경쟁이 더욱 극심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믿기 힘든 연승을 달리고 있지만 이번 대회만은 어려울 것이라고 예측한 전문가들의 예상은 매번 번번이 빗나갔다. 그런데 이번 대회는 정말 조짐이 좋지 못했다.

지독히 운이 따르지 않는 느낌?

하지만 필상은 결국 해내고 말았다.

[오늘만 7언더! 4타 뒤지다 3타를 앞선 역전 우승!]

[불운과 바람마저도 굴복시킨 필드의 절대자. 과연 누가 있어 그를 막을 것인가?]

[메이저 대회 5연승. 캘린더 그랜드슬램 달성에 성큼.]

[무서웠다! 불가능도 가능하게 만드는 철인 골퍼.]

필상의 PGA 챔피언십 우승은 확고한 절대자의 자리를 굳힌 대회로 인정받았다.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비범한 기량을 보였기 때문이다.

강한 바람에 비까지, 우승권에 있던 선수 중에 언더파를 기록한 선수는 오로지 필상뿐이었다. 그 내용 또한 너무도 완벽해 경쟁자들의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 * *

PGA 챔피언십은 필상에게도 큰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초감각을 개방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해 눈을 뜬 것이다. 물론 그런 변화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기껍지 않았다. 그 뒤로 필상이 다른 사람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미켈슨은 일본으로, 이 대표도 한국으로 돌아갔다. 뭔가 탈속한 느낌의 필상을 마주하는 것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자위했지만 두고 볼 문제였다.

필상의 행보도 특이했다.

4주 후에 열리는 US 오픈을 준비하려면 뉴욕으로 날아가야 하는데, 저 홀로 할 일이 있다면서 콜로라도로 날아갔다.

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로키산맥이 목적지였는데, 그런 내용을 알 리도 없이 늦게 도착한 서 팀장은 아예 전화기까지 꺼 놓은 필상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해 애를 먹어야 했다.

‘마음이 닿는 대로 그냥 가 보자!’

말은 좋지만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다. 산이라는 곳은 그렇게 무턱대고 인간의 욕망을 채워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덴버를 통해 로키산 국립공원에 발을 디딘 필상의 행로는 일반 등산객들과 달리 거침이 없었다. 인적이 없는 심산으로 들어가려면 단단히 준비해도 모자랄 텐데, 마트에 들려 대충 장을 봐 배낭 하나를 채운 게 전부였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점퍼 깃을 세워 사람들이 필상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그 시간에 산으로 들어가기 위해 물건을 사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던 듯.

“불부터 피워야 하나?”

위대한 자연의 기운을 느끼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발길 닿는 대로 산을 올랐지만 경험한 것은 혹독한 냉대였다.

어두워지면서 기온이 급강하하는데, 몸을 눕힐 곳도 찾지 못한 필상은 겨우 모닥불을 피우고 그 곁에서 쭈그리고 잤다.

하지만 발길을 돌리기는커녕 다음 날 더 높은 곳을 향해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서서히 풍찬노숙의 요령이 생기면서 사흘이 지난 뒤에는 바람을 피할 작은 동굴을 찾아냈다.

자신의 몰골이 거지나 다름이 없다는 것도 모르고 훤히 트인 시야와 주변을 감싸고도는 자연지기를 느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어디 한 번 부딪쳐 볼까?”

자신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능력들을 애써 거부해 왔다.

살짝 맛만 봐도 두려울 만큼 대단했으며 그에 따른 부작용을 겪은 뒤에는 가급적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완성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치 못하게 초감각을 개방할 상황을 맞이했고 그것을 경험한 뒤, 필상의 생각은 달라졌다.

그 끝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는 두려움보다 희망과 기대가 더 커졌기 때문이다.

‘진즉에 극복했어야 옳았던 걸까?’

식사도 제때 하지 못하고 변변히 쉬지도 못했지만 산에서 지내는 하루하루가 필상에게는 아주 소중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즉에 이런 시간을 가졌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눈앞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너무 급급했고 안전한 선택을 해야 할 필요 또한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룬 것들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친 극적인 상황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못하고 매번 물러섰던 것도 사실이다.

그게 자신이나 가족들을 위해 옳은 선택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인데, 이제와 돌이켜보니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후회하지는 않아! 너무 소중한 것들을 얻었으니까!’

진즉에 결단이 필요했지만 그것이 불러올 결과가 반드시 희망적이지 않을 수 있어 자신의 판단을 후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시간들을 용케 버틴 것이 지금은 보다 안전한 시도를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과 정면으로 승부를 결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벅찬 기대와 더불어 일말의 불안감이 상존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도전 의식은 점점 더 강렬해졌으며 주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빠르게 전개되었다.

어쩌면 모든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불확실성에 기대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 * *

‘어디시라고요?’

“덴버. 곧 비행기를 탈거야. J. F. 케네디 공항에서 만나.”

‘와아! 미치겠네요. 그동안 어디 계셨던 거예요?’

“만나서 얘기하자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던 필상이 하산해 덴버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을 때는 금요일 저녁이었다.

하마터면 US오픈에 출전하지도 못할 뻔했다. 오랜만에 핸드폰을 켰더니 수없이 많은 전화가 수신되어 있었다.

일단 자신을 보좌하는 것이 임무인 서 팀장에게 뉴욕에서 만나자는 전화를 건 필상은 곧바로 아내와 통화했다.

산에 오르기 전에 문자 하나를 남겼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던 듯, 모모코는 의외로 쿨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 일 없죠?’

“그럼. 모든 것이 잘됐어!”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자세한 이야기는 US오픈을 끝내고 귀국한 뒤로 미뤘다.

이제 자신이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전화로 옮기기에는 너무 무거운 화제였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

그건 필상의 선택이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초능력을 맛봤다. 후세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을 취하는 순간, 자신은 더 이상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유명인이 겪는 고충은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지금도 그걸 감당하기 벅찬데, 더 이상 복잡한 삶은 원치 않았다. 그저 아내와 딸, 가족들과 오순도순 잘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며칠은 자신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비우는 데 시간을 썼다. 그런데 그 시간이 더 행복하고 좋았다.

“어머! 어머!”

“왜?”

“얼른 나가요.”

“난 좋기만 한데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하하하.”

서 팀장과 미사키가 왜 깜짝 놀랐는지 필상도 짐작했다. 공항에는 필상의 도착을 기다리는 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그런데 필상이 버젓이 나타났는데도 알아본 이들이 없었다. 서 팀장도 미사키도 필상이 가까이 다가온 뒤에야 알아보고는 기겁을 했으니 오죽하랴!

그도 그럴 것이 필상의 외모는 3주 남짓한 기간 동안 완전히 바뀌었다.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했으며 늘 태양 아래 좌정하고 있었기에 까맣게 탄 얼굴은 중노동을 하는 남미 출신 노동자처럼 보였다.

만약 깨끗이 차려입지 않았다면 비행기에 태워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85kg이던 체중은 73kg까지 빠졌다.

일행은 얼른 주차장에 대기한 차에 올랐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냥 푹 쉬었어.”

“나 참! 왜 이렇게 빼빼 마른 거죠? 대체 뭘 드셨길래?”

“살이 너무 빠졌나? 여하튼 다이어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면 아주 잘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아. 하하하.”

“일단 좋은 식당으로 가서 밥부터 드셔야겠어요.”

“괜찮으니까 일단 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가자.”

“정말 괜찮으세요?”

“그렇다니까. 비행기에서 이것저것 시켜 먹었어.”

사실 산중에서 먹은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다. 그러고도 맑은 정신과 체력을 유지한 것을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하지만 이젠 보통 사람이 되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연습하러 안 가세요?”

“가야지.”

다음 날 필상은 여느 때처럼 새벽 일찍 일어났다.

평소처럼 조깅으로 하루를 열고 간단히 샌드위치로 허기를 메웠지만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게 의아해 미사키가 보챘지만 필상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과연 자신의 샷이 정상인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것은 만족스러운데, 가장 중요한 능력마저 사라진 건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깨끗하게 면도를 했지만 그래도 워낙 외모가 변모했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깜짝 놀라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연습 라운지, 자신을 향한 시선이 이렇게 무거운지 새삼 깨달았다.

“60도 웨지.”

“몸도 안 풀고요?”

“몸은 이미 충분히 풀었어.”

조깅하면서 수없이 이미지 스윙을 했다.

마치 처음 대회를 나가는 아마추어 선수처럼 들뜬 마음으로 웨지를 잡은 필상은 최대한 차분하게 어드레스를 취했다.

그리고 가볍게 플랍 샷을 구사했다. 벙커 샷을 하듯이 클럽 페이스를 열고 공을 살짝 띄워 그린에 딱 멈추는 난이도가 높은 샷이다.

그런데 정확한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샷은 이전보다 더 정밀하고 샷의 전 과정이 온전히 느껴진다는 사실을.

“나이스 샷!”

“장난해?”

“걱정했거든요. 갑자기 체중이 빠져서.”

“썩어도 준치라잖아. 하하하!”

자신의 웃음소리가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인지한 필상은 얼른 자세를 잡고 다양한 샷을 구사해 봤다. 그런데 자꾸 피식피식 터지는 웃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비운다고 비웠는데, 다른 모든 것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샷 감각 하나만은 이전과 비교해 전혀 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지를 놓고 아이언을 잡은 필상은 깜짝 놀랐다. 거리가 확연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갑작스러운 비거리의 변화는 줄어든 체중과 연관이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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