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96화 (296/354)

296. 깊은 잠

“필. 확실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지만 우승하려면 오늘처럼 쳐서는 충분할 것 같지 않은데?”

“네. 내일은 좀 더 공격적인 전략을 펼쳐 보려고요.”

“그럼 하루 더 보고 가야겠네.”

“아! 내일 가시려고 했습니까?”

“응. 아침에 가려고 했는데 자네가 강풍에서 어떤 샷을 하는지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하루 더 있어야겠어.”

“바람이 강하답니까?”

스스로 뭔가 허술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나 대회 준비에 만전을 기했는데, 마스터즈를 우승하며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뒤에 뭔가 자꾸만 엇나갔다.

충분한 휴식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아 컨디션 조절부터 실패했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신경 쓰느라 코스를 면밀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일 날씨조차 파악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과분한 복을 받아 절대자의 권위를 누리고 있지만 골프는 아주 민감한 운동이다. 초감각을 믿고 해이한 마음을 지니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무너진다.

‘오늘 밤은 명상이 필요하겠어!’

컨디션 회복에 토납이 도움이 되지 않아 그간 소홀했다.

그런데 토납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초감각적인 능력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관조하며 마음을 다질 수 있었고 항상 꼼꼼하게 준비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육체적인 능력보다 정신적인 부분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망각하고 본연의 자세를 잃었다는 판단에 필상은 자신과의 싸움에 들어갔다.

자만하거나 안주하면 언제든 자신이 바라던 목표는 깨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졌건만 3라운드는 원하는 방향대로 흐르지 않았다.

-어? 이번 타구는 아까보다 더 깊이 파묻힌 것 같은데요?

-네. 왜 자꾸 무리수를 두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드레스를 하면 몸이 흔들릴 정도로 바람이 강한데, 왜 특유의 안전하고 정확한 샷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안타깝습니다.

필상도 그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 화근이었다. 1, 3번 홀에서 버디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도 아쉽게 파에 머문 필상은 첫 롱홀인 4번 홀에서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524야드였기 때문에 티샷으로 350야드를 공략하면 2온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바람이 말썽이었다.

슬라이스 바람이 부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살짝 드로우를 걸었는데, 예상보다 강한 바람은 공을 우측 러프로 떠밀었다.

거기까지는 극복 가능한 옅은 실수였으나 문제는 세컨샷이었다. 욕심을 버리고 깔끔하게 100야드를 보내는 3온 전략으로 수정했지만 타구는 벙커에 빠지고 말았다.

또 한 번 러프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아까의 악몽이 재현되면 안 되는데…….”

“에이. 설마요!”

“공 프로의 태도가 좀 이상하지 않아? 내가 볼 때는 평정심을 잃은 것 같아.”

이 대표도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예감이 틀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4번 홀에서 작은 실수가 점점 더 치명적인 실수로 바뀌었던 기억이 너무 생생했다. 페어웨이를 가로지른 벙커는 좀 지저분하게 생겼지만 터무니없이 난해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필상의 타구는 턱을 넘지 못했다. 8번 아이언의 로프트를 정상적으로 활용했다면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테이크백을 할 때 디디고 있던 발밑의 모래가 찔끔 밀렸는데, 그걸 무시하고 그냥 때린 샷은 탑핑이 되었던 것이다.

4온 2퍼팅, 보기.

파는 고사하고 이글을 그리고 있던 필상이 버디나 파는 고사하고 보기를 기록하는 순간,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8번 홀까지 파로 잘 버텼는데, 471야드 파 4홀은 장타 이외에 답이 없었다. 게다가 좌측 도그렉 홀이라서 드로우에 능숙한 필상은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드로우는커녕 스트레이트로 날아가던 타구가 실 끊어진 연처럼 비실비실 밀리더니 갈대숲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누가 밟은 것 같아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부정하기 어려웠다.

공이 놓인 갈대숲은 방금 전까지 갤러리들이 우르르 몰려 있던 지점이고 미사키의 ‘볼!’ 소리에 황급히 뒤로 물러났었다.

어쩐지 타구의 방향을 정확히 보고도 찾기 쉽지 않다 싶었는데, 묘하게도 공의 80% 가량이 진흙에 박힌 상태였다.

아무리 탄도가 높이 뜬 상태로 떨어졌어도 이렇게 푹 박힐 가능성은 낮다. 깜짝 놀라 이동하던 와중에 개념 없는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지 않았다면.

어차피 확인되기 어렵겠지만 설사 확인된다고 하더라도 구제받을 방법은 없다. 애초에 그리 보낸 것부터가 실수였을 뿐!

뭔가 꼬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생각이 스윙에 도움이 되지 않아 일단 이번 샷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하는 건 어때요?”

“그것도 선택 가능한 방안이지.”

문제는 드롭 할 수 있는 위치도 썩 내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냥 페어웨이에 꺼낸다는 생각으로 찍어 쳤다.

팍!

잡풀들이 스윙을 방해했으나 공은 제대로 떠올랐다.

대략 30야드나 나왔을까? 무척 실망스러운 거리였으나 다음 샷이 가능한 위치로 공을 잘 꺼낸 것은 다행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지만 다른 게 신경을 건드렸다. 공에 덕지덕지 붙은 진흙이 눈에 밟혔다. 정상적인 샷에 대한 의문이 생긴 것이다.

“별의별 일이 다 있네!”

“프리퍼드 라이 룰이라도 적용되면 좋은데요…….”

비가 많이 오거나 침수된 지역에 공이 놓일 경우, 공을 닦거나 정상적인 라이로 옮길 수 있는 규정이 있지만 지금은 그게 허용되는 날씨나 상황이 아니다.

바람도 거센데 어떻게 갈대숲 안은 축축한 것인지, 그게 다 자신의 경기를 훼방하는 요소로 비쳐져 씁쓸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마음 상하지 말고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만 했다. 임팩트를 가해야 할 부분에 흙이 묻어 있어서 원하는 방향대로 날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공에 가해지는 힘이 약해질 가능성이 높아 조금 더 강하게 치는 것이 옳은지 그 계산이 필요했다.

“필. 공 프로가 왜 저러죠?”

“공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혹시 갈라지거나 깨진 걸까요?”

멀어서 정확히 보이지 않았으나 필상이 허리를 숙여 공을 세심하게 살피는 모습이 갤러리들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인플레이 중에는 공이 둘로 쪼개질 정도로 크게 파손되지 않으면 공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외피가 찢어지거나 심하게 긁히는 경우는 종종 발생한다.

샷 결과에 치명적인 경우는 드물지만 선수의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중계진도 필상이 시간을 끌자 카메라를 공에 클로즈업 시켰다.

-아! 흙이 묻었군요!

-하필 클럽페이스가 닿는 부분입니다. 다른 곳에 흙이 묻어도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데, 참으로 난감하겠습니다.

-그냥 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죠?

-일단 스핀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공이 얼마나 나갈지, 어떤 방향으로 휠지 계산하기가 어렵습니다. 공과 페이스에 끼인 흙이 어떠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미스터 퍼펙트의 운이 좋지 않은 건 분명하군요. 하필이면 갈대숲에 들어가 겨우 꺼냈는데, 다시 흙이 묻은 공을 때려야 한다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을 것 같군요.

-그걸 이겨 내야 우승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승리는 그에 어울리는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은 그럴싸했지만 필상을 응원하는 팬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공정해야 할 스포츠에서 누군가 일방적인 고난을 강요받는다면 그건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급부도 작용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선수에게 감정이입이 되기 때문에 더 강한 팬덤이 형성될 수도 있다. 결과가 어떻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극복하면 더더욱 좋겠지만 샷 결과는 터무니없었다.

잘 날아갈 것 같던 공이 마치 벽에 부딪친 것처럼 갑자기 뚝 떨어지면서 좌측 벙커로 굴러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썩을……!”

평소 험한 말을 쓰지 않는 필상이지만 이 결과에는 분통이 터졌다. 마치 야구의 포크볼처럼 심하게 흔들리며 날아갔다.

그냥 페어웨이나 러프에 떨어질 수도 있는데 하필이면 벙커로 기어들어 갈 건 또 뭐냔 말이다.

클럽을 챙기는 미사키도 필상의 사나운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이동하며 뭔가 위로하고 싶었으나 샌드웨지를 꺼내 들었을 뿐, 끝내 말을 붙이지 못했다.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떻게? 그냥 남은 샷에 집중해야지.”

“그걸 지금 내가 모를까 봐 그래요!”

별안간 소리를 빽 지르는 이 대표도 분노 조절에 실패한 사람 같았다. 주변에 있던 팬들은 미켈슨이 미모의 동양 여인과 함께 경기를 따라다닌 것을 신기해하며 보던 차였다.

그런데 신경질적인 반응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걸 보며 묘한 시선을 보냈다. 일과 얽힌 사이라는 것은 짐작되지만 그렇다면 그런 모습이 더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미켈슨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공이 위대한 선수라는 것은 알아. 그리고 지금까지 거저 우승을 거뒀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하지만 지금 겪는 이런 과정은 앞으로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머, 멀리 보라는 말이죠?”

“응. 한두 해 투어 뛰고 말 게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오늘은 심해도 너무 심해서 그래요. 화내서 미안해요.”

“이해해. 누구보다 공 프로의 성공을 바라고 좋아하니까 그러는 거.”

“제 선수니까 그러죠. 제 선수!”

누가 뭐랬나?

괜히 오버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좋아한다는 말이 걸렸는지 새침한 표정으로 자신이 매니저임을 강조했다.

물론 미켈슨은 씩 웃고 말았지만.

“정말 고생 많았어.”

“고생이요? 그렇죠. 오늘 같은 날은 또 처음이었으니까!”

필상은 결국 3오버로 경기를 마쳤다.

더블 보기를 2개나 기록한 것이 치명적이었으나 후반에 타수를 줄이지 못하고 버디 2개, 보기 3개를 기록하며 1타를 더 잃은 것도 상당히 아쉬웠다.

하지만 결선에 진출한 67명의 평균 타수가 +4.12가 나온 것을 보면 얼마나 어려웠던 날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 와중에도 언더파가 7명이나 나왔다는 점이 가슴 아팠으나 이미 끝난 결과를 되새기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뿐.

“씻고 나와.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네. 찬물에 샤워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제법 쌀쌀한 기온이었으나 필상은 정말로 찬물로 몸을 적셨다. 그래도 열이 식지 않을 만큼 열불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경기를 마치고 웃으며 나왔으나 그건 가식이었다. 실제 속마음은 닥치는 그 무엇이라도 마구 부수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오늘 아침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스윙도 흠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 정반대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답답했다.

-5 조던 스피스

-4 패트릭 캔틀레이

-3 저스틴 로즈

-2 토니 피나우, 임성재 외 3명

-1 공필상 외 4명

최악의 하루를 보내고도 아직 공동 9위라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이날 1타를 줄인 스피스의 플레이와 비교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치욕적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팬들 앞에서 웃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래! 뭘 아끼겠어!”

필상은 그동안 꾹꾹 눌러 왔던 초감각을 개방할 결심을 했다. 스스로 자제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4타 차를 따라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가용한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골프를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 평정심을 잃은 적이 없다. 그런 자신의 상태를 감지하고 자제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또한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던가!

샤워를 마친 필상은 여느 때처럼 지인들과 식사를 나눴지만 연습장에는 가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시선을 뒤로 한 채 숙소로 돌아온 필상은 그냥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잠시 후 코를 드르렁 거리며 깊은 잠에 빠졌다.

-와우! 정말 기가 막힌 샷이네요!

-그렇습니다. 전반 9홀을 치며 페어웨이를 단 한 번도 놓치지를 않고 있습니다. 최악의 바람 때문에 다들 드라이브를 들지도 못하는데, 마치 바람의 아들 같은 샷을 하는군요!

-진정한 필드의 절대자, 아니 이 정도면 필드의 지배자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말이 나올 만했다.

왜냐면 아웃코스를 도는 내내 장타와 정확도를 겸비한 필상은 무려 4타를 줄이며 공동 2위까지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뒤에서 플레이하는 리더 보드 상위권 선수들이 겨우겨우 버티지만 타수를 잃을 가능성이 더 높아 이미 우승 가시권에 들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건…….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뭐가요?”

“평소의 공 프로 같지가 않아. 마치 신들린 사람 같다고나 해야 할까?”

“치! 멋지기만 한데 뭔 소리에요!”

“라일리. 정말 그렇게 생각해?”

“왜요? 불안한 생각을 하는 이유가 뭔데요?”

미켈슨은 어제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필상이 걱정되어 가지 못한 것이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었으나 그냥 숙소로 돌아가는 바람에 조언은 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마지막 날을 함께하려고 일정을 미뤘다.

그런데 최종 라운드의 아침에 필상은 늦잠까지 잤다. 경기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데, 대체 왜 그러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필상은 펄펄 날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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