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94화 (294/354)

294. 내 눈의 들보

“정신 차리자. 공 필상!”

충만하던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메이저리그를 너무 쉽게 봤던 자신에게 응징을 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뭔가 보여 주겠다는 생각도 홀연히 사라졌고 과연 창피를 당하지 않는 투구를 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함께 걸어 나온 보치 감독은 달랐다. 이런 상황을 수없이 겪어 봤던 그는 필상의 어깨를 툭 치며 여유롭게 한마디 던졌다.

“오거스타 12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섰다고 생각하게.”

“아! 그거 보셨습니까?”

“생애 최초로 트리플 보기를 할 수도 있지만 멋진 버디 찬스를 만들 수도 있지. 오로지 자신의 스윙을 믿고 치듯이 자네가 연습한 투구 메커니즘을 신뢰하고 그대로 던지게.”

“네. 알겠습니다.”

여유를 찾은 필상은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부터 했다. 그 과정을 통해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마침내 투수판을 밟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을 한단 말인가!

포수 미트를 보며 집중력을 발휘하자 서서히 주변의 소음이 차단되었고 타석에 선 다저스의 리드오프 A.J. 폴락의 포스도 느껴지지 않았다.

-필드에서는 모두를 압도하는 극강의 절대자지만 역시 야구장의 분위기는 익숙하지 않은 거죠?

-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군요. 친근한 골프 클럽이 아닌 글러브를 끼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골프는 샷을 할 때 매너를 지키지만 야구팬들은 그렇지가 않거든요. 온갖 야유와 응원을 계속 퍼붓기 때문에 환경 자체가 낯설 겁니다.

-곁에 캐디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 저도 골프를 좋아하고 그의 경기는 거의 빼먹지 않고 보지만 전 미스터 퍼펙트가 이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 봅니다. 각종 기록이란 기록은 다 갈아치우고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한 투어프로지만 역시 주 종목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하하하!

-그런데 점점 더 차분해지는 것 같습니다. 샷 루틴에 들어가듯이 투구 동작에 들어가자 특유의 저 얼굴, 포커페이스가 나오지 않습니까?

본래 야구장은 시끄럽다.

하지만 필상이 투구 동작에 들어가자 다들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투수 뒤에 서 있던 보치 감독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해 달라는 제스처를 취하는 걸 봤기 때문이다.

일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진지한 필상의 행동에 야구장에서 보기 드문 침묵이 찾아들었다. 팬들도 필상이 익숙한 환경을 이해한 것이다.

집중력이 극도에 달하고 자신감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순간, 필상은 서서히 와인드업에 돌입했다.

마치 팀의 에이스처럼 진지한 태도와 자연스러운 투구 동작에 사람들의 기대가 잔뜩 부풀어 올랐다. 들어 올렸던 왼발이 앞으로 쭉 뻗어 나가며 상당히 긴 스트라이드를 밟았고 그 뒤로 가속이 붙은 오른팔이 몸 뒤에서 불쑥 나타났는데, 아무리 봐도 흠 잡을 데가 없는 유연한 투구 동작이었다.

파앙!

관중석의 팬들은 일제히 기립했다. 너무도 예상과 달랐던 강속구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것이다.

타석에 서 있던 폴락은 형식적이나마 스윙을 하려고 했다. 가운데로 들어올 가능성은 낮기 때문에 헛방이라도 치는 것이 시구자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것 같았던 강력한 패스트볼에 위협감을 느낀 그는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그러나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 소리를 들으며 무심결에 쳐다본 전광판에는 믿기 힘든 투구 속도가 기록되어 있었다.

-92마일(시속 148km)? 저건 고장 난 거 아니죠?

-눈으로 직접 보셨잖습니까!

-와아! 정말 놀랍습니다. 훈련도 받지 않은 아마추어가 저런 무시무시한 공을 던질 수 있는 건가요?

-워낙 운동신경이 좋은 선수이다 보니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는 야구 선수가 아니라 골퍼입니다. 프로 골퍼.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저 정도 구속이면 정식 훈련 과정을 거칠 경우, 파워 피처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나요?

-한 번 보고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타고난 소질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네. 정말 소름끼치는 재능입니다!

필상은 공이 한가운데로 들어간 것을 보고 비로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팬들의 뜨거운 환호가 스트라이크를 던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중계진이 온갖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을 알 리 없었다.

무사히 시구를 마친 필상은 보치 감독과 악수를 나누고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눈 뒤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팬들은 필상을 보내고 싶지 않았는지, 이상한 외침이 그라운드를 가득 메우며 반복되었다.

앵콜?

이게 무슨 쇼라도 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이없는 웃음을 짓던 필상은 낯이 익은 선수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류현진 선수 아닙니까?”

“와아! 반갑습니다. 공 프로님.”

“우리 동갑인데, 나중에 시간되면 밥 한 번 같이 먹읍시다.”

“네. LA 오시면 제가 좋은 음식을 대접할 테니 꼭 좀 연락 주십시오.”

“오케이. 오늘 잘 던지길 바랄게요.”

“네. 고맙습니다.”

길게 안부를 나눌 상황이 아닌 게 아쉬웠다.

어려서 축구나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던 필상은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 선수라면 다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일부러 공부를 한 바 없지만 열성팬이라면 나이 정도는 기본이었다.

“시구 구속이 얼마나 나온 줄 알아?”

“아! 제가 좀 세게 던졌나요?”

힘을 빼고 던지려고 했다.

어차피 구속이 중요한 게 아니고 망신만 당하지 않으면 되기에 연습 때보다 더 부드럽게 던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운드에 서자 그런 생각은 까맣게 잊었고 오로지 투구에만 집중하면서 그냥 잘 던지려고만 했던 결과였다.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의도와 다른 투구를 했음에도 자신이 확인하지 못했던 구속이 궁금하기는 했다.

“92마일. 지금 뉴스 속보가 막 뜨고 있어.”

“속보라니요?”

“아마추어 참가하면 얼마나 받을지 그걸 추산하는 기사도 나온다니까!”

이 대표는 속보로 뜬 기사들을 띄워 필상에게 내밀었다.

그녀나 필상이나 그 기사들을 찬찬히 살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변에 있던 팬들이 너도나도 필상에게 다가와 하이파이브를 청했기 때문이다.

기분 좋게 받아 준 필상은 경기가 시작되면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어수선했지만 어렵게 찾아온 기회였기에 경기에 몰입하려고 애썼다.

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말이 필요 없는 라이벌전이라 내놓고 류현진을 응원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KBO 경기는 많이 봤지만 메이저리그 경기를 처음 직관하면서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야구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그라운드에 뛰쳐나가 같이 경기를 하고 싶을 만큼.

* * *

“고맙습니다.”

“왜 이래? 우리가 그런 말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아.”

“그래도요.”

공식 연습 라운드가 열리기 전날 저녁, 어김없이 이 대표의 마사지를 받은 필상은 이제 자신의 컨디션이 정상적인 스윙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아직 최고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이 대표가 따라와 정성을 쏟는 바람에 대회를 치를 기본을 갖추게 되었다.

과도한 휴식이 부른 대가가 이렇게 혹독하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는 처해진 상황이 급박했다. 만약 그녀가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꿈은 엉뚱한 착오로 인해 일그러졌을지도 모른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찍 주무세요. 공 프로님.”

“아. 네. 그러겠습니다. 대표님도 좋은 꿈꾸십시오.”

“야릇한 꿈은 이미 많이 꿔서 그냥 푹 잘래요. 호호호.”

“아. 네.”

장난처럼 던진 이보영의 존칭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보다는 이전보다 더 자연스럽고 친밀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반감을 없애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경과되었고 약간의 노력도 첨가된 결과였다.

모모코가 그녀의 동행을 부탁했다는 말에 처음에는 놀라고 불안했지만 총체적인 이해를 하자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축복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어!’

누군가 필상의 상황을 안다면 여복이 터졌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여자 저 여자와 인연을 이어 가는 것이 찜찜하다 못해 부정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 필상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이 모든 것들이 인위적인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부정하다 생각할 이유도 없다.

당사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대안대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인연의 자락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다만 그 모든 과정에 자신의 이기적인 의도가 타의를 방자해 작용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 확인이 필요할 뿐이었다.

‘이걸 기구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원지 않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기구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가 아무런 부담도 없이, 오히려 이와 같은 인연을 원하고 그것이 자신의 꿈과 부합해서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떳떳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던 봄과는 일찌감치 관계를 정립했다.

다만 이 대표와의 애매한 인연이 마음에 걸리는데, 그 방법이 야릇한 것이 문제일 뿐, 법적인 하자는 없지 않은가?

물론 앞으로 극복해야 할 사안이다. 당장은 엉겁결에 진행되었지만 언제까지 그런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과도한 축복에 따른 부작용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환자가 아픈 곳을 치료받듯 필요한 처치를 하는 것이다.

‘너무 이기적인 사고인가?’

당장의 목표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마저도 둘러 갈 수는 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토납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면 가능하다는 판단도 내렸다.

그러나 이 대표와 모모코, 그리고 자신의 이해가 일치하고 서로 신뢰하는 마음이 굳건하기 때문에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라고 자위했다.

그날 밤, 모모코와 통화한 필상은 컨디션이 올라왔다는 말에 잠시 멈칫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했다. 쉽지 않았을 텐데.

‘당신을 믿고 이 대표님도 믿어요. 그러니까 부디 힘내요!’

너무 신바람이 난 것일까?

연습 라운드에서 실제 스코어를 기록한 필상은 실망했다.

TPC 하딩파크에서 열린 메이저 대회의 기록들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재작년 코엡카의 우승 스코어는 -8이었으며 언더파는 단 6명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버디는 3개를 기록한 반면 장타를 팡팡 날린 롱홀에서 이글은 번번이 실패했고, 오히려 보기 3개와 더블보기를 하나 기록하면서 2오버를 기록하고 말았다.

그래서 연습 라운드를 마친 필상은 연습장이 아닌 숙소로 돌아와 오늘 자신의 라운드 내용을 치밀하게 복기했다.

미사키는 물론 경기를 지켜본 이 대표까지 합류해 모든 샷 상황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문제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 대표에게서 치명적인 지적이 나왔다.

“지난번 마스터즈 경기 때와 비교를 해 보는 건 어때?”

“절대 분석이 아닌 상대 분석이 필요하다는 건가요?”

“응. 내 느낌에 전체적인 스윙 템포가 빨라진 것 같았거든.”

“그래요? 그 자료들은 있나요?”

“당연하지.”

이 대표는 자신의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펼쳤고 그 안에는 필상이 지금까지 치렀던 모든 경기 영상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정성을 들여 다양한 분석까지 곁들인 것을 보면 여러 전문가의 체계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매번 영원히 절대자의 위용을 자랑할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런 때를 대비해 자료를 준비했던 것이다.

“언제 이런 걸?”

“이게 매니저인 내 일이잖아. 이게 지금 같이 빨리 쓰일 일은 없을 줄 알았어. 시간이 많이 흐른 나중에 이 소중한 자료들로 스윙 교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이건 꼭 필요하고 중요한 자료네요. 인간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처한 상황마다 수없이 많은 변화가 일어나거든요.”

“일단 자료부터 보자고.”

데이터를 구체적으로 내지 않아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대표의 지적은 정확했다.

컨디션 난조를 극복한 필상은 정말 스윙 템포가 빨라졌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조바심이 심신을 모두 장악한 결과였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를 찾아냈다. 역시 비슷한 원인으로 보이지만 가만히 보니 모모코가 겪은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남의 눈에 티끌은 잘 보여도 내 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는다는 성서의 구절이 떠오르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역시 만만한 코스가 아니죠?

-알다시피 악명이 높은 코스입니다. 이번에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러프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는 겁니다.

-페어웨이나 그린의 잔디 길이에 대한 규정은 잘 지킨 것 같은데, 러프는 왜 자르지를 않은 거죠? 러프에 대한 규정도 있지 않나요?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러프의 길이는 권장 사항일 뿐, 주최 측이 로컬 룰로 정하면 사무국에서 강제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참 고약한 세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긴 태평양에 연한 코스라서 바람도 심상치 않죠? 그나마 오늘은 그래도 바람이 잔잔한데 선수들이 애를 먹는 게 모두 저 긴 잡풀들 때문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러프는 물론 홀의 경계 지역으로 들어가면 허리 높이까지 자란 갈대와 수북하게 자란 나뭇잎과 가지들로 인해 공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갤러리들이 밟아 놓은 지역에 떨어지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잘나가다가도 한 번 삐끗하면 여지없이 2, 3타를 잃어버리니 선수들의 스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필상도 하루 동안 자신의 문제점을 개선해 초반에는 2타를 줄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쉬운 9번 홀에서 페어웨이에 떨어진 공이 우측 러프로 튀어 들어간 게 문제였다.

약간 티샷이 밀린 대가치고는 너무 혹독했다. 질기게 엉킨 러프에 잠기는 바람에 요령껏 쳤는데도 공은 원하는 만큼 날아가지 않았고 좌측으로 감겨 다시 반대편 러프에 잠겼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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