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93화 (293/354)

293. 시구(始球)

‘몽정(夢精)이었나?’

한 바탕 폭풍이 몰아쳤지만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당사자 둘도 그냥 의자를 뒤로 눕히고 조용히 숙면에 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이 경험한 야릇한 상상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똑같은 경험을 이보영도 치렀는데,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여운을 잠재울 뿐이었다.

물론 필상은 자신만의 못된 꿈이었다고 애써 해석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자신의 기력이 상당히 호전되었다는 것이다. 그걸 감안해 모모코가 이 대표를 동행시켰다는 것도 몰랐다.

그녀는 미국에 볼일이 있어 동행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곧바로 샌프란시스코로 갈 거죠?”

“네. 굳이 LA에 머물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근데 갑자기 웬 존칭?”

“잔다고 잤는데 역시 비행기에서 자는 것은 익숙지가 않은가 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전 아주 잘 잤습니다. 하하하.”

LA 공항에 내린 둘은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다소 오버했다. 그 와중에 미사키는 별 감흥이 없는지 어서 한국 식당에 들려 밥부터 먹자고 보챘다.

그런데 유명한 한국 식당에 들어서자 한국 방송을 틀어 놨다. 그것도 모모코가 출전한 KLPGA 챔피언십, 반가운 마음에 TV가 잘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했다.

“챔피언조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어.”

“그게 좀 아쉽네요. 그나저나 우리 모모코는 연습을 잘하고 있나?”

오전 조가 경기하는 모습을 시청하며 필상은 모모코와 통화를 시도했다. 허투루 시간을 쓸 여유가 없지만 자신과의 통화는 안정적인 플레이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행히 모모코는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말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도리어 필상의 컨디션을 걱정하는데 좋아졌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물론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괜히 찔렸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PGA 챔피언십이 열리는 TPC Harding Park로 향해 달렸다. 400마일에 육박하는 거리지만 도로가 좋고 경관도 좋아 차로 이동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냥 백을 맬 걸 그랬나?”

“걱정 마.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뿐이니까. 그래도 단독 선두인데 걱정은 무슨!”

이동 중에도 모모코의 경기를 체크했다.

그런데 -4, -6으로 예선을 통과한 모모코는 3라운드에서 -2로 다소 부진했다. 그래도 -12로 1타 차 단독 선두를 지켰는데, 괜히 미안해진 필상은 너무 미국으로 건너온 게 찜찜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뭐가 서운한 건지 다소 퉁명스럽게 필상에게 핀잔을 줬다. 그러나 필상은 좋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말처럼 우승 전선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엄청나군요!”

TPC 하딩파크는 규모나 시설 면에서 최고였다.

고풍스러운 맛은 떨어지지만 현대 골프가 어떻게 변하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초현대식 코스라고 보는 것이 적당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시선을 빼앗기기도 잠시, 필상은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연습장으로 향했다. 이미 날이 저물고 있는데. 한시가 아까운 사람처럼 그냥 쉬질 않았다.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연습과 운동을 마친 필상이 숙소로 복귀하자 이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뜻밖의 제안을 했다.

“마사지요?”

“응. 시간 내서 제대로 배웠으니까 걱정 마.”

“아무리 그래도 대표님한테 마사지를 받는 건 좀…….”

“얼른 씻고 간편한 복장으로 내려와.”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은 께름칙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이라고 강조하며 너무도 당당히 말하자 필상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몽정이라고 우길 만한 일이 반복되었다.

이보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을 보며 짐작이 확신으로 변했다. 그녀는 다른 볼일 있다고 했는데, 밖으로 나가거나 누굴 만나지도 않았다.

필상의 연습을 그대로 따라다녔고 어김없이 저녁이 되면 마사지를 할 준비를 했다. 덕분에 필상의 컨디션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어! 임 프로.”

“일찍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그래? 잘 왔어. 자리 안 잡았으면 이리로 와.”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데뷔 첫 해에 신인상을 수상했고 지난해에는 PGA투어 첫 승을 신고한 임성재 프로였다.

98년생이니까 필상에게는 거의 조카뻘이었다. 또한 덩치는 딱 흑돈과 비슷해 뚝심이 좋은 선수로 인식되었다.

“아이언 맨이라고 불린다면서?”

“젊어서 그러죠. 하하하.”

“그 말은 내가 너무 노땅이다 이건가?”

“에이! 그럴 리가요! 가장 기량이 무르익는 시기가 프로님 나이 때라고 생각합니다. 30대 초반, 기량도 경험도 최고조에 오른 시기잖습니까.”

“아부성 발언은 그만 하고 어서 연습부터 시작해.”

“네!”

심심하지 않아 좋았다.

늘 타이거나 미켈슨이 동행했는데, 둘 다 이번 시즌은 각자의 사정 때문에 투어 출전 일정을 잡지 않았다. 시원섭섭했는데, 아주 똘망똘망한 젊은 선수가 합류해 활기가 돌았다.

“축하해!”

‘이게 다 오빠 덕분이에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늘 고마워. 나랑 함께해 줘서.”

모모코는 어렵게 우승했다.

분전했지만 경쟁자들이 무섭게 추격하는 바람에 결국 3명이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아무래도 앞선 선수가 불리한데, 모모코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 줬다.

18번 홀은 372야드 파 4홀로 티샷이 밀리면 우측의 계류에 빠지고 세컨샷은 호수를 건너야 한다. 좌측으로 휘어진 그린의 위치가 아주 애매해 스코어가 춤을 추는 홀이다.

그런데 첫 연장전은 안전한 공략으로 세컨샷 미스를 한 경쟁자 한 명을 떨어뜨렸고 두 번째는 공격적인 샷으로 버디를 잡아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여주 댁의 연승!]

기사에 이런 헤드라인이 잡힌 이유는 우승 인터뷰에서 동네 자랑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 여자가 한국으로 시집와 이웃들과도 잘 지내고 있는 풍경이 그려졌던 모양이다.

팬들은 굉장히 흡족해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포인트를 어찌 그리도 잘 알고 있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너무 힘들었는지 2주간 푹 쉬고 3주 뒤에나 투어에 나갈 거라는 말에 더 쉬어도 괜찮다고 했다. 상황이 허락되면 일본 친정에 다녀오라고도 했는데,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장인에 대한 묵은 감정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바람직하지 않다는 조언을 했다. 세월은 화살 같이 지날 거고 나이든 부모님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게 후회할 날이 오지 않게 잘하라는 말에 대답이 없었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야구 보러 가지 않을래?”

“야구요?”

“응. 자이언츠의 AT&T 파크에 다저스가 방문했거든.”

“자이언츠의 홈구장 이름이 오라클 파크로 바뀐 지가 언젠데요! 여하튼 혹시 류현진 선수가 나오나요?”

“응.”

“와우!”

“돈 주고도 못 볼 경기 티켓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가요! 당연히 가야죠! 잠실구장 가 본 지도 오래 됐는데. 지금 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경기를 본단 말이지요! 하하하.”

“근데 가려면 좀 일찍 가야 해.”

“아주 가깝다면서요?”

“응. 15분이면 가긴 가는데, 시구 연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구요?”

메이저리그 경기의 시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전에 적절한 유명인을 섭외하고 미리 홈피에 공지도 한다.

하지만 오늘 시구할 사람이 갑작스러운 사정이 생겨 불참하게 되었고 급히 대체자를 찾는 와중에, 내주에 이 지역에서 열리는 PGA 챔피언십 투어프로들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환호할 선수가 많지만 가장 먼저 필상의 매니저인 이 대표에게 연락이 왔던 것이다. 그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아는 이 대표는 곧바로 승낙해 버렸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필상을 꼬드기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필상은 열렬한 야구팬이었다.

시간과 사정이 허락되지 않아 근래에 전혀 즐기지 못할 뿐, 어릴 때부터 야구와 축구라면 환장했던 스포츠 광이었다.

‘씁쓸한 기억은 이참에 지워 버리자!’

야구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대학에 진학한 뒤로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힘들게 번 돈으로도 야구장을 찾았던 사람이 필상이고 그때마다 필상의 곁을 지킨 여자가 있었다.

평생을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던 여인에게 실연을 당한 이후로 한 번도 야구장을 간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대표에게 야구 관람을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가 바로 전 약혼녀 성희였다.

야구장의 뜨거운 열기를 함께 나누며 미친 듯이 응원하던 젊은 시절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그녀와 같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픽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연습은 조금만 해도 될 겁니다.”

“오호! 야구도 좀 했나?”

“그럼요. 우리 중학교에는 야구부가 없었지만 인근 학교 야구부 코치님이 집에까지 찾아와 필상이 야구 좀 시키면 어떻겠느냐고 권유까지 했던 몸이라니까요!”

“두고 보면 알겠지. 호호호.”

자신은 있지만 그래도 금요일 저녁 경기로 미국 전역에 중계가 되는 빅 매치다. 기왕 나갈 거면 멋진 투구를 보여 주기 위해 필상도 서둘러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려면 2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이미 오라클파크는 축제 분위기였다. 야구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메이저리그 열성팬들의 기행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예상을 뛰어넘는 열기에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유명한 브루스 보치 감독이 직접 필상을 맞이했다.

단장이 더 높은 직위라는 것은 알지만 젊은 그는 잘 알지 못했기에 보치 감독과 악수를 나누며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도리어 겸손한 반응을 보였다.

“하하하. 저야말로 영광이죠. 경기 일정이 허락되지 않아 하딩파크를 방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정말 아쉬웠는데, 이렇게 직접 미스터 퍼펙트가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보치 감독은 골프를 좋아한다고 했다.

비시즌에는 거의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낼 정도로 열심이지만 시즌에는 시간이 나지 않아 지근거리에서 투어가 열리는데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다고 말했다.

“매트. 나도 같이 가도 될까?”

“그럼요.”

보통 시구자의 투구 연습은 불펜 코치가 맡는다.

하지만 필상과 친해지고 싶었는지 보치 감독은 직접 안내와 지도를 자청했다. 단장은 그냥 졸졸 따라다닐 뿐이었다.

그런데 불펜에서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다.

몸을 푼 필상이 첫 투구를 했는데, 포수 마스크를 쓴 불펜 코치가 깜짝 놀라 피한 완전한 폭투였기 때문이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이 대표가 까르르 웃었지만 고개를 갸웃거린 보치 감독은 많이 듣던 영화 대사 같은 말을 던졌다.

“자네 혹시 야구할 생각 없나?”

“하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야구나 골프나 힘이 들어가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지. 그런데 자네 야구를 해 본 적이 있나 봐.”

“네. 어릴 때 동네에서 친구들이랑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글러브 하나만 있어도 엄청 부러워들 했지요. 하하하.”

야구를 해 봤다는 말에 큰 관심을 보이던 보치는 그게 동네 애들끼리 모여 놀았던 기억이라는 말에 껄껄 웃었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남다른 필상의 투구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냥 막 던진 포심이지만 속도는 물론 공의 회전도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 랭킹 1위인 필상이 골프를 접고 야구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그는 직접 안전하게 투구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빠앙!

서너 개를 던진 후부터는 포수 미트에 정확히 꽂혔다.

시원한 미트 소음이 지켜보는 이들의 엄지손가락을 세우게 만들었다. 필상의 유명세에 함께 따라왔던 투수 인스트럭터 한 명이 흥미로운 말을 던지기도 했다.

“85마일(시속 137km)을 찍었습니다.”

“역시 세계 최고의 장타자가 다르긴 다르군. 하하하!”

“가다듬으면 메이저리그에 도전해도 될 것 같은데요?”

“자네가 미스터 퍼펙트라면 골프 접고 야구할 것 같은가?”

“어! 그건 아니겠죠.”

“그러니까!”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이 대표의 눈빛에 존경의 빛이 담겼다. 하지만 그 말을 똑같이 들은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보다 훨씬 강한 공을 던질 자신도 있기 때문이다. 본래 운동신경이 좋기도 했지만 연습을 하던 중에 깨달았다.

자신의 초월적인 능력이 골프뿐만 아니라 다른 운동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본 스카우터들의 번거로운 접속까지 염려하는 것은 과유불급이지만 세계적인 야구 선수들의 재능과 노력을 침해하는 것이 그다지 기껍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만하면 체면은 구기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붙자 필상은 연습을 접고 구장 구경에 나섰다. 그 유명한 자이언츠 홈구장을 방문한 김에 확실한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계획은 실행될 수 없었다. 필상을 알아본 팬들이 너무 몰려들어 이동조차 쉽지 않았던 것이다.

“VIP 박스는 사양하겠습니다.”

“팬들 때문에 번거로운 일이 생길 텐데?”

“괜찮습니다. 거기서는 야구장의 열기를 제대로 느낄 수 없거든요. 하하하.”

필상은 내야에 위치한 경기를 보기 좋은 좌석을 배정받았다. 팬들과 함께 응원할 생각에 벌서 흥분되기 시작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구자로서 홈 관중석에 앉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같은 한국인 투수가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은 당연한데, 자신을 초청한 구단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식전 행사가 진행되었다. 필상이 시구자로 소개되자 경기장은 일순간 흥분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기대 이상의 열렬한 반응에 놀랐고 그라운드를 향한 팬들의 환호성이 골프 코스와는 달리 일시에 자신에게로 확 쏟아지는 것도 심장 박동 수를 급격히 오르게 만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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