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92화 (292/354)

292. 온갖 야릇한 상상

들이받으라고 물리력을 행사할 흑돈이 아니다.

외모는 제법 험상궂지만 성격도 그럴 것 같으면 애당초 그런 조언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필드의 여우들에게 홀려 자신의 경기를 풀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분명한 지침을 줬고 그걸 본인이 납득했기 때문에 차후에 같은 일로 성적에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껏 기를 살려 줬더니 샷이 춤을 췄다. 그 덕분에 필상도 모처럼 날카로운 감각이 살아났고 아주 흥미로운 연습 라운드가 되었다.

“전 샤브샤브 먹을랍니다.”

“야! 겨우 만 원 잃고 샤브샤브는 좀 너무하는 거 아냐?”

“아! 한 주에 수억 씩 버는 분이 쩨쩨하게 왜 이러십니까!”

“원래 있는 인간들이 더 하는 법이거든. 하하하.”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연습장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갑자기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것도 필상과 흑돈의 핸드폰이 동시에.

그리고 짧은 통화를 마친 두 남자는 얼른 클럽하우스로 달렸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 그 사이를 뚫는 것이 쉽지 않았으나 팬들과 부딪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뛰었다.

“왜요?”

필상과 흑돈은 클럽하우스에 마련된 임시 병동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 막 나오려던 모모코와 딱 마주쳤다.

목발을 짚은 그녀를 보자 필상은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얼른 그녀의 몸을 훑었지만 왜냐는 퉁명스런 대답만 돌아왔다.

“다쳤다면서?”

“그냥 조금 접질린 것뿐이에요. 후반에 4언더를 치고 너무 좋아서 제가 너무 촐랑거렸나 봐요.”

“어디 봐.”

필상은 다짜고짜 모모코를 번쩍 안아 들고 다시 병동 안으로 들어갔다. 필상을 발견한 의료진이 화색을 피우는 걸 보며 일단 안심은 되었다.

목발은 안전을 위한 조치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내를 침대에 조심스레 눕힌 필상은 붕대를 감고 있는 그녀의 발목에 손을 대고 상태를 확인했다.

이해하기 힘든 행동에 다들 어리둥절했지만 조용히 지켜봤다. 아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필상이 눈까지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다니까요. 선생님이 그렇게 진단하셨어요.”

“네. 그냥 근육이 좀 놀란 정도입니다.”

병동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의 의사가 다가와 설명을 보탰다. 하지만 필상의 표정은 좀처럼 밝아지지 않았다.

정확한 의학적 진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자신이 감지한 바로는 그의 말처럼 가벼운 부상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검사와 진단을 했는데 파악하지 못한 것일까?

‘이런 돌팔이 같은 놈!’

그렇게 쏴붙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모모코가 과연 이번 대회를 정상적으로 소화할 수 있을지, 그 의문에 답을 찾아야 하기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대했던 대회인데!’

KLPGA 시즌 첫 메이저 대회를 우승하면 한국 투어 적응이 완료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늘 그립다던 필상이 집에 와 있는데도 꼬박꼬박 연습에 매진했다.

의문이 든다면 전문 병원으로 이동해 정밀 검사를 받고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옳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게 되면 이 대회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치유 능력을 발휘하면 좋은데, 전문가도 아닌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빠. 저 숙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럴까?”

“네. 오빠 손은 약손이잖아요. 마사지 해 줄 거죠?”

“그럼. 당연하지.”

남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은 했지만 모모코의 의중을 필상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그녀는 필상을 믿겠다는 의미다.

결론을 내린 필상은 얼른 뒤돌아 앉더니 그녀를 향해 등을 내밀고는 자신의 등을 툭툭 쳤다. 업어 주겠다는 뜻이다.

어차피 목발을 짚을 바에는 그마저도 발목에 부담이 될 것 같아 남들의 따가운 시선 따위는 간과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상상만 해도 부끄러워할 것 같은데, 날름 필상의 등에 업힌 모모코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흐! 저 자주 아파야겠어요.”

“큰일 날 소리! 언제든 말만 하면 업어 줄 테니까 다시는 다치지나 마.”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필상의 심각한 표정을 대한 모모코는 일찌감치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는 그녀를 보며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녀는 필상보다 더 담대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남편을 믿기로 자신의 고통마저도 온전히 맡기는 그녀의 태도에 자신의 부족함을 또 한 번 절감하기도 했다.

모모코를 등에 업고 밖으로 나오자 난리가 났다. 팬들의 눈에는 모모코의 부상보다 더 관심이 가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흑돈과 미사키가 양옆에서 호위하듯 움직였고 뒤를 부지런히 따르는 서 팀장과 이 대표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표님, 어떻게 조용할 날이 없죠?”

“워낙 중요한 일정들을 소화하다 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야. 팬들의 눈에는 화려한 모습만 비치지만 사실 프로 골퍼의 삶은 혹독한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거든.”

“운동선수들의 숙명인가요?”

투어 대회는 분명 경중이 있다.

상금 액수도 다르고 대회의 위상도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만만한 대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나 모든 언론과 팬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필상이나 모모코 같은 선수는 하루만 경기력이 떨어져도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진다.

그 모든 것이 지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좋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제정신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게 프로의 세계인 것이다.

“으음…….”

필상은 부부의 침실에 아내와 둘만 함께했다.

발목에 감았던 붕대도 풀었고 옷도 최대한 간편하게 차려입은 이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거의 벌거벗은 것이 치료와 무슨 이유가 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살을 맞댄 부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기운을 그녀에게 쏟아 넣기 유용하기 때문이었다.

여러 방법을 강구하던 필상은 좀 야한 자세로 치료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치료가 시작되자 모모코가 어느 한 순간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부상 부위만 집중했으나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느낀 필상은 아내의 몸을 구석구석 주무르기 시작했다.

* * *

“프로님은요?”

“자요.”

“안 깨워도 될까요?”

“네. 코까지 고는 걸 보니까 많이 피곤했나 봐요.”

“아!”

모모코는 아직 날이 어스름할 때 일어나 지원 팀에게 연락했다. 곧 준비하고 나갈 거라는 말에 전담 캐디는 물론 서 팀장까지 호텔 로비에 대기 중이었다.

부상 회복이 궁금했던 것 같은데, 목발은커녕 붕대조차 풀어 버린 모모코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나타나자 적잖이 놀랐다.

필상의 심각했던 태도를 감안하면 과연 대회 출전을 지속할 수 있을지도 자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쳤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안색이 밝았다.

대회를 준비하고 라운드를 치르는 동안 적잖은 스트레스가 누적되었을 텐데, 그런 지친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조금 늦게 나타난 미사키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말 괜찮아요?”

“네. 어제 의사 선생님도 그랬잖아요. 그냥 근육이 조금 놀란 것뿐이라고요. 호호호.”

“근데 하루아침에 피부는 왜 이렇게 고아진 거예요?”

“어머! 제 피부는 원래 아기 같았잖아요. 우리 수미랑 저랑 어쩜 그렇게 똑같으냐는 말 자주 들어요.”

“끄응!”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농담을 진담처럼 하는 것인지 그녀의 표정만으로는 쉬이 구분하기 어려웠다.

-와아! 어제 마지막 홀에서 폴짝폴짝 뛰다가 넘어지는 걸 봤던 많은 팬들이 걱정했는데, 끄떡도 없나 봅니다.

-그러게요! 어제 후반에 기세를 끌어올리며 공동 1위로 끝내더니 오늘은 단독 선두로 치고 올라가면서 모든 갤러리들을 홀로 끌고 다니는 것 같아요.

-그럴 만한 아주 멋진 경기력이기는 합니다. 오늘 따라 하늘하늘 거리는 핑크색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와서 더 팬들의 시선을 끄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 저거 치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핫팬츠죠.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되지만 본인도 그걸 즐기는 것 같아 경기력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거 무슨 헛소리야!”

“형. 그냥 하는 말이에요. 얼른 일어나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요.”

“밥은 그냥 여기로 가져오라고 해. 난 좀 더 쉬면서 우리 마나님 경기나 좀 봐야겠다. 근데 오늘 따라 왜 저런 야한 옷을 입어 가지고.”

“으아! 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왜 저는 즐겁죠?”

“뭐라고? 넌 곱빼기 취소야!”

“치사하게!”

필상은 10시가 넘어서 겨우 일어났다.

눈치 빠른 흑돈은 깨우러 오지 않고 연습하면서 기다렸다. 하지만 어젯밤 과도하게 기력을 소모한 필상은 꼼지락거리기 싫어 흑돈을 숙소로 불러들였다.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 대표님한테 연락 좀 해.”

“뭐라고요?”

“그냥 여기로 좀 오시라고 해.”

2라운드에서 모모코는 펄펄 날았다.

-6을 몰아치면서 3타 차 단독 선두로 올라섰기 때문에 굳이 자신이 캐디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행 비행 일정을 앞당길 수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마침 그날 밤에 출발하는 LA행 비행기가 있어 필상은 곧바로 움직였다. 모모코는 꽤 아쉬워했지만 필상을 이해했다.

서둘러 미국으로 건너가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한 휴식으로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필상이 겨우 컨디션을 끌어올렸는데 자신을 치료하느라 다시 기력이 쇠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대표님도 같이 가시면 안 돼요?”

“내가 왜?”

“오빠가 지금 정상이 아니거든요.”

이것저것 짐을 챙기고 있는 필상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모모코가 이 대표에게 다가가 다소 엉뚱한 부탁을 했다.

하지만 모모코는 물론 이 대표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필상의 가라앉은 컨디션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나 봄이 도와주면 된다.

하지만 대회에 참가하는 자신은 불가했고 봄도 일본에 머물고 있어서 가능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또 한 사람이 이 대표라는 것을 서로는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망설이던 이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고 모모코는 진심으로 고맙다며 그녀와 포옹까지 나눴다. 둘이 뭔가 속닥거렸으나 그걸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다.

* * *

“서 팀장이 신났겠어요!”

“그렇지 않던데?”

“휴가가 탐탁지 않은 사람도 있나요?”

“호호호. 당신만 모르는 게 있지.”

“무슨 소리에요?”

“대체 여자를 홀리는 그 기술은 어디서 배운 거야?”

“네?”

얼핏 들으면 황당한 말이다.

여자를 홀리는 기술이라니!

그런 것이 있을 리도 없지만 평생을 함께하려고 다짐했던 여인에게 버림을 받았던 필상은 오히려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아픈 트라우마가 있다.

“남성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나?”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제가 여자를 홀린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하기야 목석이기는 하지. 내가 그렇게 들이대도…….”

말끝을 흐리는 이 대표의 표정이 어딘가 서글퍼 보였다.

비행기 좌석을 나란히 잡은 것이 괜히 부담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항공사의 협찬으로 언제나 일등석을 무료로 이용하고 있는 필상으로서는 그나마 좌석이 넓은 것이 다행이라 여겨졌다.

이코노미 클래스였다면 피부가 닿았을 게 아닌가!

‘으음……. 왜 이러지?’

묘한 생각을 해서 그런지, 아니면 기력이 쇠잔한 자신의 본능이 작용한 것인지, 곁에 앉은 이보영의 체취가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이미 그녀와의 관계는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야한 상상과 함께 말초신경이 저절로 반응하면서 기분까지 묘해졌다.

명상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깜짝 놀랄 상황이 발생했다. 이보영의 손이 자신의 손 위에 겹쳐진 것이다.

얼른 빼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왜냐면 의중도 모른 채 그냥 빼 버리면 그녀가 계면쩍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의 달콤하지만 낮은 속삭임이 귀를 간지럽혔다.

“그냥 이렇게 좀 있어.”

‘왜요?’

그렇게 되묻고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이럴 때는 그냥 자는 척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핑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의 손에서 전해져 오는 따스한 기운이 전신에 빠르게 퍼지며 느껴지는 짜릿한 열기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이건 일종의 ‘치유’라는 합리화가 빠르게 이어졌다.

이미 경험해 본 적도 있다는 자위도 했다.

자신의 뇌리에 쉴 새 없이 떠오르고 있는 온갖 야릇한 상상이 진도를 나가는 것을 그녀가 알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축 가라앉았던 전신의 감각이 날카롭게 살아나면서 삶의 의욕이 마구 솟구친다는 것이다.

그 욕구의 색깔이 좀 야하기는 하지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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