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91화 (291/354)

291. 악습(惡習)

“모모코 파이팅!”

1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오른 모모코가 샷 루틴을 밟고 있었다. 주변이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는데, 누군가 응원한답시고 크게 외치는 바람에 팬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떤 무식한 인간이 이런 짓을 하나 싶어 수만 개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꽂혔는데,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무지한 인간이 바로 필상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행동처럼 비쳤다. 하지만 그 순간 사람들의 뇌리에 떠오른 비슷한 생각이 하나 있었다.

‘가엾은 한국 남편들의 대체적인 행동 양식?’

아내를 떠받들지 않으면 시시때때로 비교 당하고 구박도 받는 아주 서글픈 신세임을 만방에 알린 것 같았다.

물론 띠 동갑인 필상이 당연히 떠받들고 살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모모코는 그런 못된 아내가 아니다.

필상이 이루고 싶은 꿈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밀어주는, 그러면서도 원만한 가족 관계를 지키는 아주 현숙한 아내다.

다만 지금은 자신이 곁에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창피함을 무릎 쓰고 존재감을 나타낸 것일 뿐.

“우후!”

샷을 멈춘 모모코가 필상을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눈이 부신지.

그러더니 한술 더 떠 눈을 찡긋 거리며 손가락 하트를 쐈다. 그녀도 팬들의 시선을 두려워 않는 용기를 보인 것이다.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지만 그건 그저 부러움의 표현일 뿐, 부부가 서로에게 애정을 드러낸 것이 무슨 흉이 되겠는가!

“이제 됐어!”

“뭐가요? 방금 민폐 끼친 거 모르세요?”

“이런 돌 헤드! 넌 내가 지금 뭘 했는지 정말 모르겠냐?”

“돌대가리가 뭡니까! 아무리 형님이라도 이건 아니잖아요.”

“이게 진짜!”

필상이 한 대 쥐어박으려는 모션을 취하자 흑돈은 재빨리 엄살을 부리며 물러섰다. 미사키의 째려봄이 작렬했지만 필상은 아랑곳할 겨를이 없었다.

모모코가 다시 샷 루틴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난 항상 당신 편이야! 누가 뭐라든!’

이게 바로 필상이 아내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눈빛만 봐도 느낄 수 있는 모모코는 그걸 알아들은 것이다. 설사 당장 골프를 그만둬도 부부의 금슬은 깨질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모모코의 티샷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쭉쭉 뻗어 나간 타구는 페어웨이에 무사히 안착했으며 비거리 또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짱짱했다.

-우와! 대체 얼마나 나간 거죠?

-286야드입니다. 401야드의 파 4홀이지만 좌측으로 휘는 도그렉 홀이라서 우측으로 보낸 공략은 아주 일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컨샷이 119야드나 남았군요.

-우측에 떨어뜨려야 세컨샷 시야가 훤하게 열리기 때문입니다. 방금 전에 공 프로가 응원한 보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여필종부(女必從夫)라고 하더니, 역시 장타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군요.

-원래 공 프로를 만나기 전에도 장타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다만 좌타 우타가 많았는데, 정확성을 겸비하게 된 것은 우리 공 프로의 탁월한 코치 때문이라고 봐야겠지요.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 절세의 장인을 만나 빛나는 보석이 된 거로군요. 하하하.

중계진도 모모코에게 상당한 호의를 보였다.

아무래도 두터운 팬덤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필상의 존재가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더한 것 같았다.

또한 일본은 미워해도 일본 여인이 한국으로 시집와 잘 살고 있는 모양새는 뭇사람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일본인들이 자국의 골프 여신을 한국인에게 빼앗겼다고 아우성을 칠 때부터 한국 남자들의 호의는 시작되었다.

왠지 일본을 크게 이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한국에 건너와 아이를 낳고 부모를 모시고 살며 출산 후에도 일본으로 가지 않고 한국 투어를 뛰는 것이 뿌듯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측면도 없지 않았다.

“어서 가서 연습하세요.”

2개 홀 연속 버디를 잡은 모모코는 이제 안심이 되었는지 일부러 필상에게 다가와 연습하러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조금만 더 보고 갈게.”

“왜요? 뭇 남자들의 시선을 받는 게 질투 나세요?”

“응. 오늘 따라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냐?”

“에이 정말! 가요 빨리!”

옷차림에 대한 잔소리까지 보태자 모모코는 얼른 가라며 밀어냈다. 필상은 안 가겠다면 버텼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팬들은 또다시 야유를 던졌다. 왜 필드에 와서 애정 행각을 벌이냐며 부러움의 질타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1타만 더 줄이면 갈게.”

“좋아요. 사이클링 버디가 뭔지 보여 주죠.”

“오케이!”

단순한 행동이지만 필상의 의도는 적중했다. 모모코가 안정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감까지 충만했기 때문이다.

10번 홀 파 4, 11번 홀 파 5에서 연속 버디 후에 만난 12번 홀이 바로 파 3홀이었다.

“167야드입니다. 우측 뒷핀이고요.”

“정확한 수치로 말을 해 줘야지.”

“아, 진짜! 보면 다 알면서 왜 자꾸 저를 고문하십니까?”

“내가 본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우측에서 5야드, 뒤에서 6야드 맞아?”

“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하지만 그린이 전체적으로 오르막이라서 넉넉하게 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그린 중앙을 보고 옅은 페이드를 걸면 딱 좋겠네.”

모모코는 필상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그대로 샷을 했다.

얼핏 봐서는 강해 보였지만 슬며시 페이드가 걸린 타구는 그린에 떨어진 뒤에도 런이 많지 않았다.

오르막이기도 하지만 스핀이 살짝 걸렸던 것이다.

167야드를 여자 선수가 7번 아이언으로 치는 것도 대단하지만 쉽지 않은 기술까지 거는 기량은 어딜 내놔도 뒤지지 않을 것 같아 필상도 이젠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런이 너무 적었던 타구는 핀에서 제법 떨어진 4.5야드 지점에 멈췄다. 오르막이지만 라이가 제법 복잡한 까다로운 퍼팅이라고 봐야 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였는지 모모코의 시선이 필상과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후 팬들은 모모코의 과감한 퍼팅을 봤다.

깃대를 꽂아 놓고 그냥 때린 이유가 있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깃대를 정통으로 맞춘 공이 그냥 홀컵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모모코! 모모코!”

12번 홀은 모모코를 연호하는 팬들로 인해 들썩였다.

얼마나 뿌듯한지 필상도 그 이름을 함께 외치며 동참했다.

하지만 감격의 순간은 거기까지.

“그만 가자!”

“퍼팅 라이. 코치해 주셨죠?”

“무슨 소리 들었어?”

“그건 아니지만 둘이 쳐다보던 시선에 스파크가 튀던데요?”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원래 그런 거야. 너랑 미사키는 그렇지 않은가 보지? 하하하!”

눈빛만으로 의사 전달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초능력이다.

물론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연인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다. 또한 필상의 특별한 능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흑돈은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만도 했다.

하지만 필상이 정말 코치를 해 줬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젠 가만히 둬도 저절로 굴러가는 내리막처럼 모모코는 한 번 잡은 기세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연습장으로 향했다.

왜 아내의 경기를 다 지켜보지 않는지 의문을 가지는 팬들도 있었지만 자신의 역할은 거기까지, 이젠 자신의 샷을 가다듬을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꽃길을 한 번 달려 볼까?”

“좋죠. 그런데 정말 그냥 가도 되겠습니까?”

“그럼! 이젠 우리 걱정할 때야.”

“컥!”

레이크우드 CC는 레이크코스 18홀과 우드코스 18홀로 구성되어 있고 대회는 우드코스에서 진행 중이다.

때문에 레이크코스는 의외로 한산했고 그 후반 9홀의 이름이 바로 꽃길이었다. 봄의 향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세팅이지만 그런 것에 눈이 돌아갈 겨를은 없을 것이다.

이미 오전 내내 스윙 점검은 충분히 했기 때문에 그걸 실전 감각으로 이어 가기 위해 9홀만 돌 생각이었다.

“타당 만. 원. 빵, 오케이?”

“그럼 핸디 주세요.”

“야! 그게 프로가 할 소리냐?”

“아무리 그래도 그냥은 못합니다. 그동안 기록한 평균 타수라는 게 있잖아요.”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다.

하지만 필상은 뜻밖에도 갑자기 정색을 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우승을 하겠다는 거지? 물론 내가 좀 친다고 하자, 네가 경쟁할 선수들이 나보다 못할 것 같아?”

“못한 건 사실이죠. 하지만 알겠습니다. 이를 악물고 칠 테니까 밥이나 사세요.”

“에라 이 시커먼 돼지야!”

알겠다며 이를 악문다는 녀석이 밥을 사라는 말은 결국 질 것이라는 전제가 내면에 깔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프로라면 그 어떤 상대도, 그 어떤 상황도 스스로 돌파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선결 조건이다. 미리 패배를 마음에 두고 어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비싸게 배워야 값어치가 높다고 하듯, 일단은 자신감을 가지고 맹렬히 도전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평소에 쓰지 않던 말투까지 끄집어내 강하게 도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충격을 받았는지 성호는 정말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필드 적응 훈련은 아주 팽팽한 불꽃이 튀었다.

실질적인 훈련이 된 것이다.

‘덩치는 산만 한 자식이 마음이 너무 여려!’

필상은 성호가 실패했던 경기를 몇 차례 점검했다.

일부러 그런 경기만 분석한 이유는 언젠가 녀석에게 한 수 지도해 주기 위함도 있지만, 좋지 못한 상황이 어떻게 닥치는지 확인하는 것도 큰 공부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필상은 자주 겪어 보지 못했던 아주 묘한 상황이 여러 번 목격되었다. 코리안 투어가 워낙 좁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선후배 사이의 묘한 심리전이 경기 중에 나타났다.

어려서부터 골프를 했던 선수들은 서로 잘 안다. 특히나 유망주였던 선수들이 밟는 코스는 거의 정해져 있다. 국가대표와 상비군에 소속되지 못한 선수가 성공한 예는 극히 드물다.

성호도 한때 그 길을 걸어왔기에 그 인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필상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다.

“형님!”

“왜?”

“샷 루틴에 들어갔는데 자꾸 움직이시면 어떡합니까?”

“어라? 어쭙잖은 자식들이 그럴 때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더니?”

“네?”

대체 무슨 말이냐며 되물었지만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그 말의 의미를 곧 알아챘기 때문이다.

“선후배 관계 중요하지. 하지만 필드에 나와서 선배 행세하는 놈들까지 인정할 필요가 있냐고!”

“그게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말도 꺼내지 못하지만 설사 꺼낸다고 해도 결국 자신이 심리전에 말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미 겪어 봤는데,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바로 이거였다.

골프를 오래 치다 보니 아주 나쁜 습성을 가진 인간들이 있다. 아마추어들 중에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짓을 한다.

예를 들어 그린에서 퍼팅을 할 때, 동반자들은 당연히 그린에서 벗어난 위치에 거하는 것이 기본 예의다. 또한 그린을 벗어났어도 선수의 주변 시야에 잡히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면 샷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피해 줘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퍼팅할 때는 가차 없이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타박을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런 위치에 서서 딴전을 부린다.

그걸 후배가 지적하면 마지못해 움직이기는 한다. 갤러리들이 지켜보기 때문에 그것마저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한다.

지금 성호가 인정한 것처럼 선배의 마음이 자꾸 신경이 쓰인다는 점이다. 정당한 요구를 했음에도 말이다.

“때로 싸워야 할 때도 있는 거야.”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잘나가는 선배한테 한 번 찍히면 돌아가면서 한 소리씩 하거든요.”

“그럼 언제까지 비굴하게 살래?”

어쩌면 그걸 비굴하다고 말하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한국 사회는, 특히나 스포츠 분야는 그런 통념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무리를 짓고 강압적인 조직을 앞세워 얻었던 결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세계가 펼쳐져 있는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그걸 극복하지 못하면 꿈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다.

그 말에 느끼는 바가 있는지 성호는 잠시 침묵했다.

“세상 이치는 그렇지가 않아! 물러서면 설수록 더 물러나라고 압박하는 게 현실이라고. 성공한 그 어느 선수가 그런 불합리한 악습에 억매이냐고!”

“일단 욕먹더라도 성공부터 하고 보란 말씀이죠?”

“그래. 일단 네가 성공하면 그때는 태도가 달라지는 거야. 굽히는 자에게는 한없이 군림하는 자들이 강자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게 세상이라고!”

가장 확실한 예가 바로 필상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데뷔했지만 데뷔와 동시에 강자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선배들도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상당 기간 탁월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면 성호가 겪은 과정을 똑같이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필상은 무난히 극복했을 테지만.

그러나 철들기 전부터 골프가 인생의 전부였고 골프로 세상을 봤던 성호에게는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조직처럼 느껴지고 연계되었다는 관념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필상이 하는 말을 새겨들은 성호의 표정이 서서히 밝아졌다. 스스로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고 확고한 결심이 선 것이다.

때문에 그 결심에 못을 박았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 그냥 눈 딱 감고 한 번 들이받아!”

“게임비는 형님이 책임져 주실 거죠?”

“그래! 그 까이 꺼!”

“하하하하! 이제 샷 해야 하니까 그만 물러서 주시죠?”

“어라? 그래 그렇게 하라고. 하하하.”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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