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모모코의 부담
“그러지 뭐. 대신 나도 연습해야 하니까 결선 이틀만, OK?”
“좋아요. 역시 우리 오빠가 최고에요.”
다행히 KLPGA 챔피언십은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레이크우드 CC에서 열린다. 이동 거리가 짧아 크게 무리가 없다는 판단하에 모모코에게 먼저 가서 코스 적응부터 하라고 권했다.
아무리 시즌 중이라도 필상은 꼭 해야 할 일을 미뤄 뒀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TPK 사업 현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업무 보고와 연습도 겸할 겸 대부도에 위치한 TPK 서해안 CC로 모든 현황을 가져오라고 전했다. 필상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 대표는 일목요연하게 모든 자료를 준비해 왔다.
그 덕분에 일은 수월했지만 컨디션을 예상대로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하는 일정은 즐거웠다.
“저도 따라가도 됩니까?”
“왜? 연습이 부족해?”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미사키랑 같이 와.”
“고맙습니다. 형님. 하하하!”
흑돈이다.
녀석은 개막전에서 톱 10에 든 뒤로 다시 해매고 있었다.
충분한 기량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실전 투어는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필상이 쉬는 동안에도 늘 기웃거렸다. 같이 연습을 하며 전체적인 스윙 점검을 받고 싶은 눈치였다.
때문에 대부도까지 쫓아와 비위를 맞추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한 번 봐줄 생각이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무슨 물과 모래가 이렇게 많아?”
레이크우드 CC를 둘러본 필상의 첫 마디다.
1972년 로열 CC라는 이름으로 개장한 이 코스는 36개 홀 중에 9개 홀은 대중제로 운영하고 있으며 역사에 어울리는 중후한 맛이 배어 있는 북부의 명문 코스 중에 하나다.
대체로 평지에 만들어진 까닭에 언듈레이션이 별로 없는 만큼 연못과 수를 셀 수 없는 벙커를 만들어 난이도를 높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좋은 스코어를 내기 힘든 코스 같습니다.”
“그렇겠네. 정확한 샷이 이기겠어.”
모모코는 전담 캐디와 함께 이미 코스 적응에 들어갔다.
필상은 없다고 생각하고 평소처럼 일정을 소화하라고 권했기 때문에 필상은 흑돈과 여유롭게 연습 라운드를 즐기는 중이었다.
통상 어디를 가건 프로들은 야디지 북부터 살피는데, 이번에는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날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코스의 장단점을 모르기 때문에 답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같은 설렘도 함께였다.
그런데 연습 부족을 실감한 하루가 되고 말았다. 흑돈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측근이지만 다른 사람이 봤다면 섬뜩했을 성적을 기록했다.
“보기를 4개나 하다니, 형님답지 않습니다.”
“나다운 게 뭔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함. 그거 오늘 어디 갔어요?”
“이겼다 이거지?”
“뭐 세계 랭킹 1위도 별거 아니네요.”
“좋아. 그럼 내일부터는 타당 만 원짜리 스트로크 플레이로 붙자고.”
“에이. 살 떨리게 왜 그러세요?”
막상 내기를 하자고 하니 흑돈은 꼬리부터 내렸다.
사실 코리안 투어는 대회가 많지 않아 늘 정상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는 성호를 이기는 것은 현재로서는 어렵다. 하지만 내기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코어 카드는요?”
“안 적었는데?”
“정말이요?”
모모코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지만 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운드를 마친 필상이 연습장에 도착하자 모모코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모양새가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저도 이상하게 스코어가 잘 나오지 않거든요.”
“아! 그랬어? 좀 까다롭기는 하더라고.”
그렇게 시치미를 뚝 뗐지만 진실은 감춰지지 않았다. 뒤늦게 나타난 흑돈이 슬그머니 손가락 2개를 세웠던 것이다.
“와아! 2언더?”
“아니요. 2오버요.”
“야! 흑돈. 내일부터 타당 만 원 콜!”
모모코도 꽤 놀란 눈치였다.
아무리 처음 가는 코스라도 그런 기록은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샷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프로가 프로답지 못한 결과를 낼 수도 있다.
필상의 스코어를 확인한 모모코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언제라도 최고의 샷만 할 것 같았던 필상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님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냥 연습에 전념하세요. 여기가 불편하면 페럼이나 서해안 CC로 가셔도 괜찮아요.”
“아니야. 그럴 거 없어. 잘 적응해서 결선 때 보여 줄 테니까 그냥 당신은 대회에만 집중해.”
“제가 괜한 투정을 부려서…….”
“괜찮다니까! 내가 너무 푹 쉬었나 봐. 하지만 내가 누구냐고! 골프 여신 모모코의 남자잖아! 하하하!”
큰소리를 떵떵거렸지만 그래서 지켜보는 이들은 더 불안했다. 세상에 다시없을 불세출의 절대자라는 찬사를 받지만 지나친 휴식은 뜻밖에도 심한 컨디션 난조로 이어졌다.
하기야 열흘 남짓한 사이에 8kg이 붙었으니 정상인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기에 차후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하루빨리 극복하는 것이 중요했다.
“형님. 좀 쉬었다 가죠.”
“너나 나나 지금은 달리기보다 좋은 운동은 없어. 포기하고 싶으면 그냥 짐 싸!”
“으흐!”
사실 흑돈도 과체중이다.
타고났다고 하지만 전지훈련 때 만들었던 몸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와중이기에 지금은 스윙보다 적절한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어딜 가나 필상을 알아보는 팬들의 시선이 뜨거웠지만 필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해야 할 일만 묵묵히 수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43회 KLPGA 챔피언십이 시작되었다.
-4월의 마지막 주에 열려서 그런지 날씨가 아주 화창합니다. 사방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들이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네. 이곳을 찾은 갤러리들을 반기는 것 같습니다. KLPGA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의 품격에 어울리는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멋진 샷도 구경하고, 아름다운 정취에 흠뻑 빠져 사진도 찍고, 봄을 한껏 즐기는 골프팬들의 모습이 소풍 나온 사람들처럼 즐거워 보여 아주 보기 좋네요.
-이번 대회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선수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 투어에서 활약하는 선수들도 대거 참여를 했습니다.
-아! 이젠 정말 한국 골프의 위상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올라왔음을 증명하는 대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기적으로 고국이 그리울 즈음이다.
외국에서 아무리 좋은 성적을 거두고 능력을 인정받아도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보다 편할 수는 없다.
또한 주최 측에서도 대회를 품격을 높이기 위해 세계 랭킹 상위권에 링크된 한국 선수들에게 출전을 적극 독려했다.
세계로 뻗어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근간이 되는 한국 투어의 활성화는 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같은 주간에 열리는 LPGA, JLPGA는 흥행이 밋밋할 가능성이 높았다. 한국 선수들이 빠진 것이 우승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미 시작했을 텐데, 정말 안 가 보실 겁니까?”
“백 나인이나 보면 되지. 군소리하지 말고 연습이나 해.”
체중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하지만 샷의 정확도는 아직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해 더 큰 집중력이 필요했다.
대회가 한창이지만 연습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몇몇 기자들이 연신 카메라를 터트렸으나 건질 것은 별로 없었다.
필상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들의 눈에는 모두 최고의 샷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사랑스런 아내가 시합 중인데 거길 가 보지 않는 것에 대한 볼멘소리도 튀어나왔다.
기자들이 대부분 남자였던 모양이다.
-날씨도 좋은데, 오늘 선수들의 스코어가 대체적으로 잘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메이저 대회에 대한 부담감이 클 것이고 실제 코스의 난이도가 높은 것도 사실 같습니다.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다 보니 한국 여자 투어는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기쁜 일인데, 그게 하필 코스의 난이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런 거죠?
-아! 좋은 질문입니다. 이건 좀 복잡한 사안이기는 한데, 현대 골프는 여러 면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일단 장비의 고도화가 이뤄지고 있으며 과학적인 훈련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선수들이 기량이 상향평준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전 홀을 모두 버디를 하거나 이글이 우르르 나오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팬들의 입장에서는 환상적인 샷이 나오면 오히려 보는 즐거움이 더 클 것 같은데, 저로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네요.
시청하는 골프팬들은 십분 동의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실제 투어프로들의 경기는 보통의 아마추어들이 즐기는 코스 세팅과는 다르다. 전장도 길고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핀의 위치를 조절하거나 엄격한 규정을 준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샷으로 타수를 팍팍 줄이는 걸 보면서 아마추어들도 그런 라운드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부푼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프로들의 경기를 보며 심한 괴리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차라리 더 좋은 기록, 더 아름다운 샷이 나올 수 있도록 불필요한 난이도 조정을 지양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우우……. 이븐파네요?”
필상은 모모코의 경기를 보러 이동했다.
이제 막 10번 홀을 마친 상태였는데, 스코어보드에 적힌 모모코의 기록은 0이었다. 모모코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그건 평소와 다른 심리상태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처음부터 경기를 따라다닌 미사키에게 확인했다.
“내용이 어때?”
“버디 1개, 보기 1개에요.”
“구체적인 스윙은 어땠지?”
“안전한 공략을 이어 오고 있어요. 사실 위험한 상황이 많았는데 리커버리를 잘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아요.”
아직 1라운드를 마친 선수가 많지 않은 상황이기에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실시간 중계를 확인한 필상의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선두가 -3이고 출전한 전체 선수들 중에 언더파를 기록한 선수는 서른 명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 -1이었다.
하지만 개막전에 우승한 뒤, 꾸준히 샷을 가다듬은 모모코가 초반에 밀릴 이유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곁에 있기 때문에 컨디션은 좋아야 한다.
실제로 스윙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왜 성적이 나오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서 팀장에게서 가장 근접한 대답이 나왔다.
“자신에게 쏠린 기대가 커서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아요.”
“그건 언제나 같았는데?”
“지금 이 홀에 얼마나 많은 팬들이 몰렸는지 좀 보세요.”
서 팀장의 말을 듣고 둘러보니 정말 많은 팬들이 홀 주변에 몰려 있었다. 첫날 15,000여 명이 입장했다는데, 그 중에 3분의 1은 다 이곳에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예쁜 미모 때문에 팬들이 많았고 시즌 10승을 거두며 골프 여신으로 추앙받던 2년 전에도 일본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다.
굳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아이를 낳은 유부녀라는 것뿐, 팬들의 시선을 오히려 즐기는 그녀가 부담을 가진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프로님이 이룬 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부담, 게다가 이젠 봄이도 추격하고 있어서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아! 봄?”
처음 만났을 때는 둘의 입장이 지금과는 천양지차였다.
필상은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뒤,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유능한 전문 캐디에 불과했다.
필상의 남다른 능력을 직감했기에 진심으로 좋아하고 응원했지만 이렇게 빨리 정상까지 치고 올라갈 줄 몰랐을 것이다.
자신은 아이를 낳기 위해 1년을 쉬고 다시 재기했지만 최고의 위상을 지닌 필상과 어울리는 위치를 찾고자 하는 바람이 강했던 것이다.
게다가 봄이 필상을 연모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남편이 자신을 배신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경쟁심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주에 봄이 먼저 시즌 2승을 수확한 것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봄이 또 우승했어?”
그 말을 뱉고는 아차 싶었다.
아무리 세상 편하게 쉬었어도 여동생이라고 말하는 봄이 대회에 출전한 것도 까맣게 몰랐던 것은 너무 심했던 것이다.
녀석이 사흘만 쉬고 일본으로 돌아간 것은 알고 있지만 모모코와 비슷한 일정을 소화할 것이라고 들었던 기억 때문에, 또 아무도 말을 해 주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들 모모코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주변 상황에 대해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봄이는 2주간 쉬고 5월 둘째 주에 열리는 월드 레이디스 챔피언십 살롱 패스 컵에 출전한다고 해요.”
“이제 완벽하게 투어에 적응을 했나 보군!”
“네. 벌써 일본 열도가 들썩일 정도로 인기 절정이에요.”
“모모코가 안달을 할 만도 하구나…….”
지난해 꼬박 1년을 쉬었지만 시즌 마지막 대회에 참가해 우승하면서 골프 여신의 인기는 여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올해 여러 복합적인 상황이 겹치면서 그녀의 인기는 사그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봄이 신데렐라처럼 등장하면서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애초에 일본 팬들의 이탈은 각오했지만 이렇게 빨리 잊히는 것에 대해 기분이 좋을 리는 없을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