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89화 (289/354)

289. 달콤한 휴식

“나이스 터치!”

“와아아! 이글이에요, 이글!”

“그럼 다시 공동 선두가 된 건가요?”

그랬다. 박채연, 조아윤 프로와 함께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승기를 잡은 모모코의 무서운 기세는 주춤한 경쟁자들을 더욱 움츠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이어진 16번 홀의 공략은 압도적이었다.

손만 뻗으면 바다가 한 손에 잡힐 듯 아름답게 펼쳐진 354야드 미들 홀이지만 오션 코스에서 2번째로 어렵게 플레이되는 이유는 우측으로 휘어진 오르막 홀이기 때문이다.

“페이드 샷?”

모모코의 드라이브 티샷은 과감했다.

하지만 티샷 IP지점 우측에 자리 잡은 널찍하고 깊은 벙커 때문에 보통 왼쪽을 공략하는데, 그녀의 샷은 벙커로 향했다.

적잖은 맞바람도 있는 상황이라서 홀의 모양을 따라 페이드 샷을 구사한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한 공략처럼 보였다.

아무리 그곳이 세컨샷 방향이 열린 좋은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긴장감이 팽배한 지금, 그런 샷을 감행하는 것은 어렵게 얻은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는 행위로 비쳤다.

실제 중계진도 비슷한 뉘앙스의 해설을 보탰는데, 결과는 모두의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들고 남을 굿 샷이었다.

“헐! 저걸 넘겼어요!”

“캐리 247야드, 맞바람까지 부는데!”

“누구 아내 아니랄까 봐! 이건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필상은 그저 씩 웃고 말았다.

모모코는 지금 자신이 가진 장점을 십분 활용해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사실 필상처럼 독보적인 장타자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보낼 수 있는 거리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을 결과로 만들어 내는 담대함은 필상도 가끔 감탄할 정도였다.

지금도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조금이라도 짧으면 버디는커녕 3온을 감수해야 하며 조금만 방향이 틀어져도 숲인데, 그녀의 강인한 멘탈이 확실하게 드러난 장면이었다.

“어허!”

보다 못한 박 프로가 모모코처럼 장타를 노렸지만 결과는 확연히 달랐다. 평소 그 정도 거리는 얼마든지 보낼 수 있는 실력이지만 연습과 실전의 차이, 배포의 한계가 드러났다.

기이하게 먹힌 타구가 나오는 바람에 벙커 뒤쪽도 아닌 초입에 굴러 들어가며 험난함을 자초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걸 지켜본 조 프로는 안전하게 잘라 갔지만 그녀의 세컨샷은 좌측으로 당겨져 파도 쉽지 않은 상황으로 변했다.

기회를 맞이한 모모코의 입술 끝에 희미한 미소가 맺히는 걸 확인한 필상은 이제 승부가 결정되었다는 직감을 했다.

그리고 맞이한 세컨샷, 보란 듯이 핀에 바짝 붙인 모모코는 마치 이 필드의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듯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미야 모모코, 롯데렌터카 여자오픈 우승! KLPGA의 판세를 뒤흔들 격렬한 지각변동을 예고하다!]

[강풍을 이겨낸 완벽한 경기력. 그 부부는 용감했다!]

[연속 홀 무보기 기록은 103홀에서 멈췄지만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모모코, 한국 여자 투어를 긴장하게 만들다]

한국 언론도 뜨거웠지만 모모코의 일본 투어 잠정 중단을 극렬히 비판하던 일본 언론들이 더 난리를 피웠다.

위대한 일본 혼의 승리라는 둥, 말도 되지 않는 찬사를 늘어놓았으며 김자영 프로가 가지고 있던 99개 홀 연속 무보기 기록을 갱신한 것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경기 후 바로 이어진 모모코의 인터뷰는 헛소리를 지껄이던 일본 전문가들의 입을 납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역시 한국 여자 골프가 한 수 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일 관계가 냉랭한 가운데서도 저를 응원해 주신 한국 팬들 여러분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합니다. 이건 절대 위정자들이 가식적으로 내세우는 그런 위선이 아니며 제가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 그리고 가족이 있는 한국은 정말 정이 많고 솔직한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어떻게 저런 예쁜 말을 할 수 있는지!

쟁쟁한 실력을 갖춘 깜찍한 일본 여자 선수의 입에서 그런 겸허한 말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별로 없었는지, 그 말이 나온 뒤로 인터뷰 분위기는 정말 화기애애했다.

그녀의 우승 소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한국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한 것을 시샘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정치적인 언급은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인터뷰를 마친 모모코와 통화한 필상은 굳이 심각한 사안을 언급할 필요가 있느냐고 지적했다. 하지만 모모코의 다부진 항변에 할 말을 잃었다.

‘그들 몇몇이 우리의 애틋한 사랑을 갈라놓기 때문이에요!’

“하하하! 사랑을 갈라놓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얼마든지 좋을 수 있는 두 나라 관계를 잘못된 이념과 조직의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 희생시키고 있잖아요. 바보같이!’

입장은 다르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인식은 다르지 않았다. 평소 말을 아끼던 그녀도 한일 관계가 날로 악화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오늘 정말 멋졌어.”

‘그럼 얼른 와서 저 좀 안아 주세요.’

“나도 당신이 그리워. 하하하!”

KLPGA가 한 수 위라고 표현은 겸허한 자세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뒤에 붙은 정치인을 빗댄 감사의 말과 긍정적인 메시지들은 있는 그대로의 의미만 담긴 것 같지 않았다.

비록 그 말을 뱉음으로서 자신을 응원하는 일본 팬들을 돌아서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지만 더 파격적인 생각도 하고 있는 그녀가 아니던가!

일본 언론들은 애써 그 내용을 다루지 않았으나 한국 언론들은 앞다퉈 크게 다뤘다. 그런 우호적인 자세를 지닌 선수를 어찌 차별할 수 있겠나.

안 그래도 국내 팬이 많은 모모코가 최고의 인기 선수 반열에 오를 뜨거운 성원을 스스로 이끌어 냈다.

* * *

인천공항은 봄을 맞이해 한국의 멋과 맛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국력 신장과 더불어 한국 문화의 우수성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이다.

필상도 한몫을 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현상이 공항을 가득 메웠다. 필상의 귀국과 때를 같이해 먼저 귀국한 봄도 대기 중이었고 남편의 금의환향을 맞이한 모모코까지 나타난 인천공항은 국빈이라도 맞이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별안간 발생할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안전요원들이 줄지어 늘어선 가운데 영화 같은 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입국장으로 들어서는 필상에게 폴짝폴짝 뛰어가 안기는 모모코, 남의 시선이 따갑지만 그리웠던 아내를 꼭 안아 주는 모습은 어느 각도로 찍어도 한 편의 화보였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공필상 프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위대한 한국인, 그대가 있어 우린 행복하다!]

[사랑해요. 마스터!]

팬들은 필상을 환영하는 플래카드나 피켓을 들고 있었다.

사실 개인적인 꿈을 이루고 있는 것뿐인데, 무슨 대단한 애국이라도 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풍경에 낯간지러웠다.

그렇다고 자신을 반기는 팬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필상은 모모코와 수줍은 듯 다가온 봄과 함께 나란히 서서 팬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셋이 나란히 인터뷰 데스크에 앉았다. 이젠 제법 익숙한 상황이라서 침착하게 분위기를 봐 가며 문답에 응했다.

“아빠!”

인터뷰 도중 큰누나 품에 안겨 있던 수미가 아빠에게 오겠다고 보채는 소리를 듣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잠시 양해를 구한 필상이 다가가자 얼른 고모 품에서 내려 아장아장 걸어오는 딸의 성장한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어린 아이의 곁을 지키지 못하는 것인지, 미안하고 또 안쓰러운 마음에 두 팔을 벌려 포근하게 안아 들었다.

거의 울 것 같던 녀석이 앙증맞은 손으로 필상의 얼굴을 만지며 비벼 대는 행동에 웃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아이는 언제 어디서건 사람의 영혼을 맑게 하는 듯.

“당분간 가족과 함께 편안한 시간을 보내야겠습니다.”

-6주간 미국에서 고생하고 대단한 결과를 만든 것은 알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팬들의 부름을 거부하시지는 않겠죠?

“일단 4주 뒤에 개최되는 PGA 챔피언십은 참가할 겁니다. 다만 1주 전에 도미할 것이고 그동안 푹 쉴 계획이니 저를 좀 어여삐 봐주셔서 찾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

-아! 목표의 수정은 전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또다시 3개의 메이저 대회를 우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는 분명합니다. 긴 비행에 지쳐 혹시라도 여러분께 실례를 범하지 않을까 우려되는 바, 오늘은 그만 놔주시죠?”

웬만한 말은 무엇이든 기사화될 수 있기에 어떻게든 많은 스토리를 듣기 원했다. 하지만 딸을 품에 안은 필상의 엄살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질문의 방향이 바뀌었다.

먼저 모모코의 우승에 대한 얘기들이 먼저 쏟아졌는데, 그녀는 이미 관련 인터뷰는 했다며 기본적인 인사로 갈음했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포문은 봄에게로 향했는데, 일본 언론과는 아주 형식적이고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했던 봄이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무빙 데이에 4오버를 치고 저는 정말 지옥 같은 하루를 보냈어요. 선생님의 전화가 자꾸 걸려 왔기 때문이죠.”

-공 프로님이 그렇게 무서운가요?

“네. 말도 마세요. 통화하기 싫어 안 받는 걸 뻔히 알면서도 무려 5번이나 전화를 하셨어요. 그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요?”

처음에는 정색한 것 같아 다들 난감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안 좋은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기삿거리가 나왔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갑자기 개구쟁이 같이 귀여운 표정에 입술까지 삐죽 내밀며 미는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국 팬들과 언론에 알려지기로는 조용한 성격이며 보이시한 매력을 지닌 봄은 무뚝뚝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한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할뿐더러 기자들의 흥미를 한껏 끌어올리는 에피소드까지 술술 풀어내면서 오늘의 주인공이 되었다.

“전 한국이 가장 좋아요.”

-일본 투어를 뛰고 있는 일본 출신 선수로서 너무 위험한 발언 아닌가요?

“좋고 나쁘고 제 의견도 말할 수 없다면 그건 건강한 사회가 아니죠. 저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지만 선생님과, 또 언니와 약속했기 때문에 더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국어를 여러분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즈음에는 저도 꼭 한국에 살고 싶어요.”

-혹시 모모코 양처럼 한국 남자와 교제하고 있는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역동적이고 치열한 한국인들의 모습이 좋고 저도 앞으로는 꼭 그렇게 살고 싶거든요.”

반복적으로 사용한 ‘꼭’이라는 표현이 듣는 이로 하여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게 했다. 물론 필상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한국과의 인연이 각별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쉽게 입에 담을 내용은 아니다. 왠지 묘한 생각이 떠오르지만 함부로 단정 짓기는 어려웠다.

프로 선수는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살기 때문이고 이미 알려진 바, 이즈카 하루는 일본의 명망 있는 가문의 영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국에서의 행동이 일본에서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었다. 한국 골프팬들에게 더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라고 해석한 이들이 많았고 그건 충분히 성취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인터뷰였다.

* * *

“얼른 일어나 뜀박질이라도 좀 해!”

“조금만 더 잘게요.”

“다들 일찍 일어나 운동하러 나갔어. 너 그러다 살만 뒤룩뒤룩 쪄서 망신당하면 어쩌려고!”

“걱정 마세요. 오늘부터는 낮에는 운동할 거니까!”

“에이! 얼른 안 일어나!”

결국 엄마는 방 안으로 진격해 필상이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확 제켰다. 귀국한 지 열흘이 넘었는데, 게으름의 표본처럼 집안에서만 뒹굴 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6주를 보내고 돌아온 뒤, 체중이 5kg이나 빠졌다는 말에 온갖 보양식을 준비하시던 모습이 이제 없었다.

과도한 영양 보충으로 이미 과거의 체중을 회복하고 오히려 포동포동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 본인도 그걸 느꼈기 때문에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침잠이 없던 필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불에서 나오길 싫어했다. 그 이유는 사실 수미가 늦잠쟁이였기 때문이다.

“아빠. 나 쉬!”

“그래. 잠깐만.”

할머니의 강요도 수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당장 운동하러 나가라고 쫓아내시던 엄마도 수미를 챙기는 필상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이미 손자 손녀는 여럿이지만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의식이 강한 엄마에게는 하나뿐인 친손녀가 공주였다. 아들과 딸을 차별하시는 분으로서 좀 의외인 모습이었다.

여하튼 11일 동안 백수처럼 한가하게 먹고 자기만 하던 필상은 서서히 페이스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건너갈 날이 어느덧 열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토납을 통해 얻는 기운은 대단히 정순하지만 대회처럼 집중력이 요구될 때, 한시적인 효과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오히려 그 여파로 인해 전혀 게으르지 않던 필상이 엄마에게 등짝을 맞을 만큼 휴식의 달콤함에 푹 빠졌다.

“웬일로 연습을 다 해요?”

“하하하. 이제 내가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하나?”

“오빠가 너무 방에서만 뒹굴 대니까 그러죠.”

“그래도 밤은 행복하잖아. 흐흐흐.”

“그건 당연한 거고 저 좀 도와줄래요?”

“뭐? 말만 해.”

“크크크……. 정말이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하느라 모모코의 부탁이 뭔지도 헤아리지 못한 채 덜컥 승낙부터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좀 애매한 내용이었다.

개막전에서 우승을 거둔 그녀는 2주를 쉬고 다음 주에 열리는 KLPGA 챔피언십에 참가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 대회에서 필상이 캐디를 봐 주길 원한 것이다.

사실 굳은 몸의 컨디션을 서서히 끌어올리고 스윙도 점검해야 하는데, 자신이 생각하던 계획과는 다른 일정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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