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88화 (288/354)

288. 천생 골퍼

‘보셨죠?’

“응.”

누구겠는가?

봄은 우승을 확정지은 후 가장 먼저 필상에게 알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샤워하고 예쁘게 단장도 하고 여유를 좀 찾은 뒤에 연락해도 늦지 않을 텐데, 뭐가 그리도 급했던 건지.

어제 심각했던 하루를 보내고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행동을 보고는 마음이 착잡했다.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지만 너무 무덤덤하게 대했던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앞섰고 다소 걱정스럽기도 했다.

‘제가 꼭 해낸다고 했죠?’

“축하해. 정말 보기 좋더라.”

‘흐흐흐…….’

봄은 마치 필상에게 보여 주려고 우승한 사람 같았다.

1년에 한 번 우승하기도 힘든 게 투어프로인데, 필상이 걸어왔던 전설의 여정을 그대로 따라올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절대 쉽지는 않은 일이나 그녀가 원하는 한, 될 것 같았다.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향한 집념과 노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봐 왔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다면 모를까, 봄은 재능 이상의 탁월한 능력을 지니지 않았던가!

‘녀석! 천생 골퍼인가?’

어려서부터 죽음과 함께 살아왔던 가여운 인생이다.

필상을 만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지만 그래도 이뤄질 수 없는 인연의 한계로 인해 피치 못한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골프를 시작하고 난 뒤에는 그 증상들이 서서히 완화되고 고통의 총량도 줄었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자신의 건강이 믿기지 않는다고 고백할 때는 필상도 가슴이 뭉클했었다.

부디 골프를 통해 자신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새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 내서 일본에 한 번 들릴게.”

‘아뇨. 저도 한국에 들어갈 거예요. 우승한 셋이 모여 파티 해야죠. 이 대표님이 근사하게 열어 준다고 하셨어요.’

“그것도 좋지. 하하하.”

아직 모모코의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봄은 추호의 의심도 없는 것 같아 괜히 부끄러웠다. 자신은 모모코의 경기를 마음 졸이며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모코는 전반을 마치며 공동 선두까지 따라붙었지만 경쟁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나 탄탄한 실력으로 무장한 무서운 신예들은 절대 안방에서 일본 선수에게 우승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비장의 승부수를 걸어왔다.

그것이 매번 통하면서 모모코의 드높은 기세에 맞불을 놨다. 다행히 팬들의 응원은 일방적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모모코를 응원하는 소리가 더 컸기에 더욱 강한 투지를 끌어올리는 것 같았다.

“바람도 센데, 어떻게 실수하는 선수가 한 명도 없죠?”

“이러다 여러 명이 같이 연장전을 치르겠어요.”

“프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조건 모모코가 이길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우승 경쟁자 4명이 모두 최선을 다한 불꽃 샷을 터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승부는 가려지게 마련이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휘몰아치기 때문에 누군가 집중력이 흩어지는 순간, 악마의 유혹처럼 위기가 찾아들 것이고 한 번 무너지면 회복하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핸디캡 1번인 15번 홀을 승부처로 봤다. 그래서 막 그 의견을 제시하려는 찰나, 엉뚱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어?”

“저 공이 왜 돌지를 않죠?”

“드로우가 제대로 걸리지 않았나?”

14번 홀은 159야드 파 3홀이다.

비교적 쉽게 플레이가 되는 홀인데, 가장 자신 있는 드로우 구질을 선택한 모모코는 과감하게 그린 우측 끝을 봤다.

자신의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좋지만 드로우가 제대로 걸리지 않은 타구는 러프에 맞고 호수로 튀어 들어갔다.

눈에 보일 리 없는 슬라이스 바람이 부린 조화였다.

그나마 맞고 들어간 러프 근처에 드롭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집중해야 하는데, 칩샷이 질기게 얽힌 러프에 걸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더블 보기를 기록하고 말았다.

“으음…….”

필상의 깊은 한숨 소리가 퍼진 뒤로, 거실의 분위기는 삼가 고요해졌다. 수다스럽던 미사키와 서 팀장도 말없이 오직 TV만 쳐다보며 와인만 홀짝홀짝 음미했다.

-15 박채연, 조아윤

-14 최해진

-13 미야 모모코, 조정인

졸지에 공동 4위로 밀렸다.

한국 투어의 강자, 최 프로도 보기를 기록하며 아쉬운 파 3홀 공략을 마쳤다. 그나마 1타 차는 괜찮아 보이지만 2타 차는 우승과는 한 발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좀처럼 타수를 줄일 수 없는 상황이기에.

“저 와인 한 병 더 가져올게요.”

“그래.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왜요?”

실망이 가득했던 미사키는 필상의 희망 어린 말에 눈을 반짝였다. 아무 근거도 없이 허튼소리를 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상도 기다려 보라는 말 이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지만 극복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은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필상의 믿음에 보답하는 샷은 15번 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와우! 나이스 샷!”

538야드의 전장을 지닌 15번 홀은 잔디가 깔린 면보다 호수의 면적이 더 넓은 홀로, 암반에 둘러싸인 해저드가 페어웨이를 둘로 갈라놓은 상당히 까다로운 레이아웃을 지녔다.

티샷 비거리 250야드를 넘길 수 있는 장타자들은 우측 페어웨이가 아닌 해저드를 바로 넘겨 2온을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맞바람과 슬라이스 바람이 혼재한 상황이기에 앞선 세 선수들은 안전하게 잘라 가는 3온 전략을 구사했다. 자칫 퐁당이라도 하면 우승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잃을 게 없는, 아니 도전적인 샷을 즐기는 모모코는 과감한 장타를 선택했다.

“쉬이익!”

바람을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가는 타구에 실린 힘은 그 모든 역경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의지가 담긴 결정체였다.

현장에 있던 갤러리들은 물론 오거스타의 한 호텔에서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와인에 취해 가던 두 여자도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며 때 아닌 굿판이라도 벌릴 기세였다.

“죽인다! 모모코!”

“만세! 모모코 만세!”

아무리 남편이라도 듣기 거북한 표현을 남발했다.

하지만 맞바람마저 이겨 낸 타구는 러프도 아닌 페어웨이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적잖은 런까지 보태 284야드를 찍었다.

실로 입이 떡 벌어질 강력한 장타 본능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나 남은 거죠?”

“221야드.”

“와! 돌아가지 않고 바로 가니까 엄청 짧게 남네요!”

“드디어 유틸리티를 잡을 때가 됐네!”

“유틸리티요? 맞바람이 꽤 있는데요?”

“18도 유틸리티 우드를 새로 장착했거든.”

“그걸로 230야드가 가능할까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가능해!”

필상은 단정적으로 못 박았다.

평소 탄탄하게 연습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 땀의 결실을 반드시 이뤄 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잘라 가는 선수들도 좀 찜찜하겠네요.”

“아니. 다시 무리수를 둔다고 생각하겠지. 사람은 극적인 상황일수록 더욱 더 자기본위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으니까!”

“그럼 보란 듯이 꼭 잘 쳐야겠네요.”

“반전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인 것은 분명하지.”

우측 페어웨이로 잘라 간 선수들도 그린을 바로 공략할 수 있다. 250야드 정도는 3번 우드로 공략할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걸 감행하는 선수는 없었다.

우측 페어웨이에서 바라본 그린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작아 보이고 호수를 무사히 건널 자신감은 만용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다들 좌측 페어웨이로 보내 서드 샷에 승부를 보는 선택을 했다. 그로 인해 이제 공은 모모코에게로 넘어왔다.

“이 샷이 승부의 열쇠가 될 것 같아요.”

“그렇겠지. 그린 좌측으로 굴려서 올리면 최상인데…….”

현재 위치는 우측 페어웨이보다는 덜 위협적이다.

하지만 호수가 그린의 절반가량을 가로막은 상태이고, 1시 방향으로 길게 누운 그린은 세로로 길면서도 폭은 좁아서 거리뿐만 아니라 정확성이 요구되는 난해한 샷이다.

자칫 해저드가 주는 부담감이 작용하는 순간, 확 당겨지는 샷이 나올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러나 필상이 언급한 대로 모모코는 18도 유틸리티를 잡고 샷 루틴에 들어갔다.

공의 후방에 선 그녀가 에임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눈빛이 촉촉하다고 느껴진 필상은 깊은 연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아이나 키우며 소박한 행복을 느끼면 좋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인 것은 안다.

모모코 역시 필상처럼 골프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며 이미 쌓아올린 적잖은 명성과 기록 때문에라도 멈출 수 없다.

설사 피치 못할 형편이 되더라도 기어코 포기하지 않는 승부 근성 또한 최고인 투어프로이며 골프 여신으로 추앙받는다.

검증된 능력과 이루 헤아리기 힘든 팬들을 확보했고 승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깊은 만족감에 매료되어 있기 때문에 골프를 떠난 삶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의 아슬아슬한 살얼음판 위에서 마음을 졸이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너무 안쓰러웠다.

깡!

“나이스 샷!”

“쭉쭉 날아가!”

필상은 이미 감이 왔다.

힘을 빼고 정확한 리듬을 유지한 그녀의 유틸리티 샷이 평소 열심히 연습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아가는 타구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왜냐면 이곳은 바람 잘 날 없는 제주도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모모코의 세컨샷은 너무 길어 그린을 바로 직격하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두 번째 바운드가 예술이었다.

그냥 그린을 오버할 것 같던 공이 그린과 에이프런의 경계에 맞으며 우측에 놓인 핀 방향으로 튀었던 것이다.

“와아아아! 굴러!”

만약 TV가 아니라 그녀의 곁에 있었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력이라도 불어넣었을 것 같은 극적인 궤도 변경이었다.

홀컵을 향해 또르르 구른 타구가 깃대를 정통으로 맞추는 찰나, 귀청을 울리는 비명이 사방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다.

실제 서 팀장과 미사키의 비명도 날카로웠지만 현장에 놓인 중계 마이크에서 들려오는 함성 또한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행운이 따랐다고 밖에는 볼 수 없지만 아쉽게도 홀컵에 빨려 들어가지는 않았다. 들어갔다면 앨버트로스였을 텐데.

그래도 이글을 노릴 수 있는 2야드 안팎이 남은 것을 확인한 필상은 우승을 향한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됐어!”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목이 마른 듯 와인을 벌컥벌컥 마셔 댄 두 여자는 그 흥분을 가라앉힐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우와! 그냥 확 들어갔어야 하는데!”

“그러니까요! 전 들어가는 줄 알았어요. 더블 이글을 기록하면 단숨에 단독 선두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기회였는데!”

“프로님이 됐다고 하시잖아. 우리 이제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와인이나 마시자고. 흐흐흐…….”

“어? 없어요. 한 병 더?”

“당연하지. 얼른 가져오라고 전화해.”

이젠 필상의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너무도 태연하게 그 비싼 와인을 주문하는 걸 보면서 말릴 수도 없었다. 그녀들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이 다 모모코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와인이 아무리 도수가 낮아도 과하게 마시면 곤란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오늘만은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은 필상의 위대한 기록을 뒷받침하느라 고생했다. 제대로 쉬지도, 놀지도 못한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정도 아량을 베푸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모모코의 환상적인 2온은 안 그래도 압박감이 심하던 경쟁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냥 좋았던 샷이었을 뿐만 아니라 행운까지 깃들었음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좋은데?”

“어떻게 좋을 수가 있지? 방금 전 모모코의 샷을 보고도!”

공동 선두 박채연의 서드 샷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필상은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너무 길어!”

“길다고요?”

필상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결과가 나왔다.

박 프로는 가장 자신 있는 거리, 90야드를 남겼다. 더 멀리 보낼 수도 있지만 최대한 핀에 붙이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거리를 남긴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놓친 것이 있었다.

모모코의 샷을 통해 확인된 뒷바람, 동반자들은 유틸리티 샷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사실은 뒤에서 부는 바람이 작용한 결과였다.

그걸 감안하지 못하고 탄도가 높은 샌드웨지 샷을 했으니 더욱 멀리 날아갈 것은 자명했다.

“뭐야? 숲에 들어간 거 아닌가요?”

“맞아요. 러프에 맞은 공이 갈대숲으로 기어들어 갔어요.”

“우후! 뒷바람이 그렇게 강했었나요?”

필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론 입가에 걸린 미소는 잘 감춰지지 않았다.

문제는 또 다른 동반자 조아윤의 샷이었다. 그녀는 모모코보다도 한 살이 어린 젊은 신예로 지난해 첫 승과 더불어 신인상을 받으며 골프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선수다.

기본기가 잘 닦인 실력도 눈에 띄지만 모모코와 비교될 만큼 늘씬한 체구와 귀여운 외모가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녀는 앞선 박 프로의 샷에 너무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정말 부드럽게 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람이 받쳐 주질 못했다.

“어? 맞바람?”

“그니까요!”

안타깝지만 그새 바람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만약 박 프로가 샷을 할 때처럼 뒤에서 부는 바람이 작용했다면 그린에 올라갔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바람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그녀가 의도한 샷보다 짧았던 것은 분명했다.

갑자기 바람이 그렇게 약해질 줄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여하튼 아주 부드러웠던 그녀의 타구는 그린 앞의 러프에 맞고 도리어 뒤로 굴러 내려왔다. 호수에 빠질 것 같았으나 그나마 질긴 풀이 공을 잡아 줘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모모코의 동반자 두 명 모두 버디는커녕 겨우 파를 잡았다. 조 프로의 파는 예상한 것이지만 가시덤불에 들어간 공을 정확히 걷어 내 핀에 붙인 박 프로의 리커버리 장면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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