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검정바지 신데렐라
“체격과 리듬이 다른데?”
“스윙 스피드는 다르겠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 같아요. 저 무미건조한 표정, 전 왜 웃음이 나오죠?”
“웃을 때가 아니라고!”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차라리 자신이 샷을 하면 편할 것 같았다.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지는 봄의 도전적인 샷을 지켜보노라니 애가 탔다.
하지만 녀석은 아주 당당히 멋진 티샷을 날렸다.
162cm에 불과한 작은 체구지만 완벽한 체중 이동과 스윙 템포는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완벽한 임팩트를 만들어 냈다.
“와아! 굿 샷!”
“얼마나 날아갈까요?”
“300야드 가까이 나가지 않을까?”
와인 때문인지 미사키와 서 팀장은 수다스러웠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모름지기 스포츠 관람은 이렇게 흥분한 팬들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재미있기 때문이다.
물론 필상은 수다에 합류할 여유가 없었다. 샷 하나하나를 모두 집중해서 살펴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좋은 샷이지만 300야드는 어림도 없다.
LPGA 상위 톱 10의 평균 기록은 277야드이고 가끔 300야드를 넘기는 장타가 나오기도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가 않다.
산악 지형이 많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세밀한 공략이 요구되는 일본 여자 투어의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는 아직 220야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과 비교해도 4, 5야드가 짧다.
“우우! 289야드? 계측기가 잘못된 거 아냐?”
“흐흐흐. 그럴 리가요. 원래 일본 선수들이 좀 짧잖아요.”
“뭐가 짧아?”
기껏 오누이처럼 희희낙락하더니 서 팀장의 말 한 마디에 분위기가 급속히 냉랭해졌다. 열렬한 지한파라서 미사키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서 팀장, 곧바로 객관적인 데이터를 들이댔다.
“작년에 JLPGA 기록이 218야드였잖아요. 게다가 상위권에 일본 선수는 거의 없어요.”
“왜 없어! 모모코도 있고 하루도 265야드나 나왔는데!”
“아! 둘 다 우리 선수네요.”
물론 더 있다.
최근 몇 년 새 젊고 체격 좋은 선수들이 등장했고 성적도 상당히 괜찮다. 하지만 관심이 적다 보니 갑자기 떠오른 선수는 역시 같은 편이었다.
그래도 억울했는지 얼른 다른 선수를 언급하려고 했으나 필상의 결정적인 한마디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올 시즌 흑돈 티샷 비거리가 꽤 늘었다면서?”
“아! 네. 이제 300야드는 기본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우승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지. 일본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근데 성호 씨가 올해 우승은 할 수 있을까요?”
본인도 한국과의 인연이 만만치 않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물론 서 팀장의 표현은 적절치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일본이 자랑하는 사무라이의 평균 신장은 140cm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믿기지 않지만 여하튼 그런 저런 이유로 ‘작다’거나 ‘짧다’는 말은 일본인들의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것이다.
필상도 굳이 그들에게 우호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일본인들과의 깊은 인연을 고려해 그 선에서 멈췄다.
다행히 남자 친구가 화제에 떠오르자 미사키의 서운함도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도 실은 이즈카 하루가 한국인의 피를 물려받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봄의 세컨샷은 216야드가 남았다.
오르막까지 감안하면 우드를 잡아도 쉽지 않을 거리인데, 3번도 아닌 5번 우드를 소환한 봄은 다시 한 번 과감한 공략을 가했다.
너무 높이 뜬 게 아닌가 싶었지만 타구는 바람을 타고 쭉쭉 뻗어 나가더니 그린 앞 러프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크게 바운드가 된 뒤에 그린에 올라섰다. 얼마나 붙을지는 모르겠으나 그 샷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줬는지 두 여자는 소리를 지르며 난리도 아니었다.
“이글은 쉽지 않겠죠?”
“반반이라고 봐.”
“7야드인데 반반이라고요?”
실제 투어프로들도 7야드 퍼팅은 성공 가능성이 실패할 확률보다 훨씬 높다. 특히나 그린이 빠르거나 경사가 심할 때는 쓰리 퍼팅도 가끔 나오기 때문에 넣기보다는 붙이는 것을 더 염두에 둔 스트로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봄은 필상에게 배웠다.
정말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무조건 넣는 것을 목표로 스트로크를 하라고 가르쳤다. 또한 그걸 누구보다 잘 이행하는 이가 바로 봄이었다.
동반자들이 3온으로 잘라 가는 동안 먼저 그린에 도착해 마크를 한 봄은 그린 주변을 크게 돌며 이글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어? 모모코가 화면에 잡혔어요. 1번 홀로 이동하나 봐요.”
“오늘 진행이 느리네.”
“비가 와서 그런 것 같아요. 제주도는 일본과 그리 멀지도 않은데 날씨는 완전 딴판이네요.”
미사키의 뜬금없는 날씨 얘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제주도와 시즈오카는 절대 날씨가 비슷할 거리가 아니다. 일본 본토와 제주도는 1000km도 넘게 떨어진 곳인데, 이역만리인 미국에 와 있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모코의 깜찍한 모습을 대한 필상은 그런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너무도 사랑스러워 가슴이 콩딱콩딱 뛰었기 때문이다.
“어쩜 저렇게 예쁘죠?”
“하하하. 미모로 등위를 매기는 건 아니니까 실력으로 말해야지.”
“그만 좀 웃으시죠! 침 흘러내리겠어요.”
농담인 줄 알면서도 필상은 입을 쓱 닦았다.
게다가 혀로 입술을 슬쩍 훔쳤는데, 그 경악할 모습에 서 팀장은 물론 미사키도 펄쩍 뛰며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둘은 아직도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부부인 것을.
한 달 하고도 달포를 못 보고 못 만져서인지 그녀를 바라보는 필상의 눈빛에는 달콤한 향기가 풀풀 날렸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미사키. 어서 내일이 오면 좋겠지?”
“우린 아직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아니긴 무슨! 결혼식 전까지는 피임이나 잘하라고.”
“에이! 진짜. 이 아저씨가!”
“서 팀장은 남자 친구 없나?”
“……있어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지금은 싱글이었다.
똑똑하고 세련된 미모지만 너무 잘나서 남자가 붙을 기회가 없나 싶기도 했다. 아니면 눈이 너무 높든지.
“내가 소개해 주려고 했더니 있다면…….”
“누구요?”
“있다면서?”
“남자 친구는 많지만 애인은 없거든요. 크흐흐.”
“알았어.”
“네? 그냥 알았다고만 하시면 어떡해요. 소개해 주셔야죠.”
“쉿!”
거짓말에 대한 응징이었지 염두에 둔 있는 사람은 없었다. 마침 봄이 이글 퍼팅 루틴에 들어섰기에 대화는 중단되었다.
“오른쪽 한 컵만 보면 될까요?”
“아니. 홀컵 우측 7cm 지점이 가장 확률이 높아.”
“아!”
홀컵의 크기는 108mm다.
동양 사상에 자주 등장하는 숫자가 서양에서 시작된 스포츠에 등장하는 것에 묘한 생각이 든다. 홀컵을 앞둔 이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백팔번뇌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여하튼 한 컵이라면 그 크기만큼 우측을 본다는 의미다.
가상의 홀컵을 확실하게 그리고 그 중앙을 향해 스트로크를 하는데, 한 컵이나 반 컵과 같은 표현은 정확하지 않아 필상은 가급적 cm 단위를 소수점 한 자리까지 사용한다.
서 팀장은 낯선 표현이지만 그게 옳다는 생각을 했다. 한 컵과 7cm의 차이는 확연하다. 3.8mm의 오차라면 들어갈 공이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됐어!”
미사키는 공이 굴러가는 것을 보고 소리쳤지만 필상은 스트로크가 끝난 순간, 이미 감이 왔다.
들어갈 것임을.
봄이 그렸던 라이를 정확히 탔지만 경사는 예측과 달리 거의 먹지 않아 홀컵 우측을 타고 휙 돌아 들어가는 장면에서 서 팀장이 비명을 질렀다.
소름이 돋았던 이유는 대충 한 컵을 봤다면 들어가지 않을 퍼팅이었기 때문이다. 미사키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던 서 팀장은 이내 정색을 해야만 했다.
필상의 시선이 KLPGA 중계방송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막 챔피언 조 선수들이 티오프를 하고 있었다.
“괜찮아. 더 좋아해도 돼.”
“흐흐. 저희가 좀 시끄러웠죠?”
“아니야. 딱 좋아. 와인이 떨어진 것 같은데, 딱 한 병만 더 할까?”
“우와! 좋지요. 사랑해요, 프로님!”
“어허! 오버는 하지 말고.”
10번 홀에서 봄은 공동 선두로 올라섰다.
경쟁자도 버디로 맞받아쳤기 때문이다. 하필 한국을 대표하는 베테랑 선수라서 봄이 아무리 격동을 시켜도 잘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했다.
“모모코가 우드를 잡았어요!”
“프로님. 374야드면 우드로 충분하지 않나요?”
둘이 느닷없이 필상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는 불안했기 때문이다. 짧지 않은 파 4홀에서 우드를 잡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 든 것이다.
편안한 봄과는 달리 함부로 말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
하지만 필상은 냉정한 분석을 내놨다.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하지만 똑똑한 선택이야.”
“다른 선수들의 드라이브 티샷이 다 시원치 않았으니까 안전하게 가는 것도 좋지 뭐.”
“하기야 알아주는 장타자잖아요.”
앞선 2명의 선수들이 모두 드라이브를 잡았지만 모모코는 3번 우드를 선택했다. 첫 홀부터 내려 잡는 것이 찜찜했지만 바람 부는 제주도 골프장은 함부로 자존심을 세울 코스가 아니다.
특히나 투어 대회가 자주 개최되는 롯데 스카이힐은 마라도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확 트인 시야로 인해 바람이 거세다.
경쟁자들이 페어웨이에 잘 보냈다면 모를까, 첫 선수가 헤비 러프에 밀렸는데도 두 번째 선수가 러프를 피하지 못했다. 바람을 참조했는데도 말이다.
드라이브를 잡지 않은 것은 분명 현명한 선택이었건만 그 선택을 바라보는 팬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까앙!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선수는 결과로 보여 주면 그만이다.
특유의 ‘쩍벌 스탠스’에서 품어져 나온 파워는 그녀의 귀여운 외모와는 한참 동떨어졌다. 그러나 모모코의 체구는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는다.
169cm에 59kg.
출산 후에 무려 12kg이 더 붙었지만 필상은 이전 체중인 52kg은 적절하지 않다고 권했다. 펄쩍 뛰며 다이어트를 고집했지만 통통한 몸이 더 사랑스럽다며 어렵게 설득했다.
그래서 적당히 합의한 체중이 59kg이었다.
그런데 필상의 조언은 그녀의 스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연성은 저하되지 않았으나 임팩트에 실리는 힘은 믿기지 않을 만큼 묵직해진 것이다.
“우후! 247야드에요!”
“다른 선수들의 드라이브보다 더 나가는 거 아닌가?”
그랬다.
지난해에는 자신의 파워에 대한 확신이 없어 이전 스윙을 고수했지만 겨울 전지훈련을 통해 힘의 균형을 맞췄다.
아이언도 전체적으로 한 클럽씩 더 나갔고 우드는 10에서 20야드 더 날아갔다. 특히나 꼭 필요한 경우, 힘을 좀 더 방출하면 LPGA 최고 장타자들과도 얼마든지 겨룰 만했다.
더 중요한 것은 페어웨이를 정확히 갈랐다는 점이다.
정확성에 기대 이상의 장타를 목격한 팬들은 응원의 함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다 둘 다 우승하는 거 아냐?”
“왜 둘이에요. 공 프로님까지 셋이죠.”
“아! 그런가?”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 필상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실제 경기 내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관전자의 심리상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은 꺼림칙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모코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129야드 남은 세컨샷을 피칭웨지로 공략해 핀에 쩍 붙이는 순간, 경기장의 분위기는 압도되었다.
[이즈카 하루 JLPGA 야마하 레이디스 오픈 우승.]
최종라운드에서 봄은 무려 9언더를 몰아치며 코스 레코드 갱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 나서야 했다.
단독 선두였던 한국 출신 베테랑 선수의 끈질긴 추격, 아니 탄탄한 방어에 끝까지 승부의 향방을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명승부가 펼쳐졌다.
더 극적인 우승이었던 이유는 연장 첫 홀에서 상대가 세컨샷을 3야드에 붙여 버디 기회를 잡았지만 봄의 타구는 경사를 타고 흘러 에이프런에 멈췄다.
무려 13야드 퍼팅을 했는데, 그게 기적처럼 꽂힌 것이다.
[신데렐라의 탄생!]
수많은 찬사가 쏟아졌지만 그 기사의 제목은 좀 심했다. 검정색 헐렁한 바람막이를 입은 신데렐라가 대체 어디 있다고!
하지만 탑 10에 6명이나 이름을 올린 한국 선수들을 제치고 역전 우승을 거뒀기 때문에 더 열광적인 칭송을 받았다.
본인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에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들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활약하는 모모코와 쌍벽을 이룰 슈퍼 루키가 탄생했다고 추켜세웠으며 둘이 함께 경쟁하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어? 어딜 저렇게 달려가는 거죠?”
우승이 확정된 뒤, 축하해 준 동료들과 인사를 마친 봄은 부리나케 움직였다. 악수라도 하고 싶어 하는 팬들을 그냥 스쳐 가는 모습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았다.
스코어 카드를 서둘러 제출한 그녀는 곧바로 선수 대기실로 사라져 카메라가 영상을 놓쳤다. 그 공간은 선수들을 위해 접근이 불허된 곳이기 때문이었다.
차마 말은 못했지만 필상도 볼일이 급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곁에 놔뒀던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