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86화 (286/354)

286. 전대미문

터너의 해설은 정확한 게 아니었다.

실제 필상은 그냥 벙커에 박히는 것을 목표로 때렸다. 에그 프라이가 되더라도 개울을 건너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설사 벙커샷이 어려워 보기를 기록해도 상관없다는 극단적인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다.

일단 낮은 탄도로 벙커까지 보낼 확신이 있었고 마침 타수의 여유도 있어 자신 있게 감행했다. 물론 벙커의 모래에 맞고 그린에 튀어 올라갈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굳이 이번 샷을 해석하자면 낮은 탄도로 인해 바람의 영향을 덜 받은 공에 가해진 힘이 생각보다 강렬했을 뿐.

“공에 주문이라도 거셨나요?”

“주문을 걸었다면 그린을 오버하지는 않았겠지.”

“그런가요? 흐흐흐.”

필상은 물론 미사키도 이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11, 12번 홀에서 타수를 잃지 않은 선수가 없었고 이번 타구는 자신의 의도보다도 훨씬 훌륭하게 날아갔기 때문이다.

2번째로 나선 마이크는 5번 아이언으로 그린 뒤의 벙커까지 보냈으나 더스틴은 또다시 필상의 샷을 따라 했다.

그런데 결과는 오묘하게 나타났다.

똑같이 친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타구는 아슬아슬하게 개울을 건너 벙커 앞의 턱을 때렸다. 그런데 그 공이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그린에 안착했던 것이다.

“우후! 나이스 샷!”

“전 물에 빠지는 줄 알았어요. 역시 힘이 좋네요.”

“그러게. 저게 물에 빠졌다면 하염없이 무너져 승부가 너무 싱거웠을 것 같은데, 그나마 다행이야.”

“아직 자만하실 타이밍은 아니지 않나요?”

“아니긴 뭘 아냐! 게임은 끝났지.”

솔직히 미사키의 생각도 같았다.

다만 너무 방심하지 말기를 바란 소망을 밝힌 것인데, 승리를 확신한 필상의 이후 공략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완벽함이 묻어났다.

러프에서 웨지가 아닌 퍼터를 잡은 필상은 절묘한 스트로크로 파를 세이브 했고, 온 그린에 성공했던 더스틴도 버디를 잡지는 못하면서 타수 차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결국 4타 차를 극복하지는 못하는군요!

-선두가 빈틈을 보여야 어떻게든 해 볼 텐데……. 미스터 퍼펙트 아닙니까! 그런 탄탄한 공략을 보며 흔들리지 않는 게 대단하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다른 선수는 몰라도 더스틴은 너무 아쉬워서 승부수를 던질 만도 한데, 그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하하하!

결국 필상과 더스틴은 마지막 홀까지 4타 차를 그대로 유지한 채 도착했다. 상당히 까다로운 홀이라서 더스틴이 버디를 잡기는 어려웠고 필상이 쿼드러플 이상을 기록해야만 우승을 넘볼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렸다.

빼곡하게 18번 홀을 메우고 있는 페트런들도 우승을 인정하는 듯, 드라이브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 오르는 필상에게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어허! 시원하게 한 방 날려 주나요?

-글쎄요. 연습 스윙을 보면 장타를 준비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지, 보여 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안전하게 갈 겁니다.

-그래도 그의 이름을 환호하는 팬들을 위해 멋진 티샷을 보여 줬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챔블리도 자신의 바람이 부질없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필상의 무시무시한 연습 스윙을 대하자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는 그 소리는 필상이 장타를 때릴 때의 전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상은 보란 듯이 파격적인 장타를 구사했다.

-저건 너무 우측 아닌가요?

-드로우 샷을 걸었을 겁니다. 좀 더 지켜보시죠!

힘차게 뻗은 타구가 우측 숲을 향하는 걸 확인한 챔블리는 자신이 너무 방정맞은 말을 뱉은 건 아닌지 후회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필상의 힘차게 뻗어 나간 타구에 실린 힘이 강력하다는 것은 알지만 방향이 너무 우측이라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하얀 구름 때문에 공의 궤적을 잃은 이들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스쳤고 마땅히 기대했던 드로우 구질이 전혀 먹지 않는 걸 걱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설마 저 숲을 완전히 넘기려는 걸까요?

-넘기려면 순수 캐리 334야드를 보내야 합니다. 미스터 퍼펙트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너무 무리수가 아닌지…….

해설가 터너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금껏 중계하며 필상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여 왔지만 이번 샷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이럴 때 애용하는 유틸리티를 선택해 3온을 해도 괜찮다. 안전하게 잘라 가도 무조건 우승하기 때문에 구태여 장타를 날릴 이유가 없다.

아무리 팬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필상이라도 모험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하지 못할 선수가 아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공이 떠난 자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필상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이 있었던 걸까?

“고! 고!”

팬들의 우레와 같은 응원 소리에 미사키의 음성도 섞여 있었다. 제발 숲을 넘어가라고 외치는 수많은 팬들, 그들은 이미 필상의 플레이에 감정이입이 끝난 듯 보였다.

그런데 언제 떨어질지 불안하던 타구는 천만다행, 나뭇가지들을 모두 뚫고 무사히 숲을 관통했다. 그 순간, 필상에게서 긴 한숨이 쏟아진 이유는 뒷바람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친 비거리가 나오고 말았다.

397야드.

물론 이 대회에서 자신이 기록했던 408야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경사로 인해 런이 많았던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런데도 거의 비슷한 비거리가 나온 것이다. 공이 무사히 페어웨이에 멈춰선 순간, 마치 우승이 결정이라도 된 것처럼 요란한 함성이 일시에 작렬했다.

“으으! 귀가 아프네요.”

“하하하! 나도 깜짝 놀랐어.”

“놀란 표정이 아닌데요?”

“지금 말고 샷을 마친 순간 짧을 줄 알았거든. 그 찰나의 순간에 반성문을 수십 장이나 썼다고. 하하하!”

더 마스터즈는 필상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이와 비등한 명문 코스 여러 곳에서 경기를 해 봤지만 이번 대회는 더 각별했다. 아직 자신의 기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보긴 뭘 봐?”

“아! 하기야 이젠 볼 것도 없네요.”

“그러니까!”

11번 홀 전까지는 동반자들의 샷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회 우승은 상대적인 결과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 것에 신경 쓰기보다는 400야드를 보내고도 171야드가 남은 세컨샷에 집중할 때였다.

비교적 긴 전장이라서 웬만한 선수들은 2온을 노리지 않지만 충분한 거리를 확보한 필상은 8번 아이언으로 가볍게 그린에 올렸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2퍼팅, -16으로 그린재킷의 주인공이 되었다. PGA 통산 10번째 우승이자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필드의 절대자. 다시 한 번 위용을 드러내다!]

[역대 이보다 멋진 우승은 없었다. 5타 차의 완벽함으로 이룬 그랜드슬램! 그의 골프는 예술이며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서사 드라마였다.]

[PGA 투어 데뷔 3년차, 단 12번 출전한 끝에 10번을 우승한 전대미문의 위대한 전설!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기대한다!]

[또 한 명의 골프 마스터 탄생! 4개 대회 연속 우승! 그의 전설은 아직 진행형이다.]

[그린재킷이 어울린 남자, 공필상! 동양인 최초 마스터 등극.]

[자신이 왜 필드의 절대자라고 불리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 한 판, 그 무대는 오거스타 내셔널이었다.]

시상식이 끝나기도 전에 유수의 언론들은 필상의 우승 관련 소식을 속보로 내보냈다. 곧바로 다큐처럼 상세한 내용까지 쏟아 낸 기사들을 보면 미리 우승을 예측이라도 한 것 같았다.

경쟁자였던 더스틴, 마이크, 스피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직접 그린에 대기하다가 필상의 우승을 축하했다.

후반 내내 담담했지만 우승이 확정된 순간, 현실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격한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침착하게 동료들의 축하에 감사를 표한 필상은 미사키를 불러 나란히 선채 박수가 끊이지 않는 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우승 인터뷰의 분위기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그린재킷이 무척 어울립니다, 마스터.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소감부터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느낄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을 부정하거나 폄하할 수 없는 확실한 위업을 달성했음을.

편견과 차별로부터 탈출한 것이다.

때문에 이전의 불편했던 감정을 푸는 것이 우선이었다.

“저를 아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 모로 부족하고 성격 또한 모난 제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의 격려와 조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겸손한 자세로 더 열심히 골프에 정진하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하하하!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한다면 모든 투어 대회를 다 휩쓸겠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럴 능력이나 주제가 되지 않음은 저 스스로 잘 압니다. 오늘 하늘이 도와 우승했지만 사실 저는 지금 그냥 집에 돌아가 푹 쉬고 싶을 뿐입니다.”

다행히 피곤을 호소한 필상에게 짓궂은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이미 밝혔던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에 대한 포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는데, 같은 말을 반복했음에도 부정적인 반박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골프인의 한 사람으로서 응원하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 적잖은 감동을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4개의 대회를 모두 거머쥔 것만으로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찬사를 보탠 이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버거운 일을 해냈다.

평생 투어를 뛰어도 메이저 대회 하나도 우승하지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들이 숱한데, 하늘이 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6주 동안 미국에 머물며 4개 대회에 출전해 모두 우승했다.

아무리 타고난 체력을 지녔어도 토납을 통한 충전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대단한 일을 해냈다.

그러나 지친 몸은 회복시킬 수 있지만 정신적 피로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나마 연승하며 스스로 크게 만족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짐을 쌌을 것이다.

위업을 이룬 필상을 초청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필상은 모두 고사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 새벽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은 꼭 지켜봐야 할 대회가 곧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둘이 같은 시간대라서 아예 호텔에 부탁해 TV를 임시로 한 대 더 설치했어요.”

“오호! 나이스 잡!”

서 팀장은 조용히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다.

우승 인터뷰를 준비하고 사회까지 보느라 정신이 없었을 텐데, 필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자축 파티 하자.”

“파티요?”

“응. 경기를 봐야 하니까 복잡한 건 어려울 거고. 좋은 와인하고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면 되잖아.”

“우와! 좋죠.”

그렇게 서 팀장, 미사키와 함께 조촐하게 우승을 자축하며 한국과 일본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회를 시청했다.

이미 두 여인에게서 우승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반가운 마음에 영상 통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자제했다.

챔피언 조에서 우승 경쟁을 하게 될 선수에게 지나친 감정 표출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서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는 봄이 먼저 시작했다.

3라운드까지 -7, -7, +4를 기록한 그녀는 합계 -10로 공동 3위로 출발했다. 폭삭 망한 3라운드지만 그나마 후반에 성적이 좋아 백 카운트 방식으로 챔피언 조에 들어간 것이 과연 봄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두고 볼 문제였다.

“2타 차라면 차분하게 경기하다가 적절한 기회를 노리면 충분할 것 같아요.”

“서 팀장. 봄의 성격을 잘 모르는구나!”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 아닌가요?”

“하하하. 평소 말수가 적고 조용하다고 다 차분한 건 아냐. 두고 보라고. 분명 초반부터 아주 공격적으로 나갈 거니까!”

필상은 자신 있게 말했다.

겉모습은 차가운 겨울을 연상시키지만 그녀의 성정은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활화산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봄의 초반 공략은 전혀 공격적이지 않았다. 마치 어제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사람처럼 안전한 공략을 고수했다.

“거봐요. 제 말이 맞죠?”

“저 녀석. 그동안 많이 컸네.”

불같은 성정을 억누를 수 있는 현명함을 지녔음이 확인된 것이다. 그저 기특한 마음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지만 와인의 힘을 빌린 것인지, 서 팀장이 엉뚱한 말을 던졌다.

“엄연한 성인 여자에게 녀석이라는 표현은 좀 그러네요! 더욱이 프로님을 연모하는 해바라기인데, 말이라도 좀 따뜻하게 해 주세요.”

“연모?”

다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은 사실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날 정도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서 팀장은 물론 미사키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도 긍정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둘의 관계는 정확히 정리된 상태였기에.

“퍼팅이 원래 저렇게 좋았나요?”

“퍼팅은 좋고 나쁘고를 따질 대상이 아니야. 우승을 하려면 당연히 잘해야 하는 거지. 언제 어느 상황이든 집중력이 필요할 뿐!”

안전한 공략을 이어가면서도 서서히 타수를 줄여 나갔다.

그 근간은 역시 퍼팅이었는데, 같이 시청하고 있는 서 팀장이나 미사키도 놀랄 정도로 굉장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 덕분에 프론트 나인이 끝나자 공동 2위가 되었고 선두와 1타 차까지 따라 붙었다. 일본 중계진들이 침을 튀겨 가며 봄의 플레이를 극찬하는 이유는 경쟁자들이 한국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번 파 5에서 승부수를 던지는구나!”

“승부수요?”

필상의 말을 듣고 자세히 확인했더니, 봄의 드라이브 티샷 연습 스윙은 평소와 달리 굉장히 힘이 넘쳤다.

예상대로 승부수를 띄울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런데 봄의 스윙을 보고 있노라니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숙한 느낌이 왔다.

그게 뭔지 깨닫기도 전에 미사키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더도 말고 딱 필상의 루틴과 스윙이 고스란히 묻어난 것이다.

그런데 썩 바람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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