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신의 걸작
클럽을 넘겨받은 미사키는 클럽 페이스가 움푹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얼마나 강한 압력이 작용했으면 이럴 수 있을까?
안 그래도 필상의 전용 클럽은 제조사 장인들의 꼼꼼한 확인을 거쳐 전달되고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교체도 한다.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새로 받은 그 클럽은 이제 겨우 그립감이 올라왔는데,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제 역할을 다한 것 같아요.”
“그런가?”
“기념으로 남겨 두게 이거 저 주세요.”
“그러든지. 하하하!”
다시 그 클럽을 써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상에게는 아직 22도 유틸리티가 남아 있었다. 충분치는 않겠지만 클럽 페이스를 조절하면 얼마든지 비슷한 결과는 낼 수 있기에 아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상황이 이어졌다. 2번째 타자로 나선 더스틴이 필상처럼 유틸리티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얼핏 확인한 그의 클럽 로프트는 16도였다. 탄도가 낮은 샷을 구사하기에 더 좋은 조건인 것이다.
필상의 공략법이 지금으로서는 최상의 선택이라는 것을 그도 인정한 셈이다. 그러나 필상의 장타를 흉내 내려고 너무 힘이 들어간 탓일까?
-우우우! 저 샷은 대체 뭐죠?
강력한 스윙이 이뤄졌다.
적어도 300야드 이상은 보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 같은데, 그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장타자지만 그는 유틸리티로 단 한 번도 300야드 이상의 샷을 연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골프가 장타자에게 유리한 게임인 것은 맞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은 장타는 또박또박 끊어 가는 선수에게 덜미를 잡히는 것도 사실이다.
필상이 보여 줬기에 본인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틀리지 않았지만 너무 과도하게 빨랐던 스윙은 악성 훅이 나고 말았다.
“어어! 바람도 드로우로 부는데!”
장타를 원했던 그의 타구는 거리도 손해를 봤다. 너무 좌측으로 급격히 휘면서 나무숲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이크의 샷이 남았기에 당장 달려가 확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앞선 스피스보다 더 깊이 들어갔기에 공을 찾는다고 해도 레이 업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언플레이어블을 선언하고 드롭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듯.
그러나 방금 전에 스피스의 망하는 장면을 봤기에 그의 머리는 지금 지옥을 오가고 있을 것 같았다.
-조던 스피스가 이번 퍼팅을 넣을 가능성은 낮겠죠?
-네. 거리도 만만치 않지만 라이가 너무 까다롭습니다. 무리수를 두다가 그냥 흘러 버리면 스리 퍼팅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차라리 차분하게 붙인다는 느낌으로 스트로크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그린 주변에서 미스터 퍼펙트의 티샷이 기가 막힌 자리에 온 것을 봤으니 참 암담하겠군요!
사실이 그러했다.
팽팽한 승부가 이어지리라 봤지만 가장 압박감을 느낄 필상은 안전한 공략에 성공했는데, 경쟁자들이 저 홀로 무너지고 있었다.
연못에 빠뜨린 뒤에 30야드 칩샷을 핀에 붙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도 지금이라도 마음을 다잡아야 하건만 스피스는 모험을 선택했다.
“어우! 홀컵에 맞고도 저렇게 흐르다니!”
“바람이 내리막 방향으로 불기 때문에 무조건 핀 가까이에 붙였어야지. 까딱하면 에바를 하겠어.”
그 와중에 숲에 들어간 더스틴이 공을 찾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공간이 없는데, 그 역시 모험을 선택했다.
1타 앞서고 있는 필상의 티샷이 좋았기 때문에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공을 드롭 한 스피스가 무너지는 것을 봤으니 더더욱 레이 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린에서는 스피스가 해매고 있었고 숲에 들어간 더스틴은 피칭웨지를 들고 빽빽한 나뭇가지를 뚫어 페어웨이로 타구를 꺼낼 궁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두 경쟁자가 함께 11번 홀에서 웃지 못할 광경을 연출하는 동안, 필상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렸다.
‘결국 해내는 건가?’
아직 감회를 논하기에는 이르지만 이렇게 다들 무너진다면 우승을 놓칠 이유가 없었다. 필요한 다양한 공략을 염두에 뒀지만 굳이 그런 것을 꺼낼 이유조차 없어진 것이다.
그냥 안전하게 파만 하겠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환경이 좋지 못하더라도 파 세이브를 못할 홀은 없다고 자신하기 때문이다.
연이어 깊은 탄식이 들려왔다.
먼저 터진 탄식은 그린 주변이었는데, 홀컵을 맞고 흐른 2야드 퍼팅을 그린의 제왕이라는 스피스가 넣지 못한 것이다.
쿼드러플 보기. 졸지에 -9로 내려가 필상과 6타 차로 벌어진 그는 이제 우승에 대한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따닥!
더스틴의 레이 업이 연이어 나무에 맞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정통으로 맞았다면 그런 소리가 날 리가 없다. 피하고자 했던 나무의 옆구리를 때린 공이 반대편에 있던 나무에 다시 맞고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완벽하게 숲을 벗어나지는 못했어도 보다 페어웨이로 가까이 오기는 했으나 눈을 뜬 필상의 시선에 잡힌 공은 하필 나무 뒤에 박혀 있었다.
“드롭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아니. 뒤로 쳐내면 되지. 러프에 드롭을 하느니 거리가 멀어도 페어웨이가 샷을 하기 더 나을 거야.”
더스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한참 고민한 뒤에 퍼터를 들고 나무 옆에 나란히 섰다. 퍼터의 세로 면으로 공을 때려 꺼내려는 시도였다.
다행히 정통으로 맞은 공은 페어웨이로 튀어 나왔지만 걱정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그린까지 남은 거리가 265야드 정도이기 때문이다.
유틸리티와 롱 아이언을 만지작대던 그가 잡은 클럽은 의외로 7번 아이언이었다. 핀을 공략하지 않고 그린 가까이로 보내 다음 샷을 위한 최적의 지점을 선택한 것이다.
4번째 샷으로도 그린에 올리지 못하는 그 안타까움을 꾹 눌러 참은 것이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72야드 남았어요.”
“7번 아이언.”
“7번이요?”
“걱정 마. 짧게 잡고 낮게 깔 거니까!”
“차라리 짧은 게 낫다는 건가요?”
“응. 그린 앞에 떨어뜨려 올라가면 좋고 아니면 그냥 칩샷을 하기 좋은 지점에 멈춰도 좋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숏 아이언 로프트대로 공이 뜨면 바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위험 요소를 제거한 샷을 감행했다.
공이 뜨지 않도록 7번 아이언으로 펀치 샷을 가볍게 날리는 광경에 페트런들은 그저 편하게 웃을 뿐이었다.
-역시 미스터 퍼펙트!
-이로써 우승의 8부 능선을 넘은 것 같습니다.
-어? 저 공이 그린에 올라가는군요?
그냥 방향만 맞춰 정확하게 보내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꾸역꾸역 그린에 기어 올라간 공이 또 다시 슬금슬금 굴러 홀컵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지켜보는 팬들의 눈에는 그마저도 필상의 탁월한 감각이라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더스틴의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 듯, 그나마 입술까지 지그시 깨문 그가 5번째 칩샷에 강한 스핀을 먹여 핀에 쩍 붙일 때는 필상도 박수를 보냈다.
-여기서 버디를 잡는다면 그냥 끝장이 날 텐데요!
-하하하! 방금 전에 스피스의 퍼팅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그의 성격상 그냥 붙일 거라고 봅니다.
-그런가요?
실제 필상의 5야드 퍼팅은 붙이려는 의도가 강했다.
홀컵을 지나치지 않는 짧은 퍼팅은 아마추어들도 꺼리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공은 슬금슬금 멈추지 않고 구르더니 그냥 홀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정말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함성이 터졌다. 가슴 졸이며 미스 샷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는 플레이만 보던 팬들의 응어리를 한 방에 날려 준 환상적인 퍼팅이었다.
“씨이! 정말 멋진 터치였어요!”
“씨이?”
“감탄사에요. 감탄사!”
“너무 잘 굴러. 난 그냥 탭인 할 거리에 붙이려고 했거든.”
“에이……. 안 속아요.”
“속긴 뭘 속아! 정말이라니까!”
더 이상 분위기가 좋을 수 없었다.
더 마스터즈의 최종 라운드 분위기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그도 그럴 것이 리더 보드에 적힌 숫자는 필상도 믿기 어려울 만큼 심한 변화가 생겼다.
-16 공필상
-12 더스틴 존슨
-9 조던 스피스, 마이크 위어 외 2명
두 자리 언더는 오로지 필상과 더스틴뿐이었고 그나마 2위와 4타 차로 벌어졌다. 아멘 코스의 남은 두 홀만 무난히 지나면 필상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많을 것 같지만 지금까지 4대 메이저 대회를 모두 석권한 선수는 단 5명뿐이다. 진 사라젠, 벤 호건, 게리 플레이어, 잭 니클라우스, 타이거 우즈.
시즌 최다승 기록인 18승과 11경기 연속 우승을 거둔 바이런 넬슨, 82승으로 PGA통산 최다승 기록을 보유한 샘 스니드 같은 위대한 전설들도 마지막 단추를 끼우지 못했다.
측근인 필 미켈슨, 이 대회의 강한 경쟁자였던 조던 스피스도 각각 US오픈과 PGA 챔피언십을 우승하지 못해 미완의 상태다. 그런데 PGA의 신인 축에 속한 필상이 그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역시 바람이 지랄 맞군!’
12번 홀에 도착한 필상은 클럽은 놔둔 채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가 조용히 눈을 감고 섰다. 아직 앞선 조가 그린 플레이를 하고 있던 터라 시간은 넉넉했다.
사람들은 우승을 눈앞에 둔 필상이 기도라도 올리는 줄 알지만 사실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초감각을 쓰지 않아도 보통 사람보다 민감한 필상은 이 홀에 불고 있는 바람을 최대한 온몸으로 느끼며 쉴 새 없이 치미는 감동을 억제하려 노력했다.
다행이라면 지나치게 신중한 퍼팅을 하는 앞 조 선수들이 시간을 넉넉하게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린이 비는 것을 확인한 필상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미사키는 바짝 긴장했다.
“왜 그래?”
“네? 왜요?”
“혹시 화장실 가고 싶은 거 참고 있는 거야?”
무슨 말인지 대뜸 알아차리지 못했던 미사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들릴 만큼 긴장한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고 많은 표현 중에 하필 화장실이라니!
그냥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한술 더 떴다.
“그래요. 지릴 만큼 긴장했어요. 어제처럼 칠까 봐.”
“윽!”
“뭘 드릴까요?”
“6번 아이언.”
156야드 파 3홀이다.
평상시라면 9번 아이언이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강한 맞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미사키는 필상이 원하는 클럽을 곧바로 건네줬다.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그 작위적인 표정을 대한 필상은 쓴웃음이 터졌다. 나름 캐디로서 제 역할을 다하려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떠올랐다.
지금 자신의 경기를 보고 있을 소중한 사람들이.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차분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모코와 수미, 그리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헌신한 가족들, 그들이 갑자기 그리워진 것이다.
“타지 생활에 지쳤나? 얼른 끝내고 집에 가자!”
그 말은 티잉 그라운드로 올라서며 독백처럼 뱉은 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독한 다짐이기도 했다.
어제 트리플 보기를 기록했던 12번 홀은 오늘도 여러 선수를 지옥으로 안내했다. 버디는 단 하나가 나왔고 파보다 보기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많았다.
평균 타수 기록을 갱신했다는데 무려 4.12가 나왔다. 쉬운 파 4홀보다 더 나쁜 스코어가 잡힌 것이다.
물론 상세한 데이터를 알 수 없었지만 필상은 이 홀에 남은 강렬한 여운을 느끼며 신중하게 샷 루틴을 밟아 나갔다.
그리고 모두가 깜짝 놀랄 기이한 샷을 선보였다.
“인 더 홀!”
파 3홀에서 누군가 티샷을 하면 자연스럽게 터지는 멘트다.
일종의 립 서비스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면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라도 홀인원이 나올 확률은 아마추어가 우승하는 것보다도 낮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번 샷에 더욱 강렬한 외침이 터진 이유는 그 결과에 따라 우승자가 가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중계하던 ESPN 캐스터도 갑자기 터진 자신의 반응에 스스로 놀랄 정도로 타구의 궤적이 너무 위험해 보였다.
-어!
-으음!
-저게 넘어가나요?
대답은 필요 없었다.
그 결과가 더 빨리 나왔기 때문이다.
저탄도의 샷을 구사한 필상의 타구는 개울에 처박힐 것처럼 낮게 깔렸다. 일부 팬들은 탑핑이 난 게 아닌지 염려했다.
하지만 바람도 거의 타지 않은 공이 개울을 무사히 넘었고 그냥 그대로 그린 앞 벙커에 처박혔다.
아니, 처박히는 줄 알았다.
너무도 강하게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푹 박힐 줄 알았던 공이 느닷없이 튀어 올라 그린에 나타났다. 보고 믿기지 않는 엄청난 힘이었는데, 아쉽게도 그린을 훌쩍 오버하고 말았다.
-서!
-허허허! 말을 잘 듣는군요. 저 공이.
-휴우! 다행히 뒷벙커에 빠지지는 않았고 러프에 섰습니다.
-아무도 실행한 적이 없는 창조적인 샷이 등장했군요.
-지금 저 샷이 미스터 퍼펙트가 의도한 것이란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혹자는 터무니없는 시도였다고 할지 모르나 저렇게 낮은 탄도를 구사하고도 개울을 넘길 수 있는 힘을 갖췄다는 것이 그저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고의적으로 벙커를 맞춰 튀어 오르게 했다고요?
-네. 저는 확신합니다. 애초에 6번 아이언을 선택할 때부터 이런 샷을 염두에 뒀던 겁니다. 바람에 농락당하지 않으려는 깊은 사색이 만들어 낸 신의 걸작이라고 봐야죠!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