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연못의 악령
-불운이 행운으로 바뀌었다고 봐야겠군요?
-챔블리, 운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위기를 극복한 인간 승리라고 해석해야죠. 그 이유는 함께 경기하고 있는 선수들의 세컨샷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골프는 상대성이 존재하는 운동인 것 같습니다. 만약 미스터 퍼펙트가 좋은 샷을 하지 못했다면 다른 선수들의 샷 결과도 달라졌겠죠?
-글쎄요. 그건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8번 홀이 아니라 이번 홀에서부터 본격적인 승부가 이어질 것 같다는 겁니다.
터너는 프랭크의 예측이 벗어난 것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그 발언의 근거는 충분했지만 결과가 다르게 나왔기 때문에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자신이 이긴 것처럼 느껴졌다.
핀에 붙이지 못한 마이크 위어는 보기로 홀 아웃을 했으나 더스틴은 거의 홀컵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정확한 로브 샷으로 파 세이브를 해냈다.
필상의 환상적인 플레이에 세컨샷은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샷 감각이 아직은 쌩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샷이었다. 그래서 필상도 버디로 맞받아칠 필요성이 더욱 강해졌다.
모든 신경을 퍼팅에 집중시킨 필상은 결국 전반에 가장 어렵다는 홀에서 첫 버디를 낚아 내는 쾌거를 이뤄 냈다.
챔피언 조에서의 첫 버디였다.
-미스터 퍼펙트가 결국 동타를 만들었네요. 언제 봐도 정말 대단한 기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저는 미스터 퍼펙트라는 별명보다 ‘필드의 절대자’라는 호칭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실력 이상의 뭔가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 경쟁자들을 질리게 만드는 강인한 정신력을 느낄 때면 모골이 송연하곤 합니다.
-절대 평범하지 않은 비범함!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그걸 매번 돌파해 내는 것을 보십시오. 다시 또 이런 선수가 나올 수 있을까 상상해 보곤 합니다.
-지금까지 성취한 것도 대단한데, 아직 그는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죠. 이젠 매 대회마다 전설을 써 내려 가고 있는 셈이니까요!
다른 홀의 경기 장면이 화면에 떴지만 중계진은 보충 설명을 할 생각도 없는지 계속 필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말을 하면 할수록 필상이 세운 기록들이 대단하다는 사실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직 저평가를 받고 있으며 사실조차 호도하는 이들이 핵심 세력으로 똬리를 틀고 투어를 주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아직 공동 선두이며 남은 홀이 많지만 필상이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할 것이라는 심정적 확신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동타가 되자 경기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했다. 안전하게 가는 자가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사자들은 의외로 공격 모드로 돌입했다.
“7번 아이언.”
“그냥 핀을 보시게요?”
“응. 감이 좋아.”
6번 홀은 180야드 파 3홀이었다.
뒷바람이 불어 그린을 오버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걸 의식해 짧게 칠 수도 없다. 그린 앞을 가로 막은 벙커가 크기도 하지만 상당히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은 과감한 샷을 했고 뜻밖에도 홀컵 3야드 지점에 붙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더스틴도 비슷한 거리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퍼팅 싸움이 되었는데 둘 다 버디를 잡지는 못했다.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그린이 너무 딱딱한 것 같아요.”
“응. 그걸 감안했는데도 기네.”
“그러니까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들 타수를 줄이는 데 곤란을 겪는 와중에 리더 보드에 특이한 변화가 관측되었다. 다른 선수들은 하나같이 나락에 빠졌는데, 앞 조에서 플레이하던 조던 스피스가 2타를 줄이며 1타 차 단독 3위로 바짝 추격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가 예상했던 8번 홀에서 필상의 멋진 샷이 다시 한 번 터졌다. 티샷은 안전하게 329야드를 보냈지만 남은 거리 244야드를 유틸리티로 그린에 올려 이글 기회를 잡았다.
-티샷은 가볍게 보내고 세컨샷을 저렇게 먼저 붙여 버리면 뒤에 치는 선수들은 갑갑하겠네요.
-그렇습니다. 더스틴으로서는 반드시 올려야 하는 부담이 생긴 거죠. 하지만 228야드라면 아이언으로도 공략이 가능하기 때문에 굉장히 집중할 겁니다.
실제 신중한 스윙을 감행한 더스틴의 샷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린 앞에 떨어진 공이 그린에 올라탄 뒤, 하염없이 구르더니 그만 그린을 오버하고 말았다.
러프였지만 그래도 그의 오늘 샷 감각이라면 충분히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봤는데, 뜻밖에도 결과는 최악이었다.
-뒤땅? 투어프로가, 세계적인 선수인 더스틴 존슨이 저런 터무니없는 어프로치를 할 때도 있군요?
-놀랍지만 전혀 없는 일은 아닙니다. 긴장이 고조되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몸이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지금부터는 누가 더 스스로 자신을 잘 통제하느냐가 관건이 될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일단 필드의 절대자가 유리한 고지에 선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상황이 빚어진 것이 오로지 벙커샷 하나 때문이라는 건데, 참 골프가 오묘한 종목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결국 더스틴은 3온 2퍼팅으로 어렵게 파를 지켜 냈다.
이글을 잡는다면 단숨에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나 침착하게 라이를 살핀 결과, 필상은 안전하게 핀에 붙여 버디를 낚는 데 만족했다.
옆 라이에 내리막이 살짝 있는데 행여 바람이 심술이라도 부리면 그나마 얻은 소중한 기회를 날릴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일단 단독 선두로 나섰다는 것이 중요했다.
“왜 이글을 노리지 않으셨어요?”
“효과는 이미 충분히 봤거든!”
이러쿵저러쿵 상세한 설명을 생략한 필상의 시선은 앞서 걷는 더스틴의 뒤통수에 닿아 있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필상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김이 펄펄 끓어오르는 있다는 것을.
그러나 9, 10번 홀에서 더스틴은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밝히자면 아너로 나선 필상의 세컨샷이 좋지 못했다.
무리하지 않고 안전하게 잘라 왔으나 가장 난해한 지점에 꽂아 놓은 핀 때문에 어렵게 얻은 승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린 중앙을 보고 안전하게 공략하면 뒤쳐진 그가 공격적인 샷을 감행할 것이라고 봤는데, 그는 침착하게 필상의 샷을 참조한 후에 조금 더 붙이는 노련함을 보였다.
“뒤를 졸졸 쫓아오더니 별수는 없네요.”
필상은 드라이브를 잡지 않고 3번 유틸리티로 짧게 공략했다. 세컨샷도 안전하게 가면서 상대의 무리수를 기대했는데, 그가 앞선 필상의 샷을 주의 깊게 바라본 뒤에 조금 더 정교한 샷을 하는 걸 보며 미사키는 약이 좀 올랐던 것 같다.
하지만 필상은 그의 공략을 보며 감탄했다. 그러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래서 경험이라는 게 중요한 거야.”
“그래도 좀 얍삽한 것 같아요.”
“하하하! 그건 얍삽한 게 아니고 영리한 거지. 웬만하면 상대의 의도를 알면서도 넘어가는데, 그는 절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겠다는 거니까.”
-결국 아멘 코스에서 결판이 나나요?
-그럴 것 같습니다. 오늘 아멘 코스 3개 홀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가 1오버였습니다.
-네?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선수들인데 그게 말이 되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왜 이 코스에 접어들면 절로 아멘 소리가 나오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준 하루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고! 스피스가 또다시 아멘 코스의 덫에 걸리나요?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앞선 조의 상황이 화면에 떴다. 그런데 조던 스피스가 페어웨이 좌측 숲에서 해매는 모습이 잡혔던 것이다.
11번 홀 티 박스에 도착한 필상을 비롯한 챔피언 조 일행도 그 상황을 생생히 목도할 수 있었다.
“어? 스피스가 무너지나 봐요.”
“그러게. 강한 바람이 왼쪽으로 부는가 보군.”
“제 아무리 퍼트의 제왕이라도 그린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리면 아무 소용이 없죠. 흐흐흐…….”
스피스는 한때 타이거 우즈의 뒤를 이을 최고의 지존이 될 것이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선수다.
특히 2015년 더 마스터즈, US 오픈, 투어챔피언십을 포함해 PGA 5승을 거둘 당시의 스피스 나이는 21살에 불과했다.
실로 무서울 것이 하나 없는 눈부신 기량이었는데, 2016년 더 마스터즈의 최종 라운드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그때 맛이 갔죠?”
“아니야. 그 해에도 2승, 2017년에도 3승을 했으니까 그게 결정적인 사건은 아니었다고 봐야지.”
“아! 그랬나요?”
오거스타에 와서 그를 만나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사건은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22살의 그가 이 대회 최연소 2연패를 앞둔 최종 라운드에서 일어났다.
최종일 단독 선두로 출발한 그는 6번에서 9번 홀까지 4개 홀 연속 버디를 잡으며 5타 차 선두로 백 나인에 들어섰다.
가장 뛰어난 선수로 인정받던 터라 우승을 의심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12번 홀에서 악몽 같은 쿼드러플 보기를 기록하며 대니 윌릿이 그린재킷을 입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5타 차 단독 선두였다가 3타 차 2위로 경기를 마쳤으니 무려 후반에만 8타가 뒤집어졌다는 것인데, 그런 일이 언제든 펼쳐지는 코스가 바로 여기, 오거스타내셔널이었다.
“공을 찾아 레이 업을 하는 게 최선이겠죠?”
“그렇지. 저 왼쪽에 드롭하면 세컨샷 위치로는 최악이니까.”
공만 있다면 일단 페어웨이로 쳐 내서 그린이 열린 방향을 선점해야 한다. 하지만 규정 시간 안에 찾지 못해 해저드 처리하고 드롭 할 경우, 그린을 공략하기 너무 까다로웠다.
시간을 좀 더 준 것 같은데도 그는 공을 찾는 데 실패했다. 분명 들어간 지점을 확인했음에도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멀리서도 새 공을 드롭 하는 그의 표정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며 오늘은 이 홀에서 무너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아멘 코스가 사람을 얼마나 질리게 만드는지 지켜봤다.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지 않았을까?
-조던 스피스. 정말 안타깝습니다! 경쟁자들이 모두 아멘 코스를 앞둔 상황이라서 무난하게만 지나면 얼마든지 우승이 가능했는데, 드라이브를 잡은 것부터가 실수였나요?
-거리 욕심을 낸 것이 문제로 보입니다. 이 홀에서 파를 잡는 방법은 다양한데, 이전까지 큰 실수가 없었던 좋은 기억에 사로잡혀 쉽게 2온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너무 안일한 판단입니다.
-바람이 심상치 않아 다들 고생했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런데도 탄도가 높은 샷을 구사한 것부터 무리수였군요. 하기야 이렇게 참혹한 결과를 낼 줄 알았다면 절대 드라이브를 잡지는 않았겠지요.
스피스가 3번째 샷을 그린에 올리기 위해서는 여러 난관을 넘어야 한다. 그린의 거의 3분의 2를 가리고 있는 연못을 넘겨야 하며 그렇다고 한껏 세게 칠 수도 없다.
거센 바람 때문에 딱딱하게 굳은 그린은 공을 쉽게 받아 주지 않고 뒤로 넘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물은 넘겨야 했기에 강하게 쳤다. 하지만 스피스의 서드 샷은 엉뚱하게도 잔디를 너무 깊이 파고 말았다.
티 박스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디봇이 훨훨 날아가는 것을 확인한 순간, 연못의 악령이 그를 나락으로 끌어들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퐁당!
“5번째 샷도 잘 붙일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게.”
그 대답을 던지는 필상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애당초 우승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은 샷을 해야지, 경쟁자가 무너지기를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너인 필상은 19도 유틸리티를 소환한 채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섰다. 드라이브를 잡고 멋진 장타를 선보인 적도 있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무려 505야드 파4 홀에서 우드도 아닌 유틸리티를 들고 나선 필상의 선택에 구름처럼 몰린 패트런들의 탄성이 터졌다.
아무도 예측하기 힘든 클럽 선택이었다.
터무니없는 만용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지만 유틸리티로 이 엄청난 거리에 도전하는 필상의 창조적인 샷에 대한 기대가 한껏 부푼 팬들이 더욱 많았다.
깡!
유틸리티 특유의 청량한 소음이 12번 홀을 감싸는 순간, 구경하던 이들은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소리만 들어도 굉장히 좋은 임팩트가 이뤄졌음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탄도는 낮았다.
하지만 쭉쭉 뻗어 나간 타구는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중력의 법칙마저도 무시한 강한 힘을 머금은 타구는 창촐 간에 200야드를 넘었고 그때서야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와! 캐리가 대체 얼마나 나온 겁니까?
-269야드! 지금 사용한 클럽이 19도 유틸리티라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저런 힘을 과연 클럽이 버틸 수가 있기는 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시청자들은 순간 착각했다.
269라는 수치가 최종 비거리라고 해도 놀라운데, 그 지점에 떨어진 타구가 하염없이 구르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필상은 티샷 랜딩 지역이 내리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런이 많이 발생하면 얼마든지 300야드는 가능하리라고 봤다.
그런데 그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깎아내린 생각이었다.
“320야드는 족히 나간 것 같아요.”
“그러게.”
사실 티잉 그라운드에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320야드가 아니라 330야드에 육박하는 거리가 나왔다는 것을 확인한 필상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가능성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이 샷을 했던 유틸리티의 상태를 확인했다. 한계를 넘어선 클럽이 과연 온전하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거 쓸 수가 없을 것 같아.”
“왜요?”
“이거 봐!”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