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라스트 라운드
-아! 바람이 말썽이군요! 거의 모든 선수들이 바람 때문에 골탕을 먹고 있습니다. 그린 위에서도 바람을 신경 써야 할 정도라니, 믿기지 않습니다!
-앞서서 출발한 선수들이 줄줄이 타수를 잃는 가운데 과연 챔피언 조 선수들의 경기력은 어떨지, 사뭇 궁금합니다.
-우리 공 프로는 정확한 샷, 안전한 샷에 일가견이 있지 않나요? 허 해설위원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물론 PGA 현역 투어 프로 중에 공 프로의 샷이 가장 안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스터 퍼펙트’ 아닙니까!
-그렇죠?
많은 팬들이 인정하는 바였고 실제 본인도 그렇게 믿지만 다시금 묻는 이유는 걸리는 것이 몇 가지 있어서였다.
일단 오거스타는 신인에게 너그러운 코스가 아니라는 것, 또한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필상이 불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라운드에서 투어 데뷔 이후 처음으로 트리플 보기를 기록하다 보니 무슨 일이든 나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대부분의 홀들이 타구가 높이 뜨면 영락없이 바람의 영향을 받아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기 일쑤였고 특히나 아멘 코스를 지나온 선수들 중에 온전한 선수가 거의 없었다.
“이제 그만 가야 할 것 같아요.”
“응. 그러지.”
필상은 어젯밤 깊은 명상으로 최고의 컨디션을 끌어올렸다. 그 어떤 대비보다 든든했지만 성실하게 모든 샷을 점검했다.
퍼팅 그린에서 최종 점검까지 마칠 무렵, 티오프 시간이 다가왔다는 미사키의 권유가 있었고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1번 홀로 이동하는 챔피언 조 선수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지만 인산인해를 이룬 페트런 때문에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수월치 않은 이동을 해야만 했다.
오늘 하루만 2만여 명을 수용했다는데, 그 절반은 챔피언 조를 따라다닐 요량인 것 같았다. 너무 사람이 많아 진행요원들이 애를 먹었지만 예의를 벗어난 행동을 하는 팬은 없었다.
현장 상황은 아무래도 주 방송사인 ESPN이 가장 정확히 확인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중계를 보는 이들이 많았다.
-드디어 챔피언 조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단독 선두 더스틴 존슨, 커리어그랜드슬램에 도전하는 미스터 콩, 그리고 18년 만에 다시 우승을 노리는 마이크 위어. 누가 하나 만만한 선수가 없군요.
-프랭크.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둘이 아닌 셋이 중계방송을 진행 중이었다.
캐스터는 변함없이 챔블리였지만 새로운 해설자 터너 말고도 이전 해설자인 프랭크가 특별 게스트로 함께 나왔다.
그런데 제 버릇 남 주지 않는 듯, 프랭크는 여전히 필상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단지 서로 비등하다고 말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필상의 닉네임이 ‘미스터 퍼펙트’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고 팬들은 최근 ‘필드의 절대자’라는 칭호를 애용하는데, 그는 발음도 틀린 미스터 콩이라고 지칭했던 것이다.
-여기는 오거스타입니다. 단 한 번도 동양인에게 그린재킷을 허용한 적이 없는 더 마스터즈의 성지!
본인도 왜 챔블리가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고 있는 듯, 필상을 꼭 집어 우승 가능성이 낮다는 언급을 했다.
동양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마치 이방인 취급을 하는 것은 인종차별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아예 작정하고 나온 사람 같았다.
물론 그를 추종하는 팬들도 있다. 극렬한 백인 우월주의자들, 그리고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국수주의적인 자들.
하지만 그런 차별을 뛰어넘어 한 명의 위대한 골퍼로 인정하는 팬들도 많은데,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싸울 수는 없어 말문이 열리지 않았는데, 터너가 새로운 관점을 언급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통계를 기반으로 말씀하신다면 부정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미스터 퍼펙트가 달성한 8번의 PGA 우승 중에 통계에 맞는 게 어디 있기는 했나요?
-하하하. 그렇죠?
할 말을 잃은 프랭크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챔블리는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애초에 필상이 처음 PGA에 출전할 때부터 시작해 PGA 챔피언십, US 오픈을 연이어 우승할 때도 필상에 대한 평가는 늘 박하기만 했다.
통계는 아예 꺼낼 필요도 없다는 듯, 근거 없는 편견과 차별적인 평가를 아무렇지 않게 내놓았다.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음에도 뱉었던 말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한 이도 없었다.
하지만 필상의 멋진 플레이에 반한 팬들은 서서히 늘어났고 아직은 조용히 응원하는 편이었다. 없는 건 분명 아닌데, 목소리를 내지 않아 티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마이크.”
“나이를 속일 수는 없잖은가! 그런데 자네는 하나도 피곤해 보이지 않는군. 뭔가 특별한 비결이 있다면 내게도 좀 귀띔해 주게.”
“하하하! 착하게 살아서 그런가 봅니다.”
“착하게? 으하하하! 자네가 내 긴장을 다 풀어 주는군!”
농담이라는 걸 그도 모르지 않을 것이나 괜히 찔릴지도 모른다. 심리전이라는 것이 본시 상대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러나 한바탕 크게 웃으며 넘기는 마이크를 보며 역시 매운 생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마 한 번 겪어 봤던 터라 그 어떤 말을 해도 서로 마음에 담아 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 필상이나.
“반갑습니다. 두 분!”
“아! 더스틴. 여기서 또 만났군요.”
“어서 오게. 더스틴.”
둘이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생경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동반자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더스틴은 가볍게 인사만 나누고 등을 돌렸다.
다 같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던 마이크나 그다지 그런 의도까지는 없었던 필상도 괜히 계면쩍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 싱긋 웃어 보인 필상은 우리도 경기를 준비하자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미사키에게 말을 걸었다.
뻘쭘한 마이크의 콧등에 주름이 잡힌 걸 보면 오늘은 그의 노련함도 그다지 빛을 발할 것 같지는 않았다.
-터너. 다들 너무 안전한 공략만 하는 것 같은데, 왜죠?
-부담이 되는 겁니다. 앞서 나간 선수들이 다들 타수를 잃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테니 함부로 나설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1, 2위는 1타 차지만 마이크는 선두와 3타 차가 나는데, 저렇게 한가한 경기 운영을 해도 되는 건가요?
-누군가 먼저 나서다 무너지기를 기대하는 거죠. 그로서는 무리수를 두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슬픈 현실인 겁니다.
터너의 해설은 틀리지 않았다.
더스틴은 어떨지 몰라도 필상은 프론트 나인에서 무리수를 둘 생각이 없었다. 혹시 더스틴이 먼저 나서더라도 그 결과를 지켜본 뒤에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냥 1타 차만 유지한 채 쫓아가도 자신보다 더스틴이 더 압박감을 느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프랭크. 언제까지 이런 양상이 계속될까요?
-7번 홀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어차피 파만 기록해도 경쟁자들이 계속 추락하고 있으니 답답할 게 없는 거죠.
-그렇다면 굳이 7번 홀까지라고 지목한 이유는 뭡니까?
-어차피 두 선수의 우승 경쟁은 불가피합니다. 1타 앞선 더스틴이나 뒤지고 있는 미스터 콩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아멘 코스에 다다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장타자인 두 선수는 572야드 파 5홀에서 첫 승부를 붙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겁니다.
-아! 상당히 일리 있는 말씀이시네요!
셋이 나란히 파를 기록하며 안전한 공략에 몰두했다.
바람도 거센데 핀의 위치마저 까다로워 핀을 향해 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필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5, 6야드 버디 퍼팅을 남겼으나 과감한 스트로크는 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줄줄 흐르는 그린 스피드인데, 바람까지 방해하기 때문에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그렇게 프랭크의 말처럼 계속 파 행진만 할 것 같더니, 먼저 삐끗한 선수가 나타났다. 더스틴이 먼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마이크가 먼저 실수를 했다.
파 3인 4번 홀에서 티샷이 벙커에 빠졌는데, 한 번에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보기를 했고 다음 홀에서는 필상에게 위기가 먼저 찾아왔다.
“우후! 저게 벙커로 다시 기어 들어가네?”
“맞바람이 있었나 봐요.”
495야드 미들홀인 네 번째 홀은 늘 핸디캡 상위에 랭크되는 홀이다. 프론트 나인 중에 가장 난해한 홀이기도 하다.
260야드 지점부터 페어웨이 좌측으로 2개의 벙커가 연이어 있는데, 뒤에 있는 벙커를 넘기기 위한 캐리는 310야드였다.
크게 부담이 없는 거리라서 클럽을 짧게 잡고 탄도가 낮은 드라이브 티샷을 구사했는데, 이놈의 공이 두 번째 벙커에 곧바로 떨어져 튀어나오지 못했다.
정상적인 힘이라면 튀어나왔어야 하건만 툭 튀어나온 턱에 맞는 바람에 다시 기어 들어가고 말았다.
-저렇게 낮은 궤적에도 맞바람이 작용하는군요!
-행운이 따라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필 턱에 맞고 다시 떨어지다니요! 왠지 불길하죠?
프랭크는 이번에도 필상 팬들의 염장을 지르는 발언을 여과 없이 던졌다. 한국에서 한국어 중계를 보는 팬들은 알 수 없지만 중립적인 팬들의 눈살도 찌푸리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저열한 표현이었다.
챔블리도 당황스러워 대꾸를 못했으나 터너는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자리를 꿰찬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도를 넘는 중계가 결국 골프 투어를 싸구려로 만드는 원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프랭크. 골프는 단체 운동이 아닙니다.
-뭐라고요?
-팀플레이가 필요한 운동도 아니고 국가를 대표해 출전한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홀로 전장에서 싸우는 투사란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미스터 퍼펙트를 험담하는 거죠?
-제가 언제 험담을 했단 말입니까!
-불길하다니요?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선수에게 그게 할 말입니까? 투어를 뛰어 본 프로 선수 출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요!
마땅히 따질 수 있는 내용이지만 지금은 미국 전역에 방송되고 있는 생중계라는 것이 문제였다.
실제 어느 한 선수에 대한 의견이 나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싸우듯이 따질 게재는 아닌 것이다. 깜짝 놀란 PD가 서둘러 그만두라는 손짓을 했지만 이미 터진 봇물이었다.
-천하에 다시없을 실력을 갖췄어도 행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설사 세계 랭킹 1위라도 말입니다.
-미스터 퍼펙트가 최고의 실력을 갖췄다는 것은 인정하니 다행입니다. 더 이상의 논쟁은 시청자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 같아 그만하겠지만 전문가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어허! 제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겁니까?
-편견과 차별적인 발언은 선수 개인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팬들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제가 언제 팬들을 무시했단 말입니까?
-해설자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팬들의 이해를 돕고 경기 중인 선수가 처한 상황을 시청자들에게 보다 정확히 알려 주는 것이 본분입니다. 주술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주술사가 아니라는 말에 프랭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담당 PD가 황급히 부스 안으로 들어와 그의 어깨를 잡아 밖으로 끌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카메라에 잡히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골프 중계 해설자로 활약했고 그 기억들을 아쉬워하는 것 같아 특별히 게스트로 초청했는데, 이런 사달을 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의를 제기해 다툼을 시작한 사람은 터너지만 누가 봐도 과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프랭크다. 이미 전력이 있어 경고 차원에서 경질된 것인데, 달라지기는커녕 더 심해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실직 원인이 필상에게 있는 듯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는데, 그건 최근 PGA 추세와 동떨어진 방향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임?]
[이거 쇼지? ㅋㅋㅋ. 재밌다]
[프랭크. 이제 점술원 차리면 되겠네! ㅎㅎㅎ]
[제발! 골프에 집중하게 해 주삼…….]
아무리 화면에 잡히지 않았어도 티가 나지 않을 리 없다. 중계진의 험악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방송을 탄 사고였다.
눈치를 챈 시청자들이 댓글 창에 눈부신 반응을 보였다. 싸움 구경보다 재미있는 것은 없다는 듯, 열띤 반응들이 쏟아졌지만 그게 단숨에 끊기는 놀라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필상이 194야드나 남은 그 어려운 벙커샷을 그린에 올렸을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핀에 붙여 버렸기 때문이다.
-우후! 나이스 샷!
-멋진 샷이었습니다. 위기는 사람을 위축시킵니다. 더 큰 위기가 찾아올까 봐 불안에 휩싸이죠. 하지만 지금처럼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면 상황은 반전이 됩니다.
-아! 오히려 경쟁자들의 기선을 제압할 수도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동반 플레이어들의 표정을 좀 보십시오. 티를 내지는 않지만 속이 편할 리 만무할 겁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다시 좋은 샷으로 대응한다면 승부는 정말 한 편의 드라마가 되는 거겠죠.
날씨가 좋지 못해 도전적인 샷을 감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벙커에 빠진 공에 실망해 주저한다면 오늘 승부는 어려울 것이라고 필상은 판단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핀을 노렸는데, 운이 따랐다.
“정말, 정말 아름다운 샷이었어요!”
“나?”
“어떻게 그 와중에도 그런 기가 막힌 샷을 할 수가 있죠?”
“사실은 미스 샷이야. 너무 강하게 치려다 살짝 밀렸는데, 바람이 왼쪽으로 부는 바람에……. 하하하!”
진실이었으나 미사키는 믿지 않았다.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진담처럼 던지는 것을 여러 번 겪어 봤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홀딱 속아 바보가 된 기억이 너무 생생해 더 이상 대꾸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불길하다고 표현했던 상황이 필상에게 행운으로 되돌아왔다. 마이크와 더스틴, 둘 다 세컨샷을 그린에 올리지 못하고 좌측으로 밀려 버리는 샷이 나온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