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82화 (282/354)

282. 닮은꼴

3라운드는 확실히 바람이 많아졌다.

약간의 차이지만 곤란을 겪은 선수는 많았고 필상은 그 와중에도 차분하게 4타를 줄이며 우승에 대한 각오를 다졌다.

대다수의 경쟁자들이 주춤한 사이, 1타 차 단독 선두는 필상의 등장 전까지 투어에서 가장 멀리 치기로 유명한 선수였다.

-14 더스틴 존슨

-13 공필상

-11 마이크 위어, 제이슨 데이, 브룩스 코엡카, 조던 스피스

-10 리키 파울러 외 3명

1타 차 단독 2위.

첫날 필상에게 큰 가르침을 줬던 마이크 위어는 1언더로 다소 주춤했지만 더스틴 존슨은 필상처럼 4언더를 기록했다.

“무서운 게 없는 경기 내용이군!”

경쟁자의 경기 영상을 확인한 필상이 던진 말이다.

더스틴은 바람에 맞서 두려움이 없는 호전적인 경기를 펼쳤다. 그로 인해 더블 보기 하나와 보기도 하나 적어 냈지만 이글 하나와 버디를 5개나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에 비해 안전한 공략을 이어 간 필상의 경기를 비교한 전문가들은 기이하게도 더스틴에게 후한 점수를 부여했다.

필상의 자평과는 사뭇 달랐는데, 아무래도 필상의 뜨거운 기세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공격적인 전략이 이틀 연속 통할 거라고 생각지 않아.’

“대비를 아주 철저히 한 것 같았습니다.”

‘만약 나에게 베팅하라면 난 자네에게 한 표를 던질 걸세. 너무 고리타분한 자들이야. 그렇게 겪어 보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거지!’

타이거는 전문가들의 고집스러운 자세를 질타했다.

그리고 더스틴보다는 우승 경험이 있는 마이크 위어와 조던 스피스를 조심하라는 의견을 보탰다. 조던은 한 조가 아니라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두 장타자와 함께 경기할 마이크의 노련함을 경계하라는 의미다.

하지만 필상의 생각은 달랐다. 대회 내내 무난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노장의 투혼이라는 찬사를 이끌어 냈지만 이미 그가 가진 장점이 뭔지를 파악하고 있는 필상은 나름의 노하우를 이미 체득했기 때문이다.

필상의 평이했던 셋째 날과는 달리 한국과 일본의 여자 투어에서는 모두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이즈카 하루. 폭망의 무빙 데이! 과연 우승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폭망이라는 자극적인 표현까지 등장했겠는가!

무려 6타 차 단독 선두였는데, 우승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 기사까지 먼저 뜬 걸 보고 필상은 그녀의 소식부터 확인했다.

버디 3개, 보기 3개를 기록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12번 홀에서 무려 쿼드러플 보기를 기록한 장면은 상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364야드의 전장을 지닌 핸디캡 1번 홀로 평균 타수가 무려 4.48이 나올 만큼 난이도가 높은 홀이다. 페어웨이 좌측을 따라 그린까지 길게 이어진 호수가 위협적이며 페어웨이 중간을 가로지르는 개울 때문에 장타를 칠 이유도 없는 홀이다.

“설마 저 크릭을 가로지르려고 한 건가?”

봄의 호전적인 성향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순수 캐리만 260야드를 넘기는 티샷은 여자 프로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원하는 만큼 정확한 샷이 터진다면 그녀는 물론 모모코도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샷 감각이 좋지 않다면 안전한 공략이 제격이다. 그러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이날은 필상의 조언도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크릭을 넘겨도 온 그린이 되는 것은 아니라서 안전하게 개울 앞까지 보내고 세컨샷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그게 너무도 당연한 상황이건만 봄은 모험을 감행했다.

이전 홀까지 이븐파로 부진했던 경기였기에 이 티샷을 통해 반전의 계기로 삼으려고 한 것 같았다.

성공해도 크게 남을 게 없는 도박인데…….

“풀 훅 샷이군!”

봄의 티샷 스윙을 몇 번이나 돌려본 필상은 문제점을 찾아냈다. 힘을 뺀 것은 좋은데, 드로우 샷을 해야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감아 친 것이 문제였다.

애초에 왼쪽으로 출발한 타구가 드로우까지 먹었으니 좌측을 타고 흐르는 연못에 빠지는 악몽을 피할 수는 없었다.

공이 굴러 들어간 것도 아니고 아예 호수 깊숙한 지점에 퐁당 빠지는 장면은 사람들을 경악케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너무 당겨진 탓에 드롭 위치도 좋지 못했다.

제법 긴 러프에 드롭한 공은 다시 207야드의 먼 거리를 남겼다. 그린을 노리기에는 벅찬 상황이지만 캐디의 조언도 무시한 봄은 골프백에서 본인이 직접 5번 유틸리티를 들고 나섰다.

“이런 바보 같으니!”

물론 필상이라면 질긴 러프를 이길 힘을 가지고 있다.

봄도 남다른 파워를 갖췄지만 그래도 온 그린을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분명한데, 용맹함을 넘어선 무모함이 그녀를 잠식한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지나친 만용이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린 주변에 지저분하게 깔린 작은 가드 벙커가 무려 5개나 포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상이라도 재고했을 샷이었건만, 봄이 너무도 당당하게 나서는 바람에 그녀를 좋아하는 열성팬들의 얼굴에는 은근한 기대가 맺힌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과감한 샷은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테이크백을 할 때부터 잡풀에 걸쳐 헤드가 움찔했다면 일단 루틴을 풀고 다시 시도해야 옳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결국 질긴 러프가 정상적인 임팩트를 방해했고 탑핑이 된 타구는 원하는 거리는커녕 데굴데굴 굴러 페어웨이 중앙을 가로지르는 개울에 빠지고 말았다.

“세컨샷 지점에서 다섯 번째 샷을 하는군!”

“하루가 너무 안쓰러워요.”

뒤늦게 합류한 미사키는 이미 끝난 동영상을 돌려보는 것을 알면서도 두 손을 마주잡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냥 처음부터 안전하게 잘라 왔다면 비슷한 위치에서 버디를 노리기 위한 최적의 샷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 공을 2개나 잃어버린 봄은 그녀답지 않게 표정의 변화까지 읽혔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폼에서도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을 참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난 표전이 귀엽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라도 핀에 붙이면 더블 보기로 막을 수도 있는데, 이번 샷은 필상을 분노케 했다. 106야드가 남아 갭 웨지를 잡았는데, 본인이 선택한 클럽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샷을 했기 때문이다.

“저걸 저렇게 퍼 올리다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휘두른 타구가 엄청난 높이로 치솟은 걸 느낀 봄도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들고 있던 웨지를 떨어뜨린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팬들의 우려 섞인 탄식이 주변을 옥죄는 가운데 터무니없이 높이 치솟은 타구는 피할 수 없는 비거리의 손실을 봐야만 했다.

5번째 샷마저 벙커에 들어간 장면은 어린 루키인 그녀에게 너무 혹독한 결과로 비쳤다. 그러나 본인이 자초한 일, 스스로 푸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이 엄혹한 상황에서 침착해야 할 봄의 아주 고약한 습관이 나왔다. 온갖 정성을 들여도 시원찮을 벙커샷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연습 스윙 한 번 없이 그냥 쳐 냈다.

“와아! 기가 막힌 샷이 나왔어요!”

“기가 막힌 샷이라고? 난 너무 어이가 없어 화가 나는데?”

“결과가 좋잖아요!”

“결과가 좋다고? 소 뒷발에 쥐를 잡아 놓고 그걸 지금 칭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색한 필상의 반응에 미사키도 움찔했다.

무성의한 샷이 그린에 척 올라와 핀에 가까이 붙었지만 누가 봐도 그 샷은 프로답지 못한 무성의한 샷이었던 것이다.

사실 30야드 안팎의 벙커샷은 상당히 어려운 샷이다. 거리 조절에 어려움이 많기 때문인데, 후끈 달아오른 봄의 상태를 고려하면 이런 정확한 샷이 나오리라 기대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라이도 어렵지 않은 2야드 퍼팅마저 놓친 봄은 결국 4오버, 쿼드러플 보기를 기록하는 대형 참사를 터트렸다.

“어라? 전화를 안 받아?”

몇 번이나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처음에는 화가 나서 혼을 내려고 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걱정이 앞섰다. 4오버로 부진했지만 -10은 아직 선두와 2타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공동 3위의 좋은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안 되겠단 싶어 이 대표에게 연락했는데, 역시 이 대표도 봄이 처한 상황을 가볍게 보지 않았는지 이미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였다.

그녀에게 봄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필상은 모모코의 전화를 받았다. 아직 그녀의 경기 내용을 살피지 못했기에 당황스러웠지만 모모코도 봄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제 전화도 안 받아요.’

“걱정하지 마. 이 대표님이 직접 가서 살핀다고 했으니까.”

‘전 걱정은 안 해요. 봄이 얼마나 독한 녀석인데요.’

“그냥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면 좋은데, 그냥 경기를 포기해 버릴까 봐 난 그게 걱정이야.”

‘크흐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요. 봄이랑 저랑 약속한 게 있거든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둘은 같은 기간에 펼쳐지는 대회에 출전하기로 약속했으며 매 대회마다 내기를 하기로 했단다.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지만 성적이 나쁜 사람이 상대에게 큰 부담을 져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부담? 설마 돈 내기를 한 건 아니지?”

‘그건 몰라도 되고요. 여하튼 포기하면 무조건 최하 성적이 되기 때문에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친자매처럼 친한 둘이지만 골프에 관한한 은근한 경쟁의식이 있었고 그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이미 일본 투어의 여신으로 추앙받는 모모코로서는 루키인 봄의 도전이 가소롭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그녀도 봄의 잠재력을 알고 있기에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간 큰 두 여자는 보통 사람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금을 주고받는 내기를 진행 중이었다.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으면 긴장할 수 없다나?

[KLPGA 롯데렌터카 여자오픈 3R - 미우라 모모코 6언더 / 합계 12언더 공동 3위]

묘하게도 둘은 3라운드를 마친 현재 같은 순위였다.

성적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순위만 따지기 때문에 최종 라운드에서 누가 더 잘 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가려지게 되었다.

어제와는 완전히 상반된 하루가 지나간 것인데, 필상으로서는 모모코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아내이기 때문이 아니라 기세가 꺾인 봄에 비해 모모코는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기량이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저 지금 90홀 째 무보기 플레이인 거 알죠?’

“90홀?”

‘작년 JLPGA 투어챔피언십 리코 컵에서부터 이어진 기록인데, 모르고 있었나 봐요?’

“응. 미안해. 내 코가 석 자이다 보니.”

이미 몇몇 한국 언론에서 다뤄졌지만 필상은 지금 그걸 일일이 살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2019년 한국 골프의 신성, 고진영 프로가 114홀 무보기 플레이 대기록을 달성하면서 이 부문이 큰 주목을 받았다.

공식 집계가 되지 않지만 보기가 없는 플레이를 이어 가는 것은 우승 가능성과는 별개로 프로의 진정한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중요한 척도라고 평가를 받는다.

‘현재 KLPGA 기록은 김자영 프로가 세운 99홀이거든요.’

“그럼 10개 홀만 넘겨도 신기록이네?”

‘네. 저는 우승보다 그 기록을 달성하고 싶어요.’

“좋아! 하지만 너무 기록을 의식하지 말고 편안하게 경기해. 당신은 그럴 능력을 충분히 갖췄으니까!”

‘고마워요. 흐흐흐…….’

기존 기록은 2000년도 타이거 우즈가 세운 110개 홀 무보기 플레이다. 당시 20개 대회에 나서 9승을 거뒀던 전성기라는 것을 감안할 때, 고 프로가 얼마나 가치가 높은 신기록을 달성한 것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필상도 그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타수를 잃지 않고 홀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우승 기회는 찾아오게 마련일 테니까.

빛나는 경기력은 아니었으나 무보기 플레이를 이어 가다 보니 결국은 우승 가시권에 들어온 모모코의 이번 대회가 비근한 예라고 봐도 무방했다.

“잠을 자기는 글렀군!”

봄과 모모코의 경기를 챙기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어 필상은 수면보다 토납을 통한 재충전을 선택했다.

연속해서 3개 대회를 치르고 다시 메이저 대회까지, 지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 빠듯한 일정을 소화한 것이다.

모두가 비슷한 조건이라고만 치부했는데, 실제 명상에 들어 자신의 몸을 관조하던 필상은 잠보다 토납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허리며 어깨, 손목까지 성한 곳이 별로 없을 만큼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 * *

새벽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러닝으로 하루를 열었다.

심상치 않은 바람이 더 마스터즈의 최종 라운드를 폭풍 속으로 밀어 넣을 듯이 사납게 부는 것을 보며 전의를 다졌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필상이 연습 라운지에 도착해 샷을 점검하려는 찰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울렸다.

대부분의 문자는 무음으로 처리했지만 가족과 몇몇 지인들만 알림을 설정했기에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을 확인한 필상은 답글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그렇게 속을 섞인 봄으로부터 날아온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걱정 마세요! 잘할 테니까!]

어떤 답장을 보낼까 몇 번이나 수정을 거듭하던 필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렵사리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닭살 돋는 그 내용에는 수많은 생각과 마음이 담겨 있었다.

[봄. 넌 내 닮은꼴 여동생이잖아! 너무 잘하려고 집착하지 말고 부디 골프를 즐겁게 치길 바라.]

답장을 기다렸지만 한참 뒤에 이모티콘 하나만 도착했다. 흔히 볼 수 없는 단발머리 여자 캐릭터의 ‘메롱!’이었다.

그런데 진지한 그 어떤 답보다도 편안하고 든든했다. 녀석이 포기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필상이 밝혔듯 봄도 절대 포기할 성격은 아니다. 포기는커녕 악착같이 승부하려고 달려들 것이다.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즐겁게 치라고 권했다. 그게 잘될지는 의문이지만.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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