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트리플 보기
-산 넘어 산이로군요!
-아쉬운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 어려운 상황에서 무사히 벗어난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벌써 5번째 샷인데요?
-이제라도 잘 붙여 트리플 보기로 마무리하면 됩니다.
허 해설의 그 말이 야속하게 들린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당장 중계방송을 이어 가야 할 임 캐스터도 말을 잊은 채 그를 원망 어린 눈초리로 쳐다볼 정도였으니까!
사실이 그렇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냉정한 말을 뱉을 수 있느냐는 것인데, 그러다 문득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어제는 비록 3언더로 다소 부진했지만 오늘은 무서운 기세로 6언더까지 몰아쳐 결국 우승 가시권에 도달했습니다. 조금 더 줄여 단독 선두까지 바라고 있는데, 트리플 보기라니요!
그 마음에 공감하는 이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허 해설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공필상 프로의 투어 통산 기록상 첫 트리플 보기가 나오게 된 점은 저도 무척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런 실망 어린 마음가짐으로 나서면 지금 저 벙커 샷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는 없는 겁니다!
-아! 그건 그렇지요. 휴우!
그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똑같은 기분을 느끼던 팬들도 아쉬움을 떨쳐야 했다.
4번째 샷마저 벙커에 들어간 것을 보고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당당히 걷는 필상의 모습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
“넣자. 저거!”
“네. 하실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시선 중에 모모코는 물론 누나들과 엄마도 있다는 것을 상기한 필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물론 쉽지 않은 벙커샷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실망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럴수록 한 타라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굳게 믿은 필상은 두려움을 떨치고 과감한 샷을 감행했다.
텅!
깃대를 맞고 들어가는 줄 알았다.
한껏 걱정 어린 얼굴로 필상을 바라보던 팬들도 일제히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박수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공은 아쉽게도 홀컵에 빨려 들어가지는 못했다.
-아! 저게 확 들어갔어야 하는데요!
-작정하고 노린 것 같습니다. 방금 저 샷에서 봤듯이 우리 공 프로 절대 쉽게 물러날 선수가 아닙니다. 두고 보십시오. 남은 홀의 플레이를!
-그렇죠! 역경 없는 우승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난관을 딛고 또 다시 당당히 올라서는 모습을 기대해 봅니다.
어려움은 사람을 강하게 단련시키는 법이다.
늘 우승할 것만 같은 탁월함을 보여 왔기에 오늘 전반에 무서운 기세로 몰아치자 이미 우승한 것처럼 다들 기뻐했다.
그래 봐야 72홀 중에 27홀을 지난 것에 불과했건만 이번에도 무난하게 우승하고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역시 세상사는 녹록치 않았다.
천하의 공필상도 한 홀에서 3타를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불안함과 함께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확 높아졌다.
또한 우승의 가치도 훨씬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건 팬들뿐만 아니라 필상도 마찬가지였다.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드라이브.”
“프로님……. 설마?”
미사키는 드라이브를 건네받는 필상에게서 강렬한 기세를 감지했다. 그건 바로 차고 넘쳐흐르는 투지(鬪志)였다.
필상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 의지를 끌어올린 대상은 510야드의 길지 않은 전장을 지닌 13번 홀이다.
이미 연습 라운드 때 장타를 날려 성공한 적이 있는 이 홀의 레이아웃은 뇌리에 지도처럼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래스 크릭을 넘어 시원하게 펼쳐진 페어웨이가 급격하게 꺾이는 지점은 300야드 안팎이며 그로부터 좌측으로 45도가량 휜 도그 렉 홀이기에 강력한 드로우 샷을 장착했다.
투지는 하늘에 닿을 듯 높지만 실제 티잉 그라운드에서 움직이고 있는 필상의 샷 루틴은 마치 폭풍전야처럼 조용히 진행되었다.
340야드를 넘겨 광활한 페어웨이에 닿을 수 있도록 모처럼 전력을 다한 티샷을 날릴 생각에 전신의 감각이 곤두섰다.
-장타를 준비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스트레이트 구질이라면 순수한 캐리만 330야드 이상을 날려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샷입니다. 하지만 왼쪽으로 휘는 홀이라서 드로우를 건다면 공 프로의 장타력으로 충분히 넘길 수 있습니다.
-아! 제발 속 시원한 장타가 터지면 좋겠습니다.
해저드에 빠뜨린 뒤에 다시 숲에 들어간 공을 쳐 내느라 고생했다. 12번 홀의 불행이 너무 컸던 터라 장타를 장착한 필상의 티샷에 팬들의 기대가 한껏 높아졌다.
장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지만 잘나가던 기세가 한풀 꺾인 상황인지라 지켜보는 이들의 심장은 터질 듯 부풀었다.
까앙!
필상은 과감하게 클럽헤드를 던졌다.
방향성을 담보할 수 있는 한도의 바닥까지 힘을 끌어냈다.
너무 강하게 치려고 과도한 힘이 들어가면 오히려 속도가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그립을 가볍게 쥐었다.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 등줄기에 서늘한 전율이 돋았다. 미스 샷이 나와서가 아니라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잘 맞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헤드업을 하지 않고 공이 떠난 자리를 직시하느라 어떻게 날아가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창공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치솟고 있는 타구를!
“와아아아!”
사방에서 터지는 놀라움에 가득 찬 감탄사만 접수했다.
일단 방향은 일직선으로 쭉 뻗어 나갔기에 어떤 이들은 손에 땀을 쥐기도 했다. 그냥 그대로 휘지 않으면 정면에 보이는 나무숲으로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장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점에 이른 순간, 공은 마치 누군가 조종하는 드론처럼 갑자기 방향을 틀어 선회하기 시작했고 홀의 모양을 따라 멋진 드로우 궤적을 과시했다.
346야드, 랜딩한 지점을 찍은 거리도 믿기지 않지만 약간의 내리막을 타고 구르기 시작한 타구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 기관차처럼 그린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이, 이게 대체 인간의 샷이 맞습니까?
-하하하! 괴물이죠. 장타 괴물!
-408야드! 런이 대체 얼마나 나온 겁니까? 이건 장타 대회가 아닙니다. 자그마치 아멘 코스의 하나인 오거스타내셔널 GC의 13번 홀이란 말입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임 캐스터는 자신의 침이 허 해설의 얼굴에 마구 튀고 있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다는 듯, 허 위원은 얼굴에 묻은 이물질을 쓱 문지르며 이번 타구의 데이터를 주목했다.
장타의 비결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내리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기 때문이다.
-스윙 스피드가 무려 135마일이 나왔습니다. PGA 정규 투어에서 측정된 최고 스피드는 버바 왓슨의 128마일인데, 1, 2 마일도 아닌 무려 7마일이나 더 나온 새로운 기록입니다.
-저는 왜 그 수치가 마음에 와닿지 않는 거죠? 그냥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미친 비거리가 나왔다는 거, 저는 그거만 확실하게 인지할 뿐입니다. 하하하!
-비거리도 올 시즌 가장 긴 신기록입니다. 뒷바람이 불거나 내리막 경사가 심한 홀도 아니라는 것이 모두를 놀라게 만드는 지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요! 이전 홀의 아쉬움을 일시에 털어 버린 정말 짜릿한 장타가 적시에 터져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존경합니다! 프로님.”
“무슨 존경씩이나?”
“400야드를 넘긴 것 같아요.”
“아마 그럴 거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세컨샷이 얼마나 남았을까?”
“110야드?”
“일단 진정하고. 가서 확인부터 해 보자.”
“네. 흐흐흐.”
필상도 후련했지만 팬들은 물론 미사키도 이제야 비로소 얼굴에 미소가 되돌아왔다. 아무리 아멘 코스라도 필상이 트리플 보기를 기록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13번 홀은 아멘 코스에서 빼야 할 것 같아요.”
“거의 모든 선수들이 타수를 줄이는 홀이지. 하지만 가끔 바람이 강한 날은 치명적인 스코어가 나오기도 하더라고.”
“그게 오늘은 아니잖아요. 흐흐흐.”
실제 세컨샷 지점에 가보니 남은 거리는 105야드에 불과했다. 바람도 크게 불지 않아 샌드웨지를 잡은 필상은 그림 같은 샷으로 홀컵 바로 앞에 떨어뜨렸다.
2.3야드, 방심하면 놓칠 수도 있는 거리였기에 집중력을 발휘한 필상은 이글 퍼팅을 집어넣으며 단숨에 -8로 복귀했다.
트리플 보기에 이은 이글 성공, 그 어떤 드라마도 이처럼 극적이기는 힘들 것 같았다.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놓친 것은 좀 아쉽네요. 저 정도 거리는 곧잘 넣지 않았었나요?
-하하하! 6야드 퍼팅, 그거 쉬운 거 아닙니다. 게다가 여긴 그 이름도 유명한 오거스타 내셔널 아닙니까!
13번 홀에서 이글을 잡아 분위기를 쇄신한 필상은 15, 16번 홀에서 연속 버디로 공동 선두까지 올라섰다.
하지만 비교적 쉬운 17번 홀에서 세컨샷이 벙커 턱에 박히는 바람에 2온에 실패했고 3야드 퍼팅마저 홀컵을 돌아 나오며 1타를 잃었다.
그래도 어렵다는 18번 홀에서 다시 버디 기회를 잡았지만 공동 선두에 복귀하지는 못했다.
“6언더를 치고도 아쉬움이 남아요.”
“차차 더 나아지겠지.”
“그쵸? 어제 -3, 오늘 -6이니까 내일은 -9칠 것 같아요.”
필상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어제 오늘은 날씨가 좋았고 대회 기간 내내 비슷할 것이라고 했지만 오늘 저녁 일기예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서서히 바람이 강해지고 비 소식도 있어 결선 라운드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선두권 선수들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여하튼 예선 통과 컷이 1오버로 결정되었고 66명이 결선에 올랐다. 그 기록은 최근 20여 년 동안 가장 좋은 성적이란다.
공동 선두와 11타 차이에 다닥다닥 붙었기 때문에 날씨와 운이 맞는 선수는 누구든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이 반가울 리 없었다.
[KLPGA 롯데렌터카 여자 오픈 2R - 미우라 모모코 4언더 / 합계 6언더 공동 11위]
첫날 -2로 다소 부진했던 모모코의 샷이 2라운드에서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굉장히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하지만 선두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이날 김민선 프로가 7타를 줄이며 합계 -12, 단독 선두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모모코의 음성은 어둡지 않았다. 상대가 어떻든 자신이 원하던 플레이를 이어 간 것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상은 경기 내용을 조목조목 분석하며 보다 과감한 경기 운영을 요구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KLPGA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절대 움츠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반드시 붙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샷을 해!”
‘오빠도요!’
“하하하! 내 경기는 보지 말라고 했잖아.”
‘안 봤어요. 대신 하이라이트는 봤죠. 딱 두 홀만 보여주던 데요? 흐흐흐…….’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최악의 12번 홀과 최상의 결과를 얻었던 13번 홀.
쑥스러웠지만 말이 나온 김에 자신이 겪은 것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며 제주도의 특별한 바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도 덧붙였다.
다행히 경기에 임하는 모모코의 자세는 굉장히 결연해 결선 라운드에서는 더 나은 성적이 예상되었다.
‘우리 딸 보고 싶지 않아요?’
“보고 싶지!”
‘그럼 큰언니랑 영상 통화해 보세요. 수미가 아빠를 알아볼 거예요.’
“그래?”
제주도에 내려갈 있는 동안 모모코는 시간이 날 때마다 수시로 수미와 영상 통화를 한다고 했다.
늘 붙어 있던 엄마를 알아보는 건 당연하지만 오랜만에 아빠 얼굴을 보고 몰라보면 어쩌나 걱정하며 통화를 시작했는데, 자신의 우둔함을 반성해야 했다.
‘아빠! 아빠!’라고 부르며 한껏 친근감을 나타내던 수미가 통화를 마치려 하자 ‘으앙!’ 울어 버리는 통에 가시지 않는 여운을 정돈하는 것이 심히 어려웠다.
[JLPGA 야마하 레이디스 오픈 2R - 이즈카 하루 7언더 / 합계 14언더, 6타 차 단독 선두]
첫째 날 폭풍처럼 몰아친 봄은 둘째 날에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경기력을 보여 줬다. 필상의 잔소리에 몸서리를 쳤으면서도 강조했던 말은 모두 충실히 이행한 결과였다.
무리한 시도를 자제하고 안전한 공략을 이어 가는 가운데, 보기는 하나도 없었고 이글 하나, 버디 5개를 건지며 모든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워낙 좋은 경기력을 보였고 필상의 조언을 충실히 따랐기에 격려의 전화를 생략할 수 없었다.
‘어쩐 일로 이틀 연속 전화를 다 주셨죠?’
“칭찬이 필요할 것 같아서.”
‘흐으으……. 저 잘했죠?’
“그래. 오늘은 정말 프로 같더라! 2위가 3타 안으로 추격해 오지 못하면 더도 말고 딱 오늘처럼만 해.”
‘싫어요. 마지막 라운드는 몰라도 내일은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고 싶어요. 얼른 동의해 주세요.’
“좋아! 하지만 샷감이 좋지 않으면 전략을 수정해. 알았지?”
‘네! 오라버니.’
“오라버니? 그 말은 또 언제 배웠어?”
‘음……. 모모코 언니가 오빠라고 부르니까 저는 다르게 불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려. 오라버니도 괜찮기는 하네.”
봄은 걱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다부진 경기력을 보였다.
원래 꼼꼼한 성격에 머리 또한 비상해서 매번 상황판단이 빨랐다. 또한 그 누구와 맞상대를 해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는 배포까지 일품이어서 함께 플레이를 했던 동반자들은 하염없이 허물어졌다.
그런 녀석을 누가 루키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봄은 하이라이트가 아니라 필상의 모든 경기 장면을 다 본 것 같았다. 잠이 부족하면 컨디션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제발 잠을 자라고 당부했다.
그러겠노라 대답했지만 말을 들을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은근히 고집이 세고 자신감이 넘쳐 나기에 두고 볼 문제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