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Rae’s creek
퐁당!
필드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 그게 들렸다.
너무도 똑똑히!
하필이면 그린 좌측에 움푹 들어간 개울로 빠지고 말았다. 만약 왼쪽을 보고 치지 않았다면 그린 앞부분에 떨어질 타구였기에 안타까움은 더했다.
샷을 하기 전에 생각이 많아도 좋지 않지만 너무 과감한 샷도 적절치 않다는 것이 증명된 티샷이 되고 말았다.
설마 이런 샷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던 팬들이 한순간 침묵에 잠기더니 하나둘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허허! 탄도가 너무 높았나요?
-아닙니다. 8번 아이언 로프트를 그대로 살린 지극히 정상적인 샷이었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샷인데, 왜 갑자기 뚝 떨어지는 거죠?
-맞바람이 불었습니다. 갑자기!
-어허! 맞바람이 분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 아닌가요?
-대체로 맞바람이 부는 것은 맞습니다. 때로 바람이 강할 때는 6번 아이언을 잡고도 크릭에 빠지니까요. 하지만 어제도 오늘도 바람이 감지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감지도 되지 않는 바람을 감안한 샷을 해야 한다니, 이건 실력이 아니라 운이 좌우하는 것 아닌가요?
딴에는 맞는 말이다. 인간의 오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을 어떻게 고려한 샷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선수가 동일한 조건에서 샷을 한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특별히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아멘 코스의 악명은 이미 자자했기에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른 최적의 샷을 구현하는 능력, 그것을 얼마나 잘해내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나 비교적 짧은 155야드의 이 파 3홀의 어려움은 수많은 이들에게 좌절을 선사했다.
오거스타에서 2위만 4번을 기록한 와이스코프는 1980년 이 홀에서 무려 5개의 볼을 물에 빠뜨리면서 13타라는 불명예스러운 스코어를 기록한 적이 있다.
과거와는 달리 골프 장비의 혁명적 개선이 이뤄진 뒤에도 희귀한 기록은 허다하다. 2013년 전년도 챔피언인 버바 왓슨은 2년 연속 우승을 노리며 잘나가다 이 홀에서 셉튜플 보기(Septuple Bogey-7오버)를 기록하며 침몰했다.
당시 재미교포인 케빈 나도 공을 3개나 개울에 빠뜨리며 이 홀의 지독함을 혹독하게 경험했다.
“어? 이번에는 바람이 먹지 않아요!”
“그러게!”
필상의 티샷이 짧은 걸 지켜본 호프만은 7번 아이언을 잡았다. 하지만 충분히 강한 샷을 했는데도 그의 타구도 개울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그 장면을 지켜본 3번째 주자 레시먼은 다시 한 클럽을 더 길게 잡고 탄도가 낮은 샷을 구사했다. 그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 빚어졌다. 그가 때린 공은 거의 바람을 타지 않고 그린 뒤쪽의 벙커에 처박혔다.
그린에 맞고 넘어간 것도 아니고 그냥 직선으로 꽂힌 것이다. 멀리서 봐도 공의 절반 이상이 모래에 잠겼다.
-이거, 이거! 저 샷은 맞바람이 거의 없지 않았나요?
-네. 탄도가 낮으면 바람의 영향을 덜 받는 것 같습니다. 6번 아이언을 잡았으니 바람의 저항이 적었다면 저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더 애가 마르네요. 차라리 일관성이라도 있다면 공 프로가 그걸 참조할 텐데, 더 헷갈릴 것 아닙니까!
사실이었다.
호프만의 티샷도 짧은 것을 보고는 7번 아이언을 잡을 요량이었다. 그런데 레시먼의 직선타구를 본 뒤, 강한 유혹을 느꼈다.
전신의 초감각을 극대화시키고 싶은 욕망.
그것을 일으킨다면 아무리 휘몰아치는 바람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진정한 승부가 아니거든!’
신체적 능력이 다른 선수들에 뒤처지는 것도 아니고 정신력이 나약한 것도 아니다. 다들 자연의 이 기괴한 조화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는데, 혼자만 꽃길을 걸을 수는 없었다.
나름 합리적인 방안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미 숙지한 야디지북의 내용을 참조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그걸 보지 않았다면 보다 창조적인 샷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정보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다렸다.
서서히 루틴을 밟으며 바람이 한 방향으로 흐를 때까지.
‘그래!’
왼쪽 뺨에 바람이 느껴졌다.
잠자던 맞바람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팬들을 다소 지루하게 했다는 미안함이 있었으나 급기야 다가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쉭!
바람을 가르는 7번 아이언의 헤드가 인정사정없이 공을 때렸다. 그런데 초조함이 지나쳤던 것일까?
의도한 것보다 실제 임팩트가 너무 강하게 들어갔다.
그나마 거기에 그치면 좋으련만 공이 떠난 자리를 쳐다보고 있는 필상의 가슴이 철렁하는 변화가 감지되었다.
왼뺨을 간지럽히던 바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어어! 너무 강한 것 아닌가요?
PGA 통산 최다승을 기록한 샘 스니드는 말하길, ‘12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서 산들바람을 느낀다면 실제 공중에는 돌풍이 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른 바 ‘바람 잘 날 없는 홀’이라는 악명을 지닌 이 홀의 기상천외한 바람이 필상의 멋진 라운드를 망치고 있었다.
의도한 것보다 강한 스윙을 했더라도 맞바람이 더 강하게 분다면 오히려 결과는 더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하는 환경을 기다라는 태도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그 짓을 하고 있는 것이 거북했던지, 컨트롤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느닷없이 맞바람이 잦아들다니!
“어어어!”
“오 마이 갓!”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총알처럼 날아간 필상의 타구가 그린을 넘어 그린 뒤쪽에 떨어졌는데, 기이하게도 벙커에 빠진 게 아니라 두 벙커 사이의 좁은 러프에 맞더니 화단으로 튀어 올라갔기 때문이다.
그린이 전체적으로 뒤가 높은 경사라서 벙커에만 빠져도 낭패를 보는데, 이건 벙커도 아닌 울긋불긋 꽃이 만발한 화단에 기어 들어가는 바람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던 것이다.
문제는 그 화단에 대한 로컬룰 적용이었다.
-화단에 들어간 공의 처리가 어떻게 되죠?
-거긴 화단이 아닙니다.
-네?
누가 봐도 화단처럼 보였다.
그런데 카메라에 비친 그린 주변을 자세히 보니 사실이었다. 13번 홀 티 박스 양옆은 정성들여 조성한 화단이 맞지만 12번 홀 그린 뒤쪽은 같은 색깔의 나무가 심어졌을 뿐, 화단이 아닌 꽃나무 숲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그렇다면 무벌타 구제는 없다.
있는 그대로 치거나 도저히 샷을 할 수 없을 경우에는 벌타를 받고 규정에 따라 드롭을 한 뒤에 플레이를 이어 가야 하는 것이다.
“칠 수 있을까요?”
“애매한가 봐.”
보통 공이 눈에 띄지 않는 지점으로 들어가면 근처에 위치한 진행요원들이 먼저 확인하고 알려 준다.
대개는 공의 유실 여부만 밝히지만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면 공의 라이도 어느 정도는 드러난다. 밝게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면 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공을 찾지 못했을 때는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고 선수들이 올 때까지 계속 공을 찾는다.
그런데 공을 찾기 힘든 지역은 아니었다. 쉽게 공을 찾았지만 별다른 액션이 없이 그 지역을 사수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공은 있는 것 같은데, 카메라 무빙이 느리군요.
-아닙니다, 아직 티샷을 하지 않은 선수가 있어서 다가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진행요원의 표정을 보니 녹록한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샷이 꽃나무 가지에 걸리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솔잎에 깊이 잠겼을 수도 있습니다. 오거스타의 상징 중에 하나인 소나무 밑동의 솔잎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매년 컨테이너 10대 분량을 구입해 두툼하게 깔아 놓는다고 합니다.
-그걸로 깊은 러프의 기능을 대신하도록 한 거군요!
-네. 그래도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 일단 벌타 없이 샷을 이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보통 숲은 그늘이 지기도 하지만 떨어진 솔잎이나 낙엽 때문에 좋은 잔디가 잘 생장하지 못한다. 때문에 질 나쁜 풀이 생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좋은 코스는 그걸 다 뽑는다.
페어웨이나 그린의 잔디 성장에 악영향을 미치는 잡풀들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때문에 가만히 두면 맨땅이라서 미관을 해지는 터라 솔잎이라도 깔아 두는 것이다.
어서 공의 상태를 확인하러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호프만의 공이 또 다시 개울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난감할 것이다. 샷마다 길었다가 다시 짧았다가 도무지 바람을 종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6번 아이언을 잡고 풀스윙을 했는데, 겨우 그린 앞의 러프에 걸쳤다.
“지겨운 홀이네요!”
“하하하. 4번째 샷이라 이거지?”
필상은 어이가 없었다.
진즉에 좀 더 진지하게 준비하고 바람을 감지했다면 적어도 이런 망신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초감각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모두가 인정하는 난해한 홀이라는 것에 별로 감흥이 없었건만 개울에 빠뜨리고 또 형편없는 샷을 하고 난 뒤에야 이 홀에 대한 강한 도전 의식이 끓어올랐다.
대체 홀의 구조가 어떠하기에 이런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는지 능동적인 연구, 분석을 하고픈 강렬한 욕망이 피어났다.
아멘 코스를 정복하지 못하면 마스터즈의 우승을 하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13번 홀은 괜찮은가 봐요.”
“응.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 괴상한 홀이네. 대체 어떻게 이런 홀을 만들 수 있었던 걸까?”
미사키는 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물론 필상도 이 홀을 설계한 이들이 모든 것을 감안하고 만들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주워진 부지에 홀들을 적절히 배치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파 3홀을 하나 끼어 넣었는데, 이게 이런 희대의 물건이 될 줄은 몰랐을 확률이 높다.
다만 전설적인 골퍼, 보비 존스의 영험한 능력을 확인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했다. 황무지에 불과했던 이곳에 명문 골프코스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정, 그는 골프 역사를 바꾼 것이다.
파 3홀은 난이도를 높여 봐야 아일랜드 홀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홀은 단지 그린 앞에 개울이 흐르는 게 고작인데, 주변 상황이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세계적인 홀이 되었다.
“이런 환경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정성을 들여 면밀히 지형을 분석하고 주변 환경까지 고려하면 얼마든지 가능할 거야!”
18개 홀들이 모두 바람의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다.
코스 일부의 특수한 지형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멋진 홀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왜 타이거가 코스 설계에 그렇게 큰 미련을 가지는지 이해가 됐다.
수없이 많은 명문 코스들을 라운딩 해 본 그는 오거스타나 페블 비치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코스를 조성하는 것에 대한 높은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골프 경기 자체에 깊이 심취한 필상으로서는 그만한 경륜과 여유가 부족하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초감각을 적절히 활용하면 아멘 코스 못지않은 명문 코스 조성에 큰 장점이 있음을 확인했다.
“으음…….”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공이 개나리 나무의 밑동에 놓여 있는데, 솔잎에 절반 이상이 잠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질긴 러프보다는 클럽이 지나가기 수월했다.
그러나 공의 위치가 스탠스를 취하면 무릎보다 높은 지점에 놓였고 백스윙이 가지에 걸려 정상적인 테이크백을 취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스탠스부터 잡아 봤다.
그런데 거의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자세가 나왔다. 안 그래도 어색한 자세인데 클럽을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었다.
핀까지 거리는 24야드, 어려움을 더하는 것은 그 사이에 벙커가 끼어 있어 어정쩡하게 치면 벙커에 빠진다는 거였다.
-어허! 저 공 어떻게 쳐야 할까요?
-로프트가 큰 클럽을 쓰면 벙커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어도 피칭보다 큰 클럽을 들고 쳐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공이 그린에 떨어질 경우 오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짧으면 벙커, 길면 그린을 한다면 결국 벙커와 그린 사이의 저 좁은 러프에 떨어뜨려 속도라도 줄여야 한다는 건데, 안 그래도 폼이 이상한 판에 그게 가능할까요?
답은 정해진 것 같았으나 허 해설도 감히 장담하지 못했다. 스탠스라도 편하다면 필상의 기량을 고려해 충분하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스핀을 먹일 수도 없는 자세와 솔잎에 잠긴 상황에서 그런 정확성까지 담보하기는 너무 어려워 보였다.
“갭 웨지!”
“네!”
한참 고심한 필상이 52도 로프트를 가진 갭 웨지를 선택했다. 어차피 백스윙을 크게 할 수도 없고 스핀을 먹일 수 없다면 클럽 페이스를 닫고 콱 찍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상이 처한 어려움을 확인한 페트런들은 굉장히 시끌벅적했다. 그냥 떠드는 것은 아니고 각자 필상에게 빙의해 자신이라면 어떻게 칠 것인지 서로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상당히 이색적인 광경이었으나 한순간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필상이 마침내 샷 루틴을 밟아 나갔기 때문이다.
클럽 페이스를 닫았기에 핀보다 살짝 우측을 에이밍 한 필상은 공 뒤에 클럽을 대고는 까딱까딱 몇 번 움직이는 듯하더니 그냥 툭 때렸다.
“인 더 홀!”
“넘어가!”
너무 살짝 친 것 같았는지 몇몇 팬들은 벙커를 넘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말을 던진 이들은 곧 머리를 싸매야 했다.
그냥 툭 친 것 같았던 공이 벙커를 넘긴 것은 물론 러프도 훌쩍 지나 그린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굴렀다. 홀컵을 나 몰라라 지나친 공은 결국 그린 반대편 벙커에 기어 들어가고 말았다.
그나마 클럽 페이스를 닫았기 망정이지 조금만 더 열렸다면 또 다시 개울로 기어 들어갈 뻔했던 아슬아슬한 타구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