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79화 (279/354)

279. 골든 벨

까앙!

청명한 타격 소리가 선수만큼이나 긴장하며 구경한 패트런들의 초조했던 기분을 단숨에 상쾌하게 만들었다.

필상의 스윙은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테이크백이 다소 가파르게 올라갔으며 팔로우스로우는 팔을 의도적으로 쭉 뻗어 타구를 끝까지 미는 듯 보였다.

흔한 표현을 빌리자면 펀치 샷의 드라이브 모드였다. 드라이브로 그런 샷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고유한 특성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타구의 궤적 또한 평소와 상이했다. 무서운 속도로 쭉쭉 뻗어 나가다가 어느 한순간 비행기가 이륙하듯이 확 떠올라야 하는데, 낮은 궤도를 유지한 채 스트레이트로 뻗었다.

-스트레이트 구질인데요?

-아닙니다. 보십시오. 서서히 휘는 것을.

-아! 일단은 힘에 밀려 곧게 나가던 공이 드디어 사이드 스핀을 먹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정말 장관입니다!

아무리 봐도 멋진 궤도였다.

보통의 타구는 그렇게 가다가 떨어지게 마련인데 마치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계속 뻗어 나갔다. 아니, 쏘아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팬들의 경탄에 찬 함성은 타구가 지면에 닿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좀처럼 멈추지 않고 내리막을 탄 채 쉼 없이 굴렀기 때문이다.

“350야드를 넘었어요!”

“응. 그러네. 생각보다 많이 나가네!”

필상도 얼마나 나갈지에 대해 장담하지 못했다.

평상시 연습할 때도 지금처럼 90%의 힘을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혹시나 모를 바람을 극복하기 위해 강하게 때렸다.

그 결과 페이드는 생각만큼 먹지 않았으나 바람의 영향을 받은 공은 처음 의도했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한 가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어마어마한 비거리였다.

TV화면에는 정확한 데이터가 뜨겠지만 필드에 있는 선수나 캐디는 개략적인 거리만 추산할 뿐이다. 물론 남다른 거리감을 가진 필상은 감이 왔다.

-아무리 내리막을 탔다고 하더라도 이건, 이건 정말 믿기 힘드네요!

-늘 예상을 깬 공 프로의 비범함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런 낮은 탄도에 389야드라니요!

-그러니까요!

다음 샷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이 필요한 순간이지만 그렇게 이어지지 못했다. 과거에도 필상의 경이적인 장타가 터질 때마다 두려울 만큼 놀라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가장 주목받는 대회에서 가장 어렵다고 정평이 난 홀이다. 게다가 오늘은 핀의 위치가 까다로워 많은 선수들이 이 홀에서 낭패를 봤다. 그러나 필상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채 120야드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굴리자.”

“피칭 드려요?”

“아니. 9번이 좋겠어.”

거리도 거리지만 그린이 가장 앞뒤로 길게 보이는 장소를 확보했다는 것이 사실은 더 중요했다. 버디를 노릴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그린이 빠르기로 유명해 스핀을 먹인 웨지 샷을 구사하고 싶지만 바람의 영향을 고려해 범 앤 런 샷을 선택했다.

일단 그린에 올라가면 정신없이 구르기 때문에 그린에 떨구는 것은 어림도 없었고 두 번째 바운드 후에 그린에 올라가게 만들기 위한 탄착점을 하나 찍었다.

“90야드, 9야드, 3야드. 오케이!”

세컨샷 순수 캐리 90야드, 첫 번째 바운드 거리 9야드, 두 번째 바운드 거리 3야드를 보내면 102야드 지점에 에이프런이 위치한다.

에이프런에 떨어진 공은 더 이상 튀어 오르는 바운드는 없을 것이고 핀까지 16야드를 굴린다는 구상이었다.

계산을 끝낸 필상이 두 번의 연습 스윙 뒤에 어드레스를 취하는 순간, 또다시 카메라가 필상을 화면에 띄웠다.

서서히 올라간 테이크백은 하프스윙보다 약간 높았고 내려올 때는 언제나 그랬듯 과감했다.

탄도를 띄울 의도가 없었기에 깔끔하게 공만 샷 걷어 내는 스윙이 이뤄졌고 타구는 모두의 기대와는 달리 낮게 깔린 채 그린을 향해 쏜살같이 날았다.

-굴리는 샷인가요?

-네. ‘범 앤 런’을 구사한 것 같습니다.

-그린이 말도 못하게 빠른데, 굴리는 샷은 너무 애매하지 않을까요?

-띄우면 바람의 영향을 받는 것이 싫었던 모양입니다. 일단 탄도를 낮춘 저런 샷은 방향성 하나는 담보가 되니까 정확한 바운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필상의 세컨샷이 그린 앞 페어웨이에 떨어졌다. 그 샷이 짧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수다.

탄도가 낮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린을 오버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한 번 튄 타구는 10야드를 나갔고 다음 바운드에서는 4야드를 건너뛰었다.

“와아! 올라갔어요!”

“길어!”

애당초 90야드를 염두에 뒀지만 실제 캐리는 92야드나 날아갔다. 게다가 바운드마다 각기 1야드씩 더 날아갔기 때문에 타구는 에이프런이 아닌 그린에 올라서고 말았다.

다들 함성을 지르며 좋아했지만 필상의 표정은 차갑게 식었다. 자신의 샷이 길었던 것도 문제지만 적절한 바운드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탄도가 낮았기 때문이다.

바람에 대한 걱정이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 씁쓸했다.

아니나 다를까 타구는 핀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향했다. 그린 뒤에 위치한 개울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탄성이 비명 소리로 바뀐 것은 일순간이었다.

-아! 저게 저렇게 굴러가는군요!

-역시 유리알 그린입니다. 저도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에이프런까지 굴러가다니, 참 어려운 코스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오늘 버디가 단 2개밖에 나오지 않은 이유가 있군요. 그런데 대체 그 사람들은 어떻게 쳤기에 우리 공 프로도 잡기 힘든 버디를 잡은 거죠?

-실력과 운이 함께 따라 준 결과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봐도 공 프로의 티샷은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죠! 에이프런에서 7야드, 못 넣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안 되죠. 그럼요! 반드시 넣을 겁니다.

임 캐스터는 주문을 걸듯이 필상의 버디를 응원했다.

그런데 퍼터를 들어도 좋을 것 같은 거리에서 필상은 60도 웨지를 잡았다. 스핀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동반자들이 해매는 사이 충분한 대비를 마친 필상이 샷을 준비하자 또다시 11번 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뭐든 해낼 것 같다는 기대감이 어렸기 때문이다.

“인 더 홀!”

지휘자도 없건만 임팩트가 이뤄진 순간, 일제히 합창이라도 하듯이 버디를 응원했다.

그리고 스핀이 걸린 타구는 경사를 타고 절묘하게 흐르더니 홀컵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함성이 터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와아! 와아! 들어갔어요. 들어갔어요!”

“숨이나 좀 쉬면서 말해.”

“숨넘어가도 좋아요. 저게 들어갔다고요!”

“알았어. 하하하.”

홀컵 안에 떨어진 공을 줍기 위해 이동하는 필상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다른 사람도 거품을 물 정도로 흥분한 샷이었으니 당사자인 필상은 오죽했으랴!

약간의 현기증까지 느껴지며 현실감이 떨어졌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만 했다. 또한 동반자들의 퍼팅이 남았는데 팬들의 비명과 흥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필상은 모자를 벗고 인사도 해야만 했다.

-드디어 -9, 1타차 단독 2위로 올라섰습니다.

-아멘 코스의 첫 홀에서 버디를 잡은 것이 더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승의 향방은 마의 세 홀에서 결정된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특출한 기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꼭 필요할 때 한 방, 그거 아무나 되는 게 아니잖습니까!

-물론입니다. 타고난 승부사의 기질이 없다면 불가능한 샷이지요. 그렇게 멋진 티샷을 하고도 핀에 붙이지 못한 상황, 웬만한 선수는 억울해서라도 좋은 샷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세계 랭킹 1위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남은 홀을 잘 마무리해서 일단 공동 선두로 올라선다면 역사적인 우승에 한 발 더 바짝 다가설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누가 봐도 상승세였다.

전반에 5타를 줄이고 다시 그 어렵다는 홀에서 칩인버디를 기록했으니 허 해설의 말처럼 우승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았다.

그런데 12번 홀에 들어선 필상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어제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타이거의 조언대로 11번 홀과 12번 홀의 깃대가 슬라이스 한 방향으로 날리는 것을 보고 살짝 왼쪽을 오조준 했다.

생각보다 강했던 바람 때문에 핀에 붙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그린 우측에 떨어진 공을 2퍼팅으로 파를 기록했다.

그런데 지금은 11번 홀과 12번 홀의 깃대가 서로 정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바람이 미쳤나 봐요.”

“으음…….”

인근 기상청에 18년간 근무한 한 골프 애호가가 12번 홀을 지속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봤다. 골든 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홀은 자연적인 웅덩이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11번 홀과 13번 홀의 페어웨이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까닭에 두 방향에서 유입되는 공기가 만나는 구역이다. 또한 그린 뒤쪽에 위치한 컨트리클럽에서 바람이 내려오기도 한다.

그 복잡한 바람들이 이곳의 특이한 지형과 나무에 닿아 방향이 틀어지고 때로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때문에 바람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상과 공중이 다른 정도가 아니라 같은 지상인데도 100야드가 떨어진 11, 12번 홀의 깃대가 서로 엇갈린 채 나부꼈다.

초봄에는 오거스타의 기상이 상당히 불규칙하며 때로 제트기류가 필드까지 낮게 내려올 때도 있다고 했다.

“보이지 않는 손?”

오늘은 날씨가 대체로 무난한 편이어서 바람을 의식해 샷을 조절한 홀은 11번뿐이었다. 그런데 어제 기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 12번 홀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전설의 골퍼 벤 호건, 잭 니클라우스의 공략 방법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수시로 바뀌는 바람이지만 11번 홀과 12번 홀의 깃대가 한 방향으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샷을 했다.

하지만 그들이 활약하던 때와 지금은 다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 샷을 감행하지 않으면 페널티를 받는다.

물론 아너인 필상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더 주어지지만 언제 원하는 바람이 불지 알 수 없기에 또 다른 베테랑들이 선호하는 방법을 동원했다.

“으이!”

절로 신음 소리가 터진 이유는 혼란이 더 가중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11, 12번 홀의 바람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몇몇 선수들은 이 홀 오른쪽에 위치한 13번 홀의 우듬지를 살핀다.

나무의 맨 꼭대기 줄기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확인하는 것인데, 바람을 파악하는 좋은 지표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또 12번 홀과 너무 상반되게 흔들렸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순간이었다.

-어? 왜 샷을 하지 않는 거죠?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바람, 그로 인한 소용돌이는 이곳을 골프계에서 가장 두려운 155야드로 만들었습니다. 공 프로가 신중하다면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늘 빠른 판단과 과감한 스윙으로 유명한 필상이기에 유난히 하늘을 오래 둘러보는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하지만 중계석에서는 절대 현장의 상황을 알 수가 없다. 선수들의 바로 뒤에 구름처럼 몰려 있는 팬들도 가늠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홀이 하도 어려워서인지 미신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12번 홀을 조성할 당시에 상당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옛날 인디언들의 매장지였다는 주장 때문에 낭설이 난무한다.

볼이 날아갈 때 갑자기 바람이 일어나서 볼을 물에 빠뜨리면 현지 캐디들은 ‘유령의 짓’이라고 말을 한다는데, 그로 인해 이 홀이 더 유명해진 것도 사실이다.

‘심리적인 문제인가?’

일부 선수들은 바람을 물리적 방해가 아니라 심리적인 난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2차례 우승을 거뒀던 베른하르트는 원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비웃었다.

‘거기 서서 5분을 기다려 봐야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그는 30초가량 일단 기다리지만 소용돌이가 멈추지 않으면 곧바로 하나 더 긴 클럽을 선택하고 과감하게 샷을 했다. 8번 대신 7번 아이언으로 공을 낮게 날리는 방식이다.

스티브 스트리커는 너무 생각이 많아 오히려 실수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홀의 샷은 항상 투기나 다름없어 동반자의 플레이를 보면 도움이 되지만 그들의 볼이 물에 빠지거나 그린을 넘어간다면 결정이 더 힘들어질 뿐이라고 주장했다.

“8번 아이언!”

필상도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버디는 둘째 치고 일단 그린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 일명 래스크릭(Rae's creek)을 넘기면 그만이다.

너무 걱정이 많아 의도한 샷을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일 뿐, 생각이 많아지면 몸은 굳어 버리고 만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빠르게 루틴을 밟은 필상은 과감한 스윙을 감행했다. 오래 고민할수록 좋은 샷이 나올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 결정이지만 임팩트가 이뤄지는 순간,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샷 감이 좋아서가 아니라 샷을 하는 순간, 얼굴 왼편 뺨에 제법 서늘한 바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굿 샷!”

“인 더 홀!”

필상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팬들의 응원 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필상은 어제처럼 왼편을 에이밍 했건만 슬라이스 바람은커녕 갑자기 맞바람이 부는 것이 완연하게 감지된 것이다.

아뿔싸!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날아가는 타구에 시선을 뒀다. 언제 또다시 바람이 바뀔지 모른다는 희망을 담았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잘 날아가던 타구가 돌연 누가 잡아끄는 것처럼 힘이 쭉 빠지더니 가파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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