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심장이 쫄깃쫄깃한 느낌
-마스터즈 둘째 날 중계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한국의 초여름을 연상시키는 아주 화창한 날씨라서 멋진 플레이가 속출하리라 예상되네요.
-구경 나온 패트런들의 표정에 그 만족감이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마치 피크닉이라도 나온 것처럼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오거스타 내셔널! 말이 필요 없는 곳이죠! 골프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평생 한 번은 반드시 오고 싶은 코스가 아니겠습니까!
-라운드를 하는 것이 극히 제한된 코스라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하하!
필상의 경기가 오후에 배정된 터라 중계진은 다양한 화제를 다뤘다. 마스터즈의 역사와 전통을 비롯해 독특한 운영방식까지 언급되었는데, 시청자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돈이었다.
대회 기간 동안 대략 5만여 명이 입장하는데, 입장권 가격이 연습 라운드는 하루 80달러, 본선은 무려 120달러였다. 그 엄청난 가격에도 구할 수가 없어 암표가 성행하는데, 천 달러를 주고도 입장하려는 이들이 넘쳐 나는 게 현실이다.
-제 눈길을 가장 끄는 것은 광고가 일절 보이지 않는 거였습니다. 분명 스폰서가 있을 텐데요?
-물론이죠. AT&T, IBM, 롤렉스, 메르세데스벤츠가 4대 협력 파트너입니다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이들 기업이 후원사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상업적인 광고를 자제시킵니다.
-그런데도 후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광고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거군요.
마스터스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대회다.
TV 중계권료가 3000만 달러, 입장권 판매 수익이 4500만 달러, 마스터스 주간에 골프 숍에서 거둬들이는 수입도 5000만 달러를 훌쩍 넘긴다.
그것만이 아니다. 오거스타 인근 지역은 대회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지역 경제가 활기를 띤다. 교통 체증이 심각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려 호텔, 식당은 물론 지역 경제 전체가 살아나는 파급효과는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다.
메인 스폰서를 따로 두지 않는 이유다.
“이런 대회 모델, 아주 바람직해!”
골프 사업에 관심이 많은 필상도 진즉에 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직접 느낀 감동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냥 붙이기 좋아 ‘골프 축제’가 아니었다.
누구나 간절히 오고 싶어 하고 과할 정도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와서도 절대 실망하지 않는 대회, 이건 한두 사람의 노력과 봉사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너무 멋진 일 같아요.”
“골프가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예라고 봐야지. 미사키, 너도 잘 봐 둬.”
“제가 뭘 봐야 하죠?”
“봉사하는 사람들의 자세, 어떤 것을 돕는지 또 심지어 어떤 일까지 도와주는지도 꼼꼼하게 살펴봐.”
좋은 대회의 기본적인 전제는 훌륭한 코스의 보유다.
골프 역사상 유일무이한 캘린더 그랜드슬램 달성자인 보비 존스가 월스트리트의 자본가 클리퍼드 로버츠와 함께 오거스타에 영원히 추앙받을 명문 클럽을 건설한 것이 1933년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명문 클럽과 비교하면 턱없이 짧은 전통이지만 어느덧 개장한 지 90년을 눈앞에 뒀다.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는 그마저도 유래를 찾기 힘든 유구한 세월이지만 오거스타를 통해 확인된 것은 역사와 전통이 명문 클럽의 절대 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거스타 내셔널 GC는 그린 지하의 관리실에서 토양의 온도, 습도, 산소량까지 조절하는 과학적 코스 관리로 유명하다.
핀의 배치에 따라 플레이의 난이도가 결정되며 벙커가 불과 22개에 지나지 않지만 우승을 위한 여정은 험난하기로 이름이 높다.
“명문 코스의 보유, 최고 선수들의 출전, 거기에 보태 헌신적인 봉사자들의 자발적인 노력!”
물론 그 모든 것을 통제할 컨트롤 타워가 중요하다. 필상은 한국에도 이런 훌륭한 대회가 열리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난관부터 통과해야만 한다.
미국은 땅이 넓어 다양한 기후와 풍토가 존재하지만 한국은 뚜렷한 사계절이 나타나기에 오히려 코스 관리는 어렵다.
차라리 태국이라면 큰 돈 들이지 않고 좋은 코스의 건립이 가능하다. 타이거가 그 가능성을 보고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투입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족해!”
현재 TPK 한국지사가 보유한 3개의 클럽, 그리고 곧 리노베이션을 마치고 후반기에 개장할 3개의 클럽도 충분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냥 보기 드문 좋은 코스라는 평가 정도로는 부족하다.
세계적인 대회 개최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는데, 오거스타에 버금갈 코스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단 코스만 준비된다면 그 이후의 상황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 자신이 있기 때문에 더 안타까웠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 생각에만 골몰할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랜드슬램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공 프로의 플레이가 어제와는 확실히 다르군요.
-네. 특유의 도전적인 공략이 아주 눈에 띱니다.
-심장이 아주 쫄깃쫄깃한 느낌, 바로 이 맛에 골프를 좋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2라운드에 임한 필상은 동반자와 반갑게 인사는 나눴지만 아예 그들의 플레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미국 출신 찰리 호프만, 호주 출신 마크 레시먼은 1번 홀부터 기가 죽고 말았다. 348야드 페이드 티샷으로 100야드 세컨샷을 남긴 필상이 너무도 쉽게 버디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진 578야드 파 5홀에서는 집에 가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왜냐면 강력한 드로우 티샷이 무려 387야드를 찍었기 때문이다.
-직접 보면서도 잘 믿기지가 않는 결과네요!
-드로우가 아주 제대로 걸렸습니다. 그래도 풀스윙을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대체 우리 공 프로의 장타력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하하!
중계진은 신이 났지만 필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실제 필상이 의도한 거리는 350야드인데, 무려 20야드 이상 벗어난 엉뚱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휘어진 홀을 가로지를 경우, 350야드만 보내도 남는 거리는 220야드에 불과해 4번 아이언으로 그린 공략이 가능하다.
그런데 스위트 스팟에 정확히 맞은 타구는 드로우 구질이 가지는 장타 특성에 바람의 도움까지 받았던 것이다.
“더 나간 건 알지만 그렇게 인상까지 쓸 필요는 없잖아요.”
“아니야. 드라이브 비거리가 이렇게 들쑥날쑥하면 곤란해. 다음 홀이 351야드잖아.”
“3번 홀에서 1온 노리시려고요?”
“응.”
미사키는 할 말이 없었다. 2번 홀을 치면서 굳이 다음 홀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일단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린 필상은 201야드 남은 세컨샷에 7번 아이언을 잡았다.
아무리 장타자라도 6번 아이언 정도는 잡아야 할 것 같은데, 필상이 7번 아이언을 잡은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마치 웨지로 칩샷을 한 것처럼 엄청나게 떠오른 타구가 그린에 떨어진 뒤에 그냥 그 자리에 튀어 올라 오히려 백스핀이 먹었다.
-우우! 그렇죠! 런이 있으면 절대 그린 위에 설 수가 없죠!
-포대 그린이고 앞뒤 폭이 좁아 저렇게 치지 않으면 온 그린을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정말 소름이 돋는 굿 샷이 아닐 수 없습니다!
-7번 아이언으로도 저렇게 스핀을 먹일 수가 있는 거군요!
이 홀에서 드라이브 장타를 성공하는 선수는 곧잘 나온다. 300야드를 넘기는 드로우 샷을 구사할 경우, 오히려 페어웨이가 넓어서 안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 번째 샷에 샷 이글은 나올망정 2온 1퍼팅 이글은 지난 몇 년 동안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린에 올린 타구가 어김없이 뒤로 굴러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걸 잘 아는 필상은 정확한 거리감에 스핀을 먹이는 것이 정답이라고 판단했고 그 생각을 정확히 구현한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는 정말 기가 막힌 샷이 터진 것이다.
“우우우우!”
어렵게 얻은 이글 퍼팅이기에 필상도 굉장히 집중했다.
하지만 떨어질 것 같던 공이 홀컵 위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집중하고 있던 이들의 입에서는 깊은 탄식이 터졌다.
너무도 화가 나 ‘F’가 들어가는 적나라한 표현을 여과 없이 뱉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이 볼 때도 더 이상 잘 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필상의 생각은 이어진 3번 홀에 가 있었다. 아무리 억울해도 이미 나온 결과는 뒤집을 수 없기에 연속 버디에 만족한 것이다.
“안 들어갈 줄 아셨어요?”
“안 들어갈 확률이 높다는 생각은 했지.”
“어떻게요?”
“홀이 그렇게 생겼더라고. 홀 근처가 아주 살짝 높아. 주로 새로운 자리에 홀을 뚫을 경우 그런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그걸 확인하지 않은 주최 측의 실수라고 해야 할까?”
오후에 플레이를 시작하고도 그런 증상이 나타났다면 오전에는 더 심했다는 생각에 필상이 티샷을 준비하는 사이, 미사키는 오늘 2번 홀의 통계를 확인했다.
그런데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평소 4.65타 정도가 나왔던 평균 타수가 오늘은 4.97로 높았다. 0.32이면 아주 극심한 오류가 발생했다는 증거였다.
아주 가까이 붙이지 못한 어정쩡한 퍼팅들이 거의 빗나갔다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필상의 판단이 정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오래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필상이 351야드 파 4인 3번 홀에서 정말로 1온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어! 1온을 노리는 거 아닌가요?
-에임을 보면 확실한 것 같습니다.
-허! 이거 정말 오늘은 경기를 지켜보는 맛이 나는군요. 그런데 오르막까지 계산하면 대체 얼마나 되는 거죠?
-360야드는 봐야 합니다. 방금 전에 더 멀리 보내기는 했지만 구질부터 다르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아! 아까는 드로우였지만 지금은 페이드를 구사해야 하는 거군요. 그럼 저기 우측의 삐쭉 튀어나온 나무를 넘겨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봐도 쉬울 것 같지는 않네요.
웬만하면 긍정적인 발언만 하는 임 캐스터다. 하지만 티잉 그라운드에서 바라본 홀의 모양은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좁은 페어웨이에 보내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가까운 좌측의 나무는 페이드 샷의 궤적을 원천봉쇄하는 위치였다.
그래서일까?
필상의 스탠스는 페어웨이 한가운데를 보고 페이드 샷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우측을 향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긴장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정말 쥐 죽은 듯 조용하군요.
-팬들도 다 아는 겁니다. 아무도 이 홀에서 1온을 노리지 않았다는 것을.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냥 유틸리티나 아이언으로 벙커 앞까지 보내고 세컨샷으로 승부를 걸었습니다.
그런데도 핸디캡은 14번째 홀이다.
핀의 위치를 조절하면 난이도가 올라가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오늘 하루만 버디가 벌써 18개나 나왔다.
날이 선 필상의 정확도라면 끊어 가도 버디를 잡을 가능성이 높은데, 너무 무리한 시도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필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도 하면서 두 손을 마주 잡은 팬들이 많았다.
깡!
지난 홀보다는 더 가볍게 휘두른 느낌이 역력했다.
드로우 구질은 아니지만 너무 길어 그린을 넘기면 칩샷이 앞에서 하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피니시를 하는 필상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듯.
하지만 화면에는 비치지 않은 그 모습을 모르는 중계진은 힘차게 치솟는 타구에 희망을 담은 멘트를 쉬지 않았다.
-역시 스트레이트 구질인가요?
-네. 일단 탄도는 나무를 충분히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너무 부드럽게 친 게 아닌지 그게 걱정스럽습니다.
-에이! 설마요. 늘 그랬잖습니까! 짧을 것 같지만 언제나 우리의 기대보다 길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무난히 나무들을 넘을 것 같던 타구가 힘이 좀 빠지는 듯하더니 하필이면 가장 높이 치솟은 나뭇가지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타구의 궤적이 꺾인 것은 당연했다.
화들짝 놀란 미사키의 질문이 쇄도했다.
“어디로 갔죠? 공이 어디로 갔나요?”
“약했어.”
지금은 더 세게 쳤어야 한다는 말이 무의미하다. 이미 나온 결과를 분석하기보다는 당장 공의 궤적이 어디로 향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미사키는 안타깝게도 확인하지 못했다. 이럴 때마다 늘 남다른 시각을 지닌 필상은 정확히 알고 있기에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재차 물었다.
“프로님. 공이 대체 어디로 갔어요?”
“레이 업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냥 뚝 떨어진 건가요?”
필상이 더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미사키도 더는 묻지 못하고 기다렸다. 동반자들이 샷 하는 시간이 얼마나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는지 미사키의 입술은 바짝 타들어 갔다.
그러나 필상은 의외로 담담했고 안절부절못하는 미사키를 보며 피식 웃기도 했다. 영문을 모르는 그녀는 레이 업을 해야 한다던 필상이 자신을 놀렸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사이에 방송 카메라가 필상의 타구를 찾아내 화면에 비췄다.
-맨땅인가요?
-네. 라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데, 문제는 방향입니다.
-보자. 거리는 311야드가 나왔네요. 직선거리라서 그런지 남은 거리는 38야드, 정말 그린이 보이기만 하면 되는데!
공은 놓인 위치는 괜찮았다.
평소 그런 자리에서의 샷도 연습을 했기에 샷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카메라 방향이 공의 뒤로 가서 그린을 비추는 순간, 시야가 답답했다.
그린의 양 끄트머리만 보일 뿐 핀이 꽂힌 중앙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린에 올려도 버디를 노릴 방향은 확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잠시 후, 필상과 미사키도 그 장소에 도착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