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프가 좋아-276화 (276/354)

276. 꼰대

“좋은 걸 배웠군!”

마이크를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을 것이다. 다만 그걸 지나치게 자기 편의적으로 해석한 자신이 문제일 뿐.

그래서 한 수 배웠다고 생각했다.

물론 스타일이 다른 필상이 그걸 따라 할 생각은 없으나 적어도 같은 상황을 다시 겪지는 않을 자신이 생겼다.

또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아픈 구석이 있었다.

그건 바로 초심을 잃은 자신의 골프였다.

“내가 어느새 타성에 젖었구나!”

시드를 얻기 위해 나설 때부터 필상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 경기를 해 왔다. 그 덕분에 꿈의 58타를 깼으며 72홀 최저타 기록도 갱신했다.

하지만 우승이 쌓이고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으며 지명도가 높아지자 마음 한편에 전에 없던 생각이 싹텄다.

상대가 누구든 확실한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며 언젠가부터 안정된 플레이를 우선시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망신을 당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굳게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습관처럼 연습장에 도착했지만 필상은 클럽을 들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도전 정신이 사라졌어!”

“네?”

“나의 골프를 하지 않고 자꾸 남을 의식했다고!”

미사키는 이해가 잘되지 않았으나 반박하지 못했다. 필상의 표정이 너무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남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지금까지 그녀가 곁에서 지켜본 필상은 탁월한 실력과 불굴의 의지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그걸 잘 지켜 왔다.

굳이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자신을 반성할 이유도, 필요도 느껴지지 않는 완성형의 인간이었다.

물론 자신이 헤아리기 힘든 뭔가가 있다는 느낌은 들어 더는 채근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조용히 행했다.

하지만 필상의 넋두리는 계속되었다.

“내가 꼰대가 된 건가?”

“에이! 그건 아니죠.”

“과연 그럴까?”

오늘 필상은 셰인의 일관성 없는 드라이브 티샷을 보면서 자신은 차마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부터 했다.

자신을 응원하는 모든 팬들이 멋들어진 장타를 간절히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예 장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필드의 절대자’가 아니라 그런 칭송을 잃고 싶지 않아 안달하는 권위적인 인간, 그런 사람이 바로 꼰대가 아니던가!

나름 합리적인 판단 아래 경기를 펼쳤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모두 핑계에 불과했다. 갈 길이 멀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어느새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내 정신 봐라!”

“왜요?”

“모모코 경기 시간이 다가오잖아!”

“이제 겨우 오후 4시인데요?”

“그러니까!”

같은 목요일에 시작되지만 오거스타가 속한 조지아 주와 한국의 시차는 무려 13시간이다. 때문에 아침 9시에 티오프를 하는 모모코의 경기는 여기 시간으로 저녁 8시에 시작된다.

아직 4시간이나 남았지만 경기 전에 기쁨조 역할을 수행할 역사적 사명을 띤 필상은 얼른 짐을 챙겨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도 아예 객실로 갖다 달라고 당부했다.

“컨디션 어때?”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흐흐흐……. 괜찮다니까요.’

모모코와 먼저 통화를 시도했다.

음성에 노곤한 느낌이 실려와 채근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어젯밤 필상의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봤단다.

오늘 시즌 개막전에 출전할 선수가 밤잠을 설쳤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탓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래서 멀리서나마 열심히 응원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모모코는 같은 시간에 야마하 레이디스 오픈에 출전하는 봄에게 전화해서 격려하라는 말까지 보탰다.

그런 넉넉한 마음과 여유를 지녔다면 충분히 잘해낼 수 있으리라 판단한 필상은 차마 뱉기 힘들었으나 닭살 돋는 멘트도 아끼지 않고 길었던 통화를 마쳤다.

‘오빠?’

“그래. 나야. 넌 잠 잘 잤어?”

‘히히히……. 자긴 잤어요. 그런데 오빠 너무해요.’

자긴 잤다는 표현은 녀석도 필상의 경기를 봤다는 말이다. 너무했다는 표현이 경기 내용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해 뜨끔했으나 약하게 나가면 일방적으로 몰릴 것 같아 맞받아쳤다.

“뭘?”

‘어떻게 전화 한 통 없을 수 있냐고요!’

“아! 전화? 지금 했잖아.”

‘치! 언니가 하라고 했죠?’

“아니야. 모모코가 말하지 않았어도 하려고 했어.”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하긴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식구들이 잘 챙겨 주기 때문에 상관이 없지만 대회 출전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게 일주일이 넘었다.

연락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너도 전화 한 통 안 했잖아!”

‘나야 삐쳐서 그렇죠. 삐쳐서!’

“여하튼 경기 잘해. 긴장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너무 안이하게 생각해도 안 돼. 집중! 알지?”

‘오라버니나 잘하세요. 오늘 보니까 너무 벌벌 떨던데?’

“떨어? 떨긴 누가 떨어?”

‘아님 말고요. 근데 오거스타 내셔널이 그렇게 어려워요? 너무 몸을 사리는 것 같던데…….’

봄도 필상의 경기를 주의 깊게 본 게 분명했다.

벌벌 떨었다는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으나 그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녀석이 필상의 경기 내용을 분석한 표현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남다른 재주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골프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오빠가 부탁했다면서요?’

“뭘?”

‘필 아저씨 말이에요. 여기 시즈오카가 도쿄에서 가깝지도 않은데, 이미 한 번 다녀갔거든요. 그런데 대회 기간 내내 응원을 오겠다잖아요.’

“잘됐네.”

봄은 부담스러워 한사코 만류했다지만 미켈슨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 식구인 봄이 우승하면 TPK 일본 사업을 홍보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도움도 있을 거라며 기꺼이 지원을 받아들이라고 강조했다.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녀석의 당돌함에 당황할 미켈슨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미사키, 네 노트북도 좀 가져와.”

자신의 노트북을 호텔 TV에 연결해 롯데렌터카 여자오픈에 출전한 모모코의 경기를 대형화면으로 생생하게 관전했다.

하지만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봄의 경기 상황도 살펴볼 필요가 있어 동시에 두 경기를 관전하기로 했다. 그런데 두 방송이 모두 모모코와 봄에게 지나칠 정도로 많은 화면을 배정하는 바람에 플레이가 겹칠 때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우선순위는 모모코였다.

그런데 생각만큼 초반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필상의 경기를 보느라 잠을 설친 것도 문제지만 의외로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 되겠어. 이 대표가 지금 저기 가 있지?”

“네. 연결할까요?”

“그래.”

차라리 자신이 경기를 하거나 캐디를 보고 있다면 이렇게 애가 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꿈쩍할 수 없는 상황에서 TV만 바라보고 있노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이 대표에게 필요한 전략을 전달했지만 타박만 돌아왔다.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무슨 남자가 그렇게 호들갑이냐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진득하게 믿고 지켜보라는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아 전화를 끊은 뒤에도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와아! 하루가 또 바짝 붙였어요.”

“그래?”

경기 흐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복귀전을 우승으로 장식한 모모코보다 루키인 봄이 더 걱정스러웠는데, 봄은 전반에만 4타를 줄이며 당당히 리더 보드 최상단에 이즈카 하루라는 이름을 올렸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웃음기 하나 없는 담담한 얼굴로 동반자들의 기를 질리게 만드는 봄의 모습은 위풍당당했다.

“미스 퍼펙트라는 닉네임은 이제 우리 하루에게 붙여 줘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봐야 아직 1라운드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어. 그리고 그 닉네임은 모모코 거잖아!”

“에이. 왜 이러세요! 모모코는 이제 미스가 아니잖아요. 만천하가 다 아는 걸 미세스로 만든 사람이 부정하면 안 되죠.”

“야! 미사키.”

“왜요! 아무리 아내가 좋아도 그렇지, 하루도 프로님의 여동생이고 제자잖아요.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닌가요?”

“편애는 무슨!”

틀린 말은 아니지만 뭔가 기분이 묘했다.

둘 다 잘하면 좋지만 설사 누구 한 명이 못하더라도 그게 싫은 티를 내는 것은 적절치가 않다. 그걸 잘 알면서도 지금의 이 상황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단순히 아내가 우선이라는 것 때문도 아니며 미사키가 같은 일본인이라고 하루라는 이름을 쓰며 편을 든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어쩌면 정상에서 만날 두 여자의 미래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정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렇든 말든 미사키는 말하길, ‘미세스 퍼펙트’는 좀 진부하다며 ‘마담 퍼펙트’가 어떠냐고 물었다. 물론 더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도 더했다.

“하루의 저 모습, 거울을 보는 것 같지 않나요?”

“거울?”

그랬다.

어쩐지 낯이 익다 생각했는데 봄은 필상의 판박이였다.

포커페이스도 그러했고 동반자들의 플레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도전적인 샷을 이어 가는 당당함, 아무래도 큰일을 낼 것만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가 좀 웃으면서 하지. 저 헐렁한 바지는 대체 뭐냐고?”

“치! 뭐 어때요! 멋지고 좋기만 한데.”

“그럼 너도 그렇게 입어. 흑돈이 아주 좋다고 하겠다.”

“치, 치사하게 성호 오빠 얘기는 왜 꺼내요.”

“요새 아주 깨가 쏟아지던데?”

“네?”

“다 알고 있어. 둘이 매일 몇 시간씩 통화하는 거. 이번에 한국 들어가면 같이 여행 간다고?”

“허억!”

치사했지만 말싸움에 이길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KPGA는 지난주에 개막했다. 당당히 시드를 확보한 흑돈은 공동 5위에 오르며 루키로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축하는커녕 그것밖에 못하냐고 타박했지만 사실은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한 데뷔전이라는 것을 필상도 모르지 않았다.

다들 자신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힘든 흑돈에게 미사키가 틈틈이 큰 힘이 되어 준다는 걸 알기 때문에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들어가면 여행이 아니라 진지한 관계를 독촉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필상의 캐디 일을 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고 관계가 정립되면 흑돈도 훨씬 안정적인 투어를 뛸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와우! 굿 샷!”

“좋네, 좋아. 드디어 감을 잡았어.”

“춤이라도 추시지 그래요?”

“못 출 것도 없지!”

모모코가 11번 홀 버디에 이어 12번 홀 세컨샷도 기가 막히게 붙였던 것이다.

미사키의 농담인 걸 알면서도 필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 광경에 미사키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봄도 후반 들어 무난한 경기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KLPGA 롯데렌터카 여자오픈 - 모모코 2언더 공동 15위]

역시 한국 여자 골프는 만만치 않았다.

하기야 LPGA와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기량을 갖췄음은 이미 세계적인 전문가들도 인정한 사실이다.

게다가 대회가 열린 롯데 스카이힐 제주 CC는 늘 바람이 강하게 불어 좋은 성적이 나오기 힘든 코스로 유명하다.

그런데도 버디만 6개를 잡아 낸 임은빈 프로를 필두로 이정민, 김민선5, 이은지 프로가 -5를 기록했다. 그 외에도 세계적인 실력을 갖춘 선수들이 줄지어 모모코 앞에 줄을 섰다.

“한국 여자 투어는 너무 살벌한 것 같아요.”

“그런 정글에서 살아남으니까 세계적인 선수들이 계속 배출되는 거지.”

“그래도 모모코가 잘 해낼 거예요.”

“음……. 그래야지.”

초반에 긴장한 모모코가 후반에는 샷 감각이 살아났기 때문에 내일부터 치고 올라갈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한국 골프팬들이 그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애정도 실력이 받쳐 줘야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개막전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JLPGA 야마하 레이디스 오픈 - 이즈카 하루 -7 단독 선두]

그야말로 폭풍처럼 몰아쳤다.

보기를 2개나 범했지만 봄은 이글도 2개나 잡아냈다.

시원시원한 스윙에 도전적인 공략은 일본 팬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고도 남을 멋진 라운드를 펼쳤다.

모모코의 공백으로 빚어진 흥행에 대한 우려가 오로지 봄으로 인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신지애, 안선주, 이보미를 비롯한 베테랑 한국 선수들이 맹렬히 추격하며 그 뒤를 바짝 추격했지만 필상은 이상하게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2타 차 선두라니! 너무 멋지지 않나요?”

“내일부터는 옷 좀 예쁘게 입고 나오라고 해.”

“왜 남의 패션 가지고 그래요! 운동선수가 편하면 그만이지, 멋을 부려 어디 쓰냐고요!”

“모모코를 봐. 실력도 실력이지만 미모가 받쳐 주니까 광고도 많이 들어오고 1년을 쉬었는데도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르잖아.”

“흐! 두고 보세요. 원판 불변의 법칙은 그깟 패션 정도는 가볍게 넘길 거니까요.”

“무슨 법칙?”

“사실 모모코도 깜찍하지만 하루는 잘 뜯어보면 완전 미인이거든요. 일본 여자 같지가 않아요.”

당연하다.

모모코의 핏줄은 한반도에 있기 때문이다. 미사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굳이 그렇게 말을 했다.

아마도 자신의 주변에 있는 한국인들이 하나같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한국 남자를 좋아하는 그녀도 결국은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여자가 아니기에 불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흑돈이 투어프로로 성공하면 할수록 그녀의 불안은 커질 것이기에 본능적인 두려움의 발로일지도.

여하튼 이즈카 하루라고 불리는 봄은 단 한 라운드를 통해 기대 이상의 많은 것을 얻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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