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망설이면 늦어
-와아! 깜짝 놀랐습니다.
-벙커에 빠질 것 같았습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3번 우드로 가볍게 300야드를 넘기는 저 강력한 파워,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제가 볼 때는 저 샷도 풀스윙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략 90% 정도의 힘을 가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90%요?
풀스윙이 아니라는 것에 탄성을 터트렸지만 둘 다 틀렸다.
필상은 80%의 힘만 썼을 뿐이다. 드라이브를 버리고 우드를 선택한 이유는 오거스타 내셔널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파3 홀을 제외한 각 홀의 티 박스에 서면 시야가 확 쪼그라든다. 좌우에 우거진 나무들이 워낙 높게 자라 마치 협곡 초입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하군요!”
“고맙습니다. 마이크.”
“캐나다에는 와 본 적이 있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가 캐나다 출신인 것은 알고 있지만 투어프로로 활동하며 적잖은 성공을 거둔 이들은 거의 미국에서 생활한다.
게다가 셰어가 티샷을 하는 아주 짧은 시간에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나 일단은 호응을 했다.
“아쉽게도 아직 캐나다는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나도 한국을 가 본 적이 없으니 피차일반이군요. 하지만 지금은 가고 싶은 나라 1순위에 한국을 올려놨습니다.”
편안한 인상이지만 이런 얘기를 꺼내는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그저 호감을 느끼는 정도일 뿐.
“저도 기회가 되면 캐나다를 가보고 싶습니다. 무척 살기 좋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하지만 내가 한국을 가고 싶은 이유는 그저 살기 좋은 나라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뭔가 구체적인 말을 꺼내면 좋으련만 그는 애매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나쁜 의도가 있기보다는 말하기가 껄끄러운 화제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감이 왔다.
“혹시 코리안 투어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물론 관심이 있습니다. 지근거리에 JGTO도 있고 아직 기운이 남아 있을 때 프로 생활의 말년을 보다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뭔가 석연치 않았다.
캐나다 출신인 그가 PGA가 아니라면 자국 투어가 미미한 캐나다보다는 유럽 투어가 다음 순위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물론 생활환경도 편안할 테고 그 밖의 장점이 많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인 대화를 해 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셰인이 티샷을 마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결과는 좋지 못했다.
-어허! 아까는 우타가 나더니 이번에는 좌타가 났네요!
-좌측 도그렉 홀이라 드로우 샷을 구사하려고 한 것 같은데, 스윙 궤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업라이트 스윙을 하면 인 아웃 궤적을 만들기가 힘들죠!
-그런데 왜 드로우 샷을 구사하려고 한 거죠? 그의 드라이브 평균 비거리는 300야드 안팎에 불과합니다!
체구나 체격만 보면 400야드도 때릴 것 같지만 실제 그의 기록은 PGA 평균치를 조금 넘을 뿐, 크게 웃돌지 않는다.
때문에 자료를 확인한 임 캐스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성토했다. 1번 홀의 실수가 없었다면 모를까!
300야드 안팎을 날릴 것 같으면 좌측으로 휜 홀의 모양과는 상관도 없다. 적어도 350야드는 날아가야 도그렉 홀의 우측으로 밀려 러프나 숲에 들어간다.
그런데 어림도 없는 거리를 보내면서 대체 왜 장타를 고집하다 실수를 연발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필상은 대충 감을 잡았다.
육중한 몸을 지녔지만 훈련의 흔적이 역력했다. 2019년 2승, 작년에도 1승을 추가한 그는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최고 선수의 반열에 들 것이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멘탈이 저런데도 어떻게 탑 랭커인지 모르겠어요.”
“그만큼 재능이 뛰어나다는 거지.”
“그래도 투어를 뛰기에는 너무 몸이 비대하지 않나요?”
“선입견이야. 물론 살을 빼서 더 나은 스윙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빼야겠지. 하지만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유지해 온 체형의 인위적인 변화는 위험해. 그냥 놀고먹으면서 저 체형이 된 게 아니라면.”
운동선수는 꼭 필요한 근육이 아니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투어프로의 체형에 대한 필상의 생각은 통상적인 개념과 달랐다.
인위적이든 피치 못한 상황이든 급속한 체형의 변화를 겪고 성공한 선수는 없다. 골프가 그저 힘만 필요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기야 펑 샨샨을 보면 그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골프는 아주 민감한 운동이거든. 파워보다는 집중력, 자신감 같은 심리적 안정감이 더 중요해. 오랫동안 익숙한 자신만의 감각이 사라진다면 신들린 샷은 나올 수가 없지.”
“아!”
아마추어의 시선에는 프로들이 모두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 우승하는 선수는 하늘이 점지해 준 것 같은 묘기를 연출한다.
본인도 소름이 끼칠 기기묘묘한 샷이 터져야 겨우 우승 가시권에 도달할 수 있는데, 남의 몸처럼 느껴지는 체형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세월에 따른 변화에 대처 못하고 정체되는 것도 문제지만 급격한 변화 또한 프로 선수들에게는 치명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저 아저씨 너무 엉망이잖아요.”
“그건 몸이 비대하기 때문이 아니고 지나친 기대 때문일 거야.”
“기대라니요?”
“내가 볼 때 저 친구는 요즘 연습을 많이 한 것 같아.”
“연습을 많이 한다고요? 미스 샷이 자꾸 나오는데요?”
“근육을 키워 보다 파워풀한 스윙을 원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저렇게 마구 때려 대지.”
“헛고생을 했다는 건가요?”
“응. 노력은 가상하지만 파워보다는 차라리 스윙 스피드를 올리는 데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나았을 거야. 무거운 덤벨을 들어올리기보다는 차라리 러닝을 하는 게 낫지.”
스윙 스피드는 힘이 좋다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선까지는 근접하지만 프로들의 경우에는 세게 때리려고 할수록 오히려 스피드는 반감이 된다.
때문에 살은 빼기 싫고 유산소 운동도 원지 않았던 셰인은 짐에 틀어박혀 근육을 키우는 데 만족했다. 보기는 좋을지 몰라도 헬스클럽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보디빌더가 아니다.
물론 근육이 많아진 그가 정타를 때릴 경우, 기존에는 보낼 수 없었던 비거리를 보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습장과 실전의 차이는 현격하다.
느긋하게 쉬면서 연습하는 것과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경쟁자들과 함께 치고받는 상황에서는 지금처럼 치명적인 실수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상대를 잘못 만난 거네요!”
“난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하하하.”
셰인이 숲에서 해매는 사이 마이크의 깔끔한 세컨샷이 이뤄졌다. 282야드가 남았으나 그린에 올릴 생각은 애초에 없었을 뿐더러 조금이라도 가까이 붙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7번 유틸리티로 칩샷 하기 가장 좋은 페어웨이 정중앙을 노렸고 242야드를 보낸 그는 버디를 위한 최적의 위치를 확보했다.
272야드를 남긴 필상은 아예 4번 아이언을 잡았다. 19도 유틸리티로 충분한 거리지만 핀 앞을 가로막은 벙커를 넘길 경우, 공을 그린에 세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핀이 중앙이라면 노려 볼 만한데, 좀 아쉽네요.
-현명한 선택입니다. 첫날부터 무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첫날이기 때문에 오히려 보다 도전적인 샷을 해도 되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게 그러지가 않습니다. 팬들께서는 멋진 역전 우승도 염두에 두시겠지만 쭉 이어 온 좋은 페이스를 스스로 해칠 이유는 없습니다.
-아! 그렇기는 하네요.
셰인은 또다시 레이 업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방향이 그린 가까이로 트여 240야드를 남긴 그는 3온에 도전했지만 너무 길었던 타구는 그린을 맞고 뒤로 흘렀다.
“먼저 하시죠.”
“오케이.”
마이크와 필상의 3번째 샷은 거의 비슷한 거리가 남았다.
그냥 먼저 샷을 해도 무방하지만 필상은 마이크에게 양보했다. 좋은 샷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거리에서는 실전 심리상 먼저 샷을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물론 필상은 더 잘 붙일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한 클럽도 되지 않는 지점에 쩍 붙이자 곧바로 샷을 할 수는 없었다. 은근한 부담감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타임 숨을 고르며 연습 스윙을 몇 차례 더 했다.
‘이 양반 오늘 날 잡았군!’
독하게 집중했으나 백스핀이 너무 많이 걸린 탓에 마이크보다 조금 더 먼 거리를 남겼다. 자신의 신장과 비슷한 2야드.
마크하고 물러나는 필상은 오늘 하루가 편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느껴져 집중력을 더욱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셰인은 4온에 성공했으나 아까처럼 바짝 붙이지 못했고 2퍼팅으로 또다시 보기를 적어 내 2오버로 한 발 더 쳐졌다.
필상은 차분하게 라이를 확인하고 이번에는 정확한 경로를 통해 버디를 잡아냈다. 이 정도 거리는 거의 실수한 적이 없지만 이걸 놓치면 심리적인 압박감에 쫓길 가능성이 높았다.
-버디! 드디어 공 프로가 언더로 접어들었군요.
-네. 마이크가 연속 버디로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신경 쓰지 말고 차분하게 자신의 플레이를 이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셰인처럼 와르르 무너지지 않는 그가 있어 공 프로에게는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아 괜찮다고 생각됩니다.
1라운드 진행은 그런 분위기가 끝까지 지속되었다.
필상은 끝내 장타를 선보이지 않았고 팬들은 그 점을 가장 아쉬워했다. 하지만 장타를 마구 휘두른 셰인이 내내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8오버를 기록하는 광경을 생생히 지켜봤다.
그 와중에 장타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4언더면 만족할 만한 성적은 아니죠?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특유의 주도적인 경기력이 나오지 않은 점이 더 아쉽습니다. 어떤 동반자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된 하루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소극적인 플레이를 한 것 아닌가요?
-뭐라고 딱 집어 표현하기 어렵지만 서로 상반된 동반자 두 명 사이에 끼인 형국이 낯설었던 것 같습니다. 셰인의 실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마이크의 정확한 공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장타는 셰인이 앞을 가로막았고 정교한 샷은 마이크가 선점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는 말씀 같은데, 평소 공 프로의 실력이나 집념을 고려하면 너무 아쉬웠던 라운드였습니다!
임한석 캐스터의 말에 많은 팬들이 공감했다.
필상이 첫날부터 확실하게 압도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인데, 사실 마이크의 6언더나 필상의 4언더가 큰 차이는 아니다.
형편없이 끌려다니지도 않았고 경기 흐름을 놓친 것도 아니며 기회가 찾아오면 여지없이 칼을 빼 들어 버디를 잡았다.
다른 선수들의 성적이 나오면 쉽게 비교가 되겠지만 나쁘지 않은 흐름이라 판단한 필상은 그 흐름을 역행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하게 실전 감각을 유지하며 아직은 낯선 코스를 분석하는 것에 만족했다.
중계진이 보는 것처럼 심각한 문제가 아니건만 당사자보다 오히려 지켜보는 사람들의 관심과 걱정이 더 큰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셈이다.
‘용케도 잘 버티더군! 하하하!’
“버티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타이거.”
‘그래도 무척 낯설어하는 것 같던데?’
“그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오늘 경기 흐름이 다소 기이했고 생각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하하하!”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타이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샤워하려던 차에 그의 번호가 뜬 걸 확인한 필상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받았다.
지구 반대편의 태국은 오밤중인데, 실시간 중계를 시청한 그가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경기를 지켜본 그가 적절한 조언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아 고마운 마음에 심신의 피곤이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쌩쌩한 필상의 음성을 확인한 그는 안심했다며 끊으려 했다. 지금 필상에게 필요한 것은 백 마디 말보다 편안한 휴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샤워를 미룬 필상은 라커룸 구석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거금을 줘도 살 수 없는 그의 소중한 경험담을 듣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기 때문이다.
-6 마이크 위어, 더스틴 존슨
-5 브룩스 코엡카, 웹 심슨, 리키 파울러, 토니 피나우
-4 공필상 외 4명
4언더를 기록한 필상은 공동 6위였다.
결국 마이크가 신들린 하루를 보낸 것이지 필상이 못 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명백했다. 첫날이라서 괜찮았지만 만약 최종 라운드애서 이런 상황을 맞이했다면 대응 방식은 달라져야만 한다.
장타의 함정과 정확한 샷의 한가운데 놓여 어정쩡한 플레이를 이어 간 것은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 타이밍에 치고 나가야 좋았는지 복기가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경기를 마치고 마이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망설이면 늦어. 내일부터는 눈을 가리고 경기하게!’
그때는 그 말이 승자의 여유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상황을 검토하고 타이거의 조언까지 더해 내린 결론은 자신이 경기 중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신중한 것과 망설이는 것은 다르다.
언제 치고 나갈지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 샷에 대한 자신감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심리 상황에서는 절대 샷 결과가 좋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 짓을 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마이크 위어는 천하의 필상을 상대로 심리적 우세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온화하고 후덕한 자세, 그리고 조곤조곤한 필상과의 대화를 통해 그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자신이 원하는 경기를 펼치기 위해 강자인 필상과의 유연한 관계를 설정한 것인데, 그걸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바라본 자신은 셰인을 보험으로 여기며 몸을 사리는 경기를 펼쳤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