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유리 그린
-조 편성이 아주 특이하군요.
-전성기가 지난 마스터 마이크 위어, 누가 봐도 장타를 마구 뽐낼 것 같은 거구의 셰인 로리, 어찌 보면 쉬운 상대들로 보이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을 놓을 수 없다니요? 필드의 절대자라는 칭호를 듣는 공 프로입니다. 너무 싱겁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만.
-마스터즈에 출전한 선수들은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실력을 지녔습니다. 4일 내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는 어려워도 한 번 불이 붙으면 얼마든지 하루 이틀은 선두권으로 치고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봐야할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경기 초반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 그다지 기껍지는 않았다. 물론 허 위원은 초반 공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언급이었을 테지만 시작부터 초를 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필상에 대한 신뢰가 워낙 거대하기에 오밤중에 잠도 자지 않고 실황 중계를 시청하는 한국 팬들은 TV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필상을 소개하는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를 들으며 여자 골프에 이어 이제 남자 골프도 세계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자부심에 뿌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필상을 응원했다.
“세계 랭킹 1위! 미스터 퍼펙트! 필드의 절대자! 이번 대회를 우승하면 데뷔 2년도 되지 않아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될 한국 출신의 무시무시한 투어프로. 공 필상!”
현장을 찾은 패트런들은 물론 TV 앞에 앉은 시청자들도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쳐 댔다. 한국의 한 아파트에 사는 골수팬은 다른 동에서도 일제히 들리는 환호성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베란다에 나가 ‘공 프로 파이팅!’을 외쳤다.
오밤중에 이게 대체 무슨 고성방가인가 싶었으나 마치 파도를 타듯이 다른 동에서도 같은 외침이 메아리쳤다.
골프는 개인 운동이지만 나라가 어수선한 시기를 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똘똘 뭉친 저력은 응원에서도 나타났다.
-하하하! 더 이상 멋진 소개말은 없을 것 같군요.
-무시무시하다! 저는 그 단어가 귀에 확 박혔습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멘트에서 인정하듯, 우리 공 프로의 실력은 확실히 비교 우위에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이제 한 홀 한 홀 멋진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본격적인 중계를 시작하겠습니다. 4시간이 넘길 이 중계 방송을 끝까지 함께해 주시기를 바라며 여러분도 공 프로와 경쟁자들의 스코어 카드를 직접 작성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 우리 공필상 프로가 드라이브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로 당당히 올라서고 있습니다!
“드디어 시작인가?”
내내 평온하던 필상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타이거와 미켈슨 덕분에 준비도 완벽하고 스윙에 대한 확신도 있지만 막상 첫 샷을 하는 기분은 아주 오묘했다.
지금 자신이 역사를 써 내려 가고 있다는 사명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초에 구상했던 장타를 포기했다.
스스로 자신의 상태가 완벽하지 않다고 판단되기에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페어웨이를 정확히 둘로 가른 필상의 타구는 도그렉 홀의 좌측 끝까지 데굴데굴 굴러 러프에 빠지고 말았다.
실망스러웠으나 오히려 거기에서는 그린이 환하게 열려 있어 나쁜 결과라고는 할 수 없었다.
-1번 홀은 445야드 파 4홀이죠?
-네. 핸디캡 13번으로 랭크되어 있지만 핀의 위치나 날씨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지는 홀이기도 합니다.
-날씨는 더없이 좋고 핀도 무난한 중핀인 걸 보면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은 대회의 첫 홀이라는 부담감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과거의 기록을 보면 첫날은 대략 4.26타까지 기록되었지만 점점 낮아져 최종라운드는 3.95로 확 떨어집니다. 라운드를 거듭할수록 안정감을 찾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305야드만 나가면 좋았을 텐데, 정말 가볍게 때렸는데도 328야드나 나가버리네요. 그래도 퍼스트 컷이라서 별문제는 없겠죠?
-네. 저 정도 위치라면 무난히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리라 봅니다.
1번 홀은 300야드를 넘어서면 오른쪽으로 살짝 꺾이는 도그렉 홀이다. 꺾인 포인트의 우측에 지저분하게 생긴 벙커가 위치해서 멀리 보내고자 하는 선수들을 위협한다.
필상은 마음을 비우고 가볍게 공략했으나 생각보다 강했던 타구가 러프로 기어들어 가자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타석은 마이크 위어 차례였다.
비교적 아담한 체구에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굉장히 빠른 리듬의 강력한 스윙을 선보였다.
“음! 날씬해서 그런가? 저렇게 빨리 치는데도 의외로 부드럽네요.”
“몸에 힘을 뺀 스윙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군.”
“그런데 비거리는 별로인데요?”
“저 사람 나이가 몇인데! 쉰이 넘었어.”
“필이랑 동갑 아닌가요? 그분에 비하면 양반이죠. 호호호.”
마이크가 그런 스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정말 강하게 때리는 것 같은데도, 그의 비거리는 안타깝게도 300야드에 미치지 못했다. 날로 전장이 길어지는 투어의 최근 추세를 감안하면 짧은 티샷은 곤란하다.
아이언샷의 정확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렇게 빠른 리듬을 유지하면서 얼마나 페어웨이를 지킬 수 있느냐는 것인데, 체력의 한계까지 덮치면 정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도 페어웨이를 잘 지킨 그에게 시야와 라이가 좋은 150야드 세컨샷이 남아서 버디 기회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문제는 마지막 주자로 나선 셰인이었다. 드라이브를 들고 올라간 그는 빈 스윙부터 요란했다.
쉬익! 쉬이익!
“저러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곤란한 정도가 아니지. 차라리 이번 홀에서 망가지는 게 나아. 최소한 남은 홀에서 과욕을 부리지는 않을 테니까.”
“혹시 모르죠. 오늘이 신 내린 날인지도…….”
미사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무지막지한 티샷이 발사되었다. 그런데 타구를 끝까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정타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타격 소리에서부터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본인도 당황했는지 우측으로 악성 슬라이스가 난 타구는 보지 않고 애꿎은 드라이브 헤드를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아플 텐데요?”
“아픈 건 주먹이 아니라 가슴일 거야.”
“프로님을 상당히 의식하는 것 같아요. 우린 생각도 하지 않는데. 흐흐흐.”
“이빨 보이지 마. 안 그래도 성격이 좋아 보이지 않던데.”
“아! 네.”
대답은 바로 했으나 미사키는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까운 거리에 있던 셰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것이 그녀의 행동과 무관지 않았다.
눈치가 보인 필상은 얼른 앞장서서 걸었다. 무거운 골프백을 매고 졸졸 쫓아오는 미사키는 뒤통수가 따가웠을 것이다.
-확실히 골프는 상대성을 지닌 운동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냥 사전에 준비한 자신의 플레이에만 집중하면 그만인데, 막상 실전에 나서면 그게 잘 컨트롤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강한 상대를 만나면 묘한 경쟁력이 고개를 쳐듭니다.
-고개를 쳐드는 것은 이래저래 안 좋은 거군요. 하하하!
-지금이라도 셰인은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대회를 시작하는 첫 홀부터 무리수를 둔 것은 공 프로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타를 때리지 않고 잘라 가는 걸 보고 보란 듯이 날려 버리려고 한 거죠?
-설사 350야드에 이르는 멋진 샷을 만든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습니다. 버디를 하든 못하든 이후 꼭 필요한 경우에 공 프로가 장타를 칠 경우, 그는 힘이 더 들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런 얘기는 셰인의 캐디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공을 찾으러 숲으로 들어가는 그의 답답한 태도에 오늘 첫 라운드가 수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동반자가 무너지면 상대적인 우위를 점한 선수가 좋은 샷을 할 것 같지만 실전의 결과는 그렇지가 않다.
미스 샷이 전염병처럼 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상은 독하게 이를 악물어야 했다.
셰인의 타구는 단번에 꺼낼 수 없는 위치였다. 테이크백이 나무에 걸려 일단 방향을 틀어 시야가 트인 곳으로 보냈고 거기서도 다시 그린에 올릴 수는 없었다.
“나이스 샷!”
149야드에서 8번 아이언을 잡은 마이크는 명품 컨트롤 샷을 선보였다. 티샷과는 달리 굉장히 부드러운 스윙은 필상이 봐도 아름다웠다.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3.5야드 버디 찬스.
필상의 ‘나이스 샷’ 소리를 들은 그가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필상의 칭찬에 기분이 좋은 듯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마치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러느냐’ 그런 제스처였다.
세인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필상은 정신을 가다듬고 세컨샷 준비에 돌입했다.
“125야드에요.”
“피칭 줘.”
“러프가 좀 질긴 것 같아요.”
“응. 서로 엉켜서 10% 정도는 더 봐야 할 것 같아.”
필상도 멋진 컨트롤 샷을 선보였다.
하지만 타구는 생각보다 짧았다. 러프마다 다 같은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굿 샷!”
“저 정도는 굿 샷이 아니죠!”
“5야드? 넣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은데?”
“여기. 퍼팅이 쉽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옆 라이라서…….”
마이크는 필상이 퍼팅 실력까지도 최상위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상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오거스타는 조금의 실수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다리미로 꾹꾹 눌러 다려 놓은 것처럼 딱딱한 그린은 정확함만을 요구한다. 꼭 넣겠다고 과감한 퍼팅을 하면 영락없이 3 퍼팅이 찾아온다.
또한 지나치게 부담을 가지면 터무니없는 짧은 퍼팅이 나와 스스로 전투력을 말살시키기 때문에 ‘퍼팅이 돈!’이라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대회라고 할 수 있다.
두 선수가 나란히 버디 기회를 맞이한 가운데 셰인의 네 번째 샷이 이뤄졌다. 상심이 커 또다시 미스 샷이 나오면 어쩌나 싶었지만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그나마 칩샷은 프로답네요.
-하하하. 프로 맞습니다. 그것도 2009년 데뷔 이래 최근 10년간은 세계 랭킹 100위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는 PGA 정예 멤버입니다.
-하기야 그 엉터리 티샷을 하고도 4온 1퍼트로 보기를 기록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긴 하네요.
-바로 그겁니다. 실수해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리커버리 능력, 그게 없다면 이 살벌한 정글에서 버틸 수가 없습니다. 좋았던 이번 칩샷을 통해 안정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 그의 현재 세계 랭킹은 20위로 마이크보다 훨씬 높습니다. 기량이 무르익었다는 평가도 있는 걸 보면 이제라도 자신의 플레이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필상의 기량에 대한 신뢰가 워낙 두텁기 때문일까?
한국 중계진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필상의 버디 퍼팅이 홀컵을 외면하자 애써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말이 많아졌다.
-역시 오거스타 내셔널의 유리 그린답네요. 저렇게 라이가 많이 먹을 줄은 몰랐습니다. 볼 하나 정도는 더 봐야 했다는 건데, 경사를 읽기도 어려울뿐더러 힘 조절까지……. 여하튼 이번 퍼팅은 무척 아쉽네요.
-우리 공 프로의 퍼팅 감각은 감히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적응을 끝냈으리라 봅니다. 다만, 첫 홀이라서 무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죠? 어허! 정말 기가 막히네요!
첫 홀의 부담감을 이야기하는 동안 마이크가 퍼팅을 했다. 그런데 방금 전의 해설이 무색하게도 그의 퍼팅은 정확한 방향과 스피드로 홀컵에 빨려 들어갔다.
버디, 누가 뭐래도 이번 홀의 승자는 마이크 위어였다.
쉽지 않은 홀에서 타수를 줄인 마이크는 보무도 당당하게 다음 홀로 이동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필상의 마음도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잔뜩 인상을 쓴 셰인보다는 나았다.
정확한 칩샷으로 핀에 붙여 1퍼팅으로 마무리한 그가 평정심을 되찾지 못하게 만든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2번 홀은 전반에 만나는 가장 쉬운 홀 중에 하나다. 575야드의 파 5홀, 좌측으로 휜 도그렉 홀이라서 이글은 쉽지 않지만 버디는 파와 비슷한 개수로 나타난다.
-우리 공 프로에게는 기회의 홀이죠?
-그렇습니다. 작년에는 나흘 내내 이글이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공 프로의 장타라면 아이언으로도 2온을 노릴 수 있으니,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제 필상은 연습 라운드 때 2온에 성공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린이 까다로워 이글은 잡지 못했는데, 2온 공략을 구상한 것은 맞다.
필상에 앞서 티샷을 한 마이크는 이번에도 297야드만 보냈다. 너무 과하다 싶을 만큼 빠른 스윙을 하면서도 정확성을 유지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드라이브를 들고 있던 필상이 클럽을 교체했다.
-뭐죠?
-3번 우드네요. 드라이브를 잡지 않을 경우에는 웬만하면 유틸리티를 선호하는데, 이번에는 거리와 방향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냥 시원하게 한 방 날려 주면 좋았을 텐데, 역시 첫날은 안전하게 가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잘라 가도 버디를 할 수 있다면 굳이 드라이브를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확신이 설 때까지는 안전한 공략을 하는 것이 현명한 겁니다.
-자! 3번 우드로 얼마나 보내는지 함께 지켜보시죠.
3번 우드를 잡았는데도 중계진은 비거리에 관심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리를 확보할 의사가 없다면 유틸리티를 선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이크 위어의 드라이브 거리까지는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총알처럼 쏘아진 타구는 도무지 하강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지루하다 느낀 미사키가 필상의 의도를 확인했다.
“얼마나 치신 거예요?”
“300야드.”
“흐흐흐. 300이요?”
“그래야 그린이 보일 것 같아서.”
필상의 3번 우드 티샷은 무려 306야드를 기록했다. 하마터면 페어웨이 벙커에 들어갈 뻔했으나 다행히 공은 벙커 바로 앞에 멈췄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