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마스터
‘지금 잠이 와요?’
“왜?”
‘헐! 다 봤다고요!’
“뭘 봤는데?”
모모코가 왜 뿔이 났는지 모르지 않는다. 오늘 필상과 이방카의 파3 콘테스트 우승은 기자의 입맛대로 쓰였다.
어떤 이는 보기 드문 멋진 승리라고 표현한 반면, 불순한 자는 선남선녀가 만들어낸 멋진 경기를 선정적으로만 다뤘다.
필상의 탁월한 외모는 실력에 가려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방카의 패셔너블한 모습과 어우러져 찍은 사진마다 화보였다.
그중에 필상이 그녀를 지도하며 본의 아니게 터치하기도 했는데, 악마의 편집은 강한 자극을 원하는 족속들을 만족시키고도 남았다.
‘저 오늘 밤 비행기 타고 갈 거예요!’
“어딜?”
‘어디긴 어디에요! 오거스타 거기죠!’
모모코가 뭘 봤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갔다. 대회를 앞둔 사람은 필상만이 아니다.
그녀도 KLPGA 개막전을 코앞에 두고 있다.
올 시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모코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모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필상도 곤혹스러웠다.
앞에 있다면 그냥 포근하게 안아 주면 그만일 텐데,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해야만 했다.
“모모코.”
‘…….’
“여보!”
‘왜요?’
“나 당신을 사랑해. 당신만을 사랑한다고.”
‘…….’
한동안 전화기 저 편에 침묵만이 깊이 가라앉았다.
필상도 잠시 숨을 골랐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필상은 영상통화를 눌렀다.
닭살 돋는 것 같아 좀처럼 얼굴을 마주한 통화는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내가 꼭 보고 싶었다.
문제는 모모코가 영상 통화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당황스러웠다. 설마 이렇게까지 삐쳤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늘 믿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던 그녀가 아니던가!
“모모코. 나 당신 보고 싶어.”
‘저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지금은 안 돼요.’
“왜?”
‘나 지금 펑펑 울어서 얼굴이 엉망이라고요.’
“괜찮아. 나 당신 남자잖아.”
‘흐으으으…….’
사랑한다는 말에 한 줌 풀어진 모모코는 당신 남자라는 말에 특유의 미묘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대체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제 대화가 될 것 같았다.
“얼른 영상 통화 허락해. 정말 당신 보고 싶다고.”
‘흉보지 않을 거죠?’
“당연하지. 당신은 언제나 내게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야.”
‘크흐흐…….’
특유의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의 영상이 떴다.
그런데 방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을 만큼 모모코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화장을 지우지 않고 울었는지 얼룩말이 따로 없었고 눈가는 퉁퉁 부어 피에로를 연상케 했다.
카메라를 너무 가까이 댔기 때문에 더 리얼한 자신의 모습에 모모코도 깜짝 놀랐는지 얼른 화면을 회피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다. 대체 내가 뭐라고 저 어리고 깜찍한 여자가 이런 모습이 되었단 말인가!
“모모코. 당신이 걱정할 아무런 일도 없었어. 이방카는 우리와 함께 사업을 하고 싶어 하는 파트너일 뿐이야.”
‘잠깐만요. 제가 다시 전화 걸게요.’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이전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필상에게 너무 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 더 마음이 쓰였던지 얼른 전화를 끊었다.
다짜고짜 통화가 끊기자 필상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을 고려한 필상은 이제 한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에 그녀가 다시 연락하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그 사이 필상의 핸드폰은 난리가 났다.
‘너 정말 왜 그래?’
한결 같은 이런 반응은 누나들이었다. 겨우 설득했지만 엄마의 비난은 누나들의 표현보다 더 강렬하고 원색적이었다.
‘이런 나쁜 놈! 얼른 짐 싸서 돌아와!’
“엄마. 그게 아니라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든지 엄마는 아들 편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됐고. 당장 비행기 표부터 알아 봐. 여시 같은 그 년, 이름이 뭐더라? 여하튼 며늘아기가 친정으로 가기 전에 돌아와.’
엄마를 설득하는데 한참 걸렸다.
그래도 완벽한 설득이 되지 않은 것은 바람기가 심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 * *
가족들의 염려와 이 대표의 우려까지 잠재우느라 정말 힘들었다. 그나마 30분 후에 다시 영상 통화를 한 모모코의 마음을 안정시킨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도 필상을 믿지만 너무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것이 차곡차곡 불안감을 키운 것 같아 이번 대회를 마치면 무조건 귀국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잠을 청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번잡해 필상은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명상에 들었다. 모든 것을 털고 참선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무아지경에 이르자 자신에게 닥친 모든 관계와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가족이기 때문이야!’
이번 일을 계기로 깨달은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가족의 소중함이었다. 즉흥적인 반응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앞섰으나 그게 다 믿음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는 가족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남이라면 간섭할 이유도 원망할 까닭도 없다.
오히려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볼 것이다.
또한 이런 상황을 발발시킨 언론이 어디고 기자가 누군지 꼭 찾아내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다는 생각도 버렸다.
비 온 뒤에 더 굳어질 가족의 완성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럴 여력이 있다면 한시라도 더 가족에게 나눠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 *
-드디어 ‘더 마스터즈’가 개막되었습니다!
-완연한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화창한 날씨, 바람도 아주 선선하게 불어 필드에 나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죠?
-그렇습니다. 올 시즌 첫 번째 맞이하는 골프의 제전을 경축하는 듯 아주 맑은 날씨가 허락되었습니다. 이런 쾌적한 시간에 티오프가 배정된 것도 공 프로의 그랜드슬램 달성에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8시 52분, 2조로 편성되었더군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아주 흥미로운 프리뷰가 하나 떴더군요.
-흥미로운 프리뷰라니요?
대회를 앞두면 우승자를 예측하는 많은 기사들이 뜬다. 매번 이뤄지는 일이지만 이번 예측들은 유난히 필상에 대해 집중적인 조명을 했기 때문에 다들 관심을 두고 봤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새로 뜬 기사를 확인하지 못한 허 해설위원은 임 캐스터에게서 대체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이번 시즌 필상은 미국에 건너오자마자 3연승을 거두며 절대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였건만 어이없게도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거스타가 첫 방문자에게 야박하다는 통계를 근거로 뒀는데, 그렇게 따지면 아직은 루키라고 할 수 있는 필상의 성적은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
거의 매번 처음 가는 코스에서 결과를 냈기 때문이다.
-스포츠 베팅업체들이 담합을 했다고 합니다.
-담합이라니요? 베팅업체들의 속성이 원래 그렇지 않나요?
-그건 손해를 보지 않았을 때 통하는 얘기입니다. 지난 번 WGC 델 테크놀로지 대회에서 대부분의 업체들이 막대한 손해를 봤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전문가의 예측도 무시한 채 우리 공 프로에게 베팅을 했기 때문이라네요!
-손실을 보지 않기 위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지 않나요?
-일단 면밀하게 분석한 뒤에 발표된 배당을 중간에 바꿀 수 없는 업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도 아니면 모인 셈이지요. 그런데 다른 선수에게 베팅한 사람들도 거의 공 프로에게 조금씩은 베팅을 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보험을 든 겁니다.
일단 전체 베팅을 마무리하고 배당을 정하는 시스템도 있다. 업체는 소정의 수수료만 떼기 때문에 손실 날 수가 없다.
하지만 전문가 집단의 판단하에 사전에 배당을 정한 업체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들이 필상의 우승에 배당한 확률은 거의 3배당 안팎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체 배팅을 마치고 정리한 업체에서 나온 배당이 2배밖에 되지 않았기에 대회가 시작된 이후 스포츠 베팅업체들은 엄청난 속앓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필상이 우승하지 못하면 상당한 이익을 보지만 우승하면 이익의 몇 배에 해당되는 손실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취약하다는 매치플레이에서 당당히 우승을 거두며 업체의 사활이 흔들릴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이다.
-담합이라면 배당을 낮춘 겁니까?
-네. 기자가 추적한 내용을 보면 본래 정했던 배당은 3.2배였는데, 너무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모든 업체들이 그걸 일괄적으로 낮추는 비열한 작업을 했다는군요.
-그게 가능한가요? 어차피 경쟁인데.
-경쟁도 살아남아야 할 수 있는 거니까요!
-하하하! 그래도 2.5배당이 터지면 상당한 타격이 있을 텐데요.
-그렇습니다. 부정적인 분석이 많았음에도 사람들은 우리 공 프로에게 베팅을 했답니다. 과거에 한 번도 스포츠 베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대거 몰리면서 업체들이 꼼수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쳤다고 합니다.
-꼼수라니요?
-다시 보험을 들고자 했는데, 세계적인 보증보험회사들도 다 두 손 두 발을 들었다고 합니다.
필상이 우승하면 여러 회사가 망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베팅이 몰렸기 때문에 큰 리스크에 상반되는 엄청난 이익을 볼 수도 있다.
그나마 손실을 줄이려고 업체들끼리 담합해 배당 조정까지 했는데도 사람들의 선택은 필상에게 확 쏠렸다.
때문에 기사의 말미에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걱정하는 언급도 나왔다. 파산을 면하기 위해 인위적인 가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정상적이지 않은 내용에 모두 웃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돈 앞에 치사해지는 군상들의 비열함은 그 끝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골프 경기는 수만 명의 갤러리들이 선수와 가깝게 따라다니며 지켜보기 때문이며 특히나 더 마스터즈의 생중계를 지켜보는 사람의 수는 1억 명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미치지 않고는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겠나!
-그래도 주최 측에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 같군요.
-네. 보안요원은 물론 경찰의 지원도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정도 대비는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더 상세하게 언급하고 싶어도 그런 내용 자체가 시청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지 않기에 적당히 자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필상이 1번 홀로 이동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34개 조 중에서 두 번째로 나서기 때문에 카메라가 한가하기도 했으나 이동 장면까지 담는 것은 파격이었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는 대회의 시작점이라 긴장할 만도 하건만 담담한 태도를 유지한 필상은 팬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보이며 당당하게 걸어갔다.
“휴우! 드디어 시작이네요.”
“샷은 내가 할 텐데, 네가 왜 긴장하고 그래?”
“그러니까요!”
필상보다 미사키가 더 긴장했다.
아니, 필상이 너무 담담했기에 필상의 몫까지 다 가져온 것만 같았다. 무거운 골프백을 매고 있지만 그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보다 못한 필상이 골프백에 넣어 뒀던 텀블러를 꺼내 따듯한 차 한 잔을 따라 그녀에게 건네줬다.
“죄송해요.”
“아니야. 네가 긴장하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상대적으로 더 편안한 것 같아.”
“얼른 진정할게요.”
그게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인가!
필상은 한두 홀 지나면 자연스럽게 풀어질 것이라고 봤다. 평소에는 전혀 그렇지 않던 미사키였기에 이 대회가 가지는 부담감을 그녀를 통해 간접적으로 실감한 측면도 있다.
필상은 동반자들이 속속 도착하자 먼저 다가가 인사하며 악수를 청했다. 3인 1조로 플레이할 동반자 중에 먼저 나타난 선수는 캐나다 출신의 마이크 위어였다.
“반갑습니다. 마이크.”
“‘필드의 절대자’와 한 조가 되어 영광이로군요.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하하하.”
“한 수 배운다는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나이대접을 해 주는 선수는 드문데, 여하튼 고맙습니다.”
겸손 모드의 마이크 위어는 미켈슨과 동갑인 1970년생이다. PGA 통산 8승을 거뒀고 그 외의 대회에서도 9승을 보탰는데, 2001년 모두의 예상을 깨고 투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한 그의 가장 인상적인 경기는 역시 2003년 이 대회 우승이다.
“마스터라는 호칭은 프로 골퍼에게 평생 남는 자랑스러운 훈장 아닙니까!”
“내가 우승할 당시의 나이가 지금 자네랑 비슷했을 거야.”
“제가 우승할 가능성이 높다는 덕담이시죠?”
“물론이지. 난 내 친구들에게 헛돈 쓰지 말고 자네에게 배팅하라고 했다네. 하하하!”
친구라면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그에게 배팅을 할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데 그는 자신이 아닌 필상에게 배팅하라고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부끄러워하거나 기죽지 않은 그의 편안한 태도에서 세월의 관록이 묻어났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꾸준히 대회에 참가하지만 13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그의 랭킹이 높을 리는 없다.
그래도 이전 챔피언의 자격으로 도전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자신의 스윙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선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반갑습니다. 셰인.”
“반갑소.”
필상의 악수를 거부하고 돌아선 선수는 아일랜드 출신의 셰인 로리였다. 0.1톤을 넉넉히 넘길 육중한 체구와 덥수룩한 구레나룻을 길러 마이크보다도 더 나이가 않아 보이는 그는 믿기 힘들게도 1987년생, 필상과 동갑내기였다.
마이크와는 인사도 하지 않는 건방진 태도는 신경전일 수도 있지만 그가 경기에 임하는 통상적인 태도일 수도 있다.
동반자들과 경기 내내 친숙하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런 매너를 모든 선수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겉보기와는 달리 마음이 여린 그는 상대의 플레이에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오히려 거리를 두고자 하는 보호 본능이라 해석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